CAFE

불교 경전과 이해

[스크랩] 업과 재생에 관한 교설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18.09.02|조회수98 목록 댓글 0

업과 재생에 관한 교설

 

마성(摩聖) /팔리문헌연구소장

 

일반적으로 불교의 업설(業說)은 매우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교리, 혹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가 업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와렌(Henry Clarke Warren)은 불교 교리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업(業, Karma)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업설은 그 자체가 난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교의(敎義)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와렌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담마(dhamma, 法)’라고 불리는 수많은 요소로 분해되며, 법들은 덧없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개인, 즉 에고(Ego)나 자아(自我)로 간주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생(再生)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윤회하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실재(實在)를 나타내는 모든 존재를 거부했을 때, 서양의 사상가는 궁극적 실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동양의 사상가는 업(業)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그러면 재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1)라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비단 와렌 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 학자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업설(the theory of Karma)은 불교를 포함한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윤리사상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업설은 인도에서 짜르와까(C?rv?ka, 唯物論)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전통파는 물론 비전통파의 신앙을 형성함에 있어서 이미 인정됐던 것입니다.2) 그러므로 업설은 수세기 동안 인도사회에서 계급을 형성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사회적 힘입니다.3) 

 

모든 인도철학의 체계는 크게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으로 구분됩니다. 짜르와까와 자이나교와 불교는 무신론에 속하고, 나머지는 유신론에 속합니다. 유신론적 종교철학은 영혼(靈魂, soul)의 영원성과 창조주의 존재, 그리고 내세와 베다의 권위를 믿습니다. 반면 무신론인 자이나교와 불교는 사후 아트만(?tman)이 내세에서도 계속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자이나교와 불교는 유신론적 체계에 따라서 업의 개념에 대한 근본적으로 중요한 관점들은 거의 동의하고 있지만, 짜르와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짜르와까는 다른 종교철학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들만의 고유한 이념과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지금 여기서(here and now)’라는 관심에 전념한 철학으로 독해했던 요소론자(要素論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상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삶을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공평함도 수단이 아니었으며, 반칙적인 것도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좌우명은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으며, 내세에 관해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4)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업설에 대한 관점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라다크리쉬난(S. Radhakrishnan)은 “업설이야말로 자신의 행동과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이론이다. 업설은 이성적인 술어로써 우주를 설명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업은 도덕적 세계에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해진다.”5)고 했습니다.

 

하지만 업의 과보는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긍정적이지 않다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됩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나약해지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때, 업설은 운명론(運命論) 혹은 숙명론(宿命論)으로 혼동되었습니다.6) 몇몇 학자들은 이 이론에 의해 인종차별인 카스트(Caste) 제도가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업설은 약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사회학적으로 적용되었던 업설은 인도에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상황의 억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7)

 

이처럼 인도의 종교철학에서는 까르마(Karma, 業)라는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업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업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자세히 살펴봐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베다시대의 업의 개념, 우빠니샤드 시대의 업의 개념, 자이나교(Jainism)에서의 업의 개념 등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불교의 업설에 대해서 간략하게마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의 업설

 

팔리어 ‘깜마(kamma)’나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 語根 k? ‘하다’에서 나온 말)’라는 단어는 글자 뜻 그대로 ‘행위’, ‘행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불교 업설에서의 까르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아닌 오직 ‘의도적 행위’만을 뜻합니다.8) 붓다 자신이 내린 업의 정의는 여기서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붓다는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意圖, cetan?)이다. 의도를 가지면 몸과 입과 뜻으로 행동하게 된다.”9)고 했습니다. 또한 의도는 정신적 구축이며 정신적 활동입니다. 의도의 기능은 선(善)이나 악(惡) 혹은 무기(無記)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감각 및 지각과 마찬가지로 의도(意圖)도 여섯 가지 내부 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외부세계의 여섯 대상(육체적․정신적 양면)과 연결된 여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10) 감각과 인식은 의도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업의 결과[業報]를 낳지 않습니다. 오직 업보를 낳는 작의(作意, manasik?ra)․의욕(意欲, chanda)․신해(信解, adhimokkha, 확신)․신심(信心, saddh?)․삼매(三昧, sam?dhi)․지혜(智慧, pa???)․정진(精進, viriya)․탐욕(貪欲, r?ga)․증오(憎惡, 瞋心, pa?igha)․무명(無明, avijj?)․만심(慢心, m?na)․유신견(有身見, sakk?ya-di??hi) 등과 같은 것만이 의도적 행위입니다. 정신 형성의 집합을 이루는 52 가지의 정신 활동이 있습니다.11) 이와 같이 의도가 없으면 우리는 어떠한 업도 지을 수 없습니다.

 

욕망이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의도도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됩니다. 그래서 까르마는 상대적으로 선이나 악이 됩니다. 좋은 업[kusala, 善業]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업[akusala, 惡業]은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갈애(渴愛, ta?h?)’, ‘의도’, ‘업’은 선이든 악이든 여하튼 그 결과로써 어떤 힘, 즉 좋은 방향 혹은 나쁜 방향으로 지속하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선이든 악이든 업은 상대적이며, 윤회(輪廻, sa?s?ra)의 순환 속에 있습니다. 아라한(阿羅漢)은 비록 행동하긴 하지만 업을 쌓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된 자아 관념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윤회와 재생을 가져오는 ‘탐욕’으로부터 벗어났으며, 다른 모든 오욕과 번뇌[染과 有漏法]로부터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다시 태어남[再生]이 없습니다.12)

 

업설은 이른바 ‘도덕적 정의[道德律]’나 ‘상벌(賞罰)’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도덕적 정의 혹은 상벌의 개념은 심판대에 앉아서 법을 부여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고의 존재, 즉 신의 개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의(正義)’라는 용어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그 이름으로 인간에게 선보다 악을 더 많이 가했습니다. 업설은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이론입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으로 정의나 상벌의 개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 효과나 결과를 낳습니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행위를 심판하는 자리에 앉은 권력이나 심판자가 정하는 ‘정의’나 ‘상벌’이 아닙니다. 반면 이것은 법칙 자체의 성질에 스스로 좌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업설에 의하면, 의도적 행위의 결과가 사후의 생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13)

 

한 존재는 단지 정신적․육체적인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적인 신체가 그 활동을 모두 정지한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힘과 에너지는 육체적 활동의 중지와 함께 모두 멈추는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의지, 의도, 욕망, 존재하고 윤회하고 더욱 더 많아지려는 욕망은 모든 생명체와 모든 존재를 움직이고, 전 세계조차 움직이는 엄청난 힘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고 가장 큰 에너지입니다. 불교에 의하면, 이 힘은 죽음인 육체의 기능 정지와 함께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어 지속되며, 재생(再生)이라고 부르는 윤회를 낳습니다.14)

 

재생(再生)은 무엇인가?

 

여기서 의문이 제기됩니다. 만약 자아나 영혼(?tman)과 같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재나 본질이 없다면, 죽은 후에 다시 존재하거나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은 후의 삶에 들어가기에 앞서 현재의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지속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온(五蘊)의 집합, 즉 육체적․정신적 에너지의 결합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두 연속적인 순간에도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매 순간마다 그것들은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생애 중에도 매 순간마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지만 우리는 지속합니다. 만일 이 생에서 자아 혹은 영혼과 같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이 없이도 우리가 존속한다면, 왜 몸의 기능이 정지한 후 그 배후에 자아 혹은 영혼이 없이도 그러한 힘들 자체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15)

 

이 육체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에너지는 육체와 더불어 죽지 않고, 우리가 다른 삶이라고 부르는 어떤 다른 형상이나 모습을 계속 취합니다. 어린이에게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지적 능력이 미숙하고 약하지만, 그 내부에 완전히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존재를 형성하는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그 내부에 새로운 형태를 취해서 점점 자라나 완전히 성숙하게 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16)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재가 없듯이,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통과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주 명백하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통과하거나 윤회할 수 있는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괴되지 않고 지속하지만 매 순간마다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연쇄입니다. 이 연쇄는 사실대로 말하면 단지 운동일 뿐입니다. 이것은 밤을 새워 타는 불꽃과 같습니다. 이것은 똑같은 불꽃이 아니며 그렇다고 다른 불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60세의 사람이 됩니다. 분명히 60세의 그 사람은 60년 전의 어린아이와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 이처럼 여기서 죽고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na ca so na ca anno]. 그것은 동일한 연쇄의 지속인 것입니다. 태어남과 죽음의 차이는 오직 한 순간의 생각입니다. 금생(今生)에서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이른바 내생(來生)에서의 처음 생각의 순간을 조건 짓는데, 이것은 실로 동일한 연쇄의 윤회입니다. 금생 자체에서도 한 순간의 생각은 다음 순간의 생각의 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시각에서는 죽은 후의 삶의 문제는 대단한 신비는 아니며, 불교신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결코 근심하지 않습니다.17) 그리고 존재하고 재생하려는 ‘갈애’가 있는 한 윤회는 계속됩니다. 실재(實在)․진리․열반을 보는 지혜를 통해 이것의 추진력인 이 ‘갈애’가 단절되었을 때, 비로소 윤회를 멈출 수 있습니다.18)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고선(最高善, summum bounm)은 사후에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반(涅槃, nirv??a)은 금생에 실현될 수 있으며, 열반을 이루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19) 열반인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는 모든 강박 관념과 망상,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의 정신 건강은 완벽합니다. 그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를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현재를 충실하게 삽니다.20) 그러므로 그는 자아투영(自我投影)없이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을 음미하고 즐깁니다. 그는 즐겁고 당당하며, 청정한 삶을 즐기고, 그의 감각 기관은 충족되며, 고뇌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온합니다.21) 그는 이기적인 탐욕․증오․무지․자만․자존심을 비롯한 모든 ‘오욕’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는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인 사랑․자비․친절․동정, 이해와 관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자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가 아주 순수합니다. 그는 자아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있고 무엇인가 되려는 탐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심지어 정신적인 것까지도, 획득하거나 축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22)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업설은 인도의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비록 업이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업설의 개념은 인도의 다른 종교사상과 불교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이를테면 힌두교에서 말하는 까르마와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까르마의 개념이 다릅니다. 불교의 업설은 의도를 말하며,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붓다는 숙명론을 거부하였으며,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업설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윤회 혹은 재생에 대한 설명도 전혀 다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의미가 다릅니다. 이를테면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tman, 自我)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mation)’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금생의 흐름[santati, 相續]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再生(rebirth)을 윤회라고 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실재적인 아뜨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윤회를 설명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아와 윤회는 결코 모순적인 것이 아닙니다.▣

 

Notes

1) Henry Clarke Warren, Buddhism in Translations (New York: Atheneum, 1979, First published in 1896 by Harvard University Press), p.209.

2) B. G. Gokhale, Indian Thought through the Ages (Bombay: Asia Publishing House, 1961), p.93.

3) S.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ads (New York: Harper & Brother Publishers, 1953), p.125.

4) Kewel Krishna Anand, Indian Philosophy(The Concept of Karma) (Delhi: Bharatiya Vidya Prakashan, 1982), p.46.

5) S. Radhakrishnan, The Principal Upani?ads (New York: Harper & Brother Publishers, 1953), p.120; Gokhale, p.93.

6) S. Radhakrishnan, Hindu View of Life (London: Unwin Books, 1974), p.55.

7) J. H. Hutton, Caste in India. 4th edition. (Bombay: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125.

8)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 (London: Gordon Fraser, 1959), p.32. (hereafter abbreviated as "WBT")

9) AN Ⅲ, p.415, "Cetan?ha? bhikkave kamma? vad?mi; cetayitv? kamma? karoti k?yena v?c?ya manas?."

10) SN Ⅲ. p.60.

11) Abhisamuc, p. 6. quoted by WBT, p. 22.

12) WBT, p.32.

13) WBT, p.32.

14) WBT, pp.32-33.

15) WBT, p.33.

16) WBT, p.33.

17) WBT, p.34.

18) WBT, p.34.

19) WBT, p.43.

20) SN Ⅰ, p.5.

21) MN Ⅱ, p.121.

22) WBT, p.43.

 

- <법회와 설법> 통권 제170호, 2009년 07월호, pp.12-21 -

다음검색
스크랩 원문 : 팔리문헌연구소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