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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Re:신라본기에 의거 황남대총 피장자를 찾는 일은 불가능한 일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0.09.19|조회수107 목록 댓글 1

황남대총 남분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T자형으로 배치된 무덤. 으뜸덧널은 지표를 약간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깐 뒤에 설치했고 이중으로 되어 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동서길이 3.6m, 남북너비 1.0m, 높이 0.8m 크기의 바깥널이 안치되어 있으며 다시 그 내부에는 안널과 껴묻거리수장부가 있다. 안널의 내부에서는 금동관, 금제 드리개, 금목걸이, 가슴장식, 금제 허리띠 등의 장신구와 금동장환두대도 등을 착용·패용한 60세 전후의 남성 인골이 발견되었다. 껴묻거리수장부에는 각종 장신구, 금은장환두대도류, 은제 정강이가리개[脛甲]가 들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류, 유리제 봉수형병(鳳首形甁) 등이, 다시 그 아래에는 쇠솥[鐵釜]과 토기류가 놓여 있었다. 이밖에도 바깥널의 뚜껑 위,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에도 각종 유물이 들어 있었다. 한편 덧널 내부에서는 순장된 젊은 여성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의 서쪽 3m 정도 되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남북길이 5.2m, 동서너비 3.8m, 높이 1.3m 정도의 크기이다. 바닥 전면에 커다란 항아리를 놓고 그 위에 안장틀[鞍橋]을 중심으로 한 각종 마구류, 덩이쇠[鐵鋌], 철제 무기류와 농공구류를 넣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황남대총 북분


다져쌓기[版築]가 아닌 막쌓기의 형태로 봉토를 올렸으며 봉토 언저리에 둘레돌[護石]을 돌린 무덤. 봉토의 꼭대기에서 16.5m 아래로 내려가면 돌무지가 나타난다. 돌무지는 동서 16m, 남북 13m, 지상에서의 높이 6m 정도의 규모로서 내부의 덧널[木槨]과 동시에 쌓아올린 것으로 판단된다. 돌을 쌓아올리는 방식은 지름 30cm 내외의 통나무를 가구(架構)하고 이를 이용하여 쌓았으며 동·서·북쪽 방면에서는 외부에서 버팀목을 비스듬히 박아 돌무지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돌무지의 중앙에는 무너져내린 것이 있는데 이는 덧널이 썩어 무너지면서 위에 쌓은 돌무지가 주저앉아 생긴 것이다. 덧널의 크기는 동서 6.8m, 남북 4.6m, 높이 4m가량으로 추정되며 지상에 있다. 덧널은 잔자갈을 지표 위에 30~40cm가량 쌓고 이 위에 저판(底板)을 깐 뒤 통나무로 측벽(側壁)을 만들었다. 뚜껑은 나무로 된 것으로 여겨지나 형태는 분명하지 않다. 덧널 안에 다시 널[木棺]을 넣었는데 널은 2중으로 되어 있어 바깥널[外棺]의 안쪽 서편에는 안널[內棺]을 놓고 나무로 된 칸막이로 막은 뒤 이로 인해 생긴 공간에 껴묻거리를 넣었다. 바깥널의 동쪽에는 널과 직교되는 방향으로 나무판자를 깔고 그 위에 껴묻거리들을 놓았다. 바깥널의 크기는 동서길이 3.3m, 남북너비 0.8m, 높이 0.8m 정도이며 안널은 길이 2.2m, 너비와 높이는 0.7m 이다. 바깥널의 주위에는 동쪽을 제외한 3면에 석단(石壇)을 돌렸다.


껴묻거리는 놓인 자리에 따라 성격이 다르게 나타난다. 봉토 내부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마구류·쇠도끼[鐵斧]·쇠손칼[鐵製刀子]·토기류 등이 있다. 덧널 상부에서는 금귀걸이, 경옥제 및 유리제 곱은옥과 금구슬, 크고 작은 유리구슬, 유리제 여러면구슬[多面玉], 은제 띠꾸미개[銙板], 금반지 등의 장신구류, 청동제 말종방울[馬鐸], 금동제 말띠꾸미개[雲珠], 말띠드리개[扁圓魚尾形杏葉 : 또는 心葉形杏葉], 재갈[轡], 안장가리개[鞍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 각종 토기류와 쇠살촉[鐵鏃], 쇠손칼 등이 나왔다. 덧널 내부 석단 상면에서 발견된 것은 삼지창(三枝槍)·쇠투겁창[鐵鉾] 토기편 등이다. 안널에는 금관, 금제 드리개[垂下飾], 목걸이[頸飾], 은제 허리띠와 띠드리개[腰佩], 금팔찌, 금반지 등을 착용한 피장자가 머리를 동쪽으로 한 채 안치되어 있었고 피장자가 직접 착용하지 않은 귀걸이, 목걸이 등 많은 장신구가 있었다. 한편 안널의 아랫면에서는 은제 허리띠가 발견되었는데 안널의 밖으로 둘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껴묻거리수장부[副葬品收藏部]에는 백화수피제 모자(白樺樹皮製帽子), 금제 드리개, 은제 새날개모양관장식[鳥翼形冠飾], 은제 허리띠 등의 장신구류와 금동장삼엽문환두대도(金銅裝三葉紋環頭大刀)가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아랫부분에는 금·은·금동·유리제 용기류와 중국 육조시대 흑갈유소병(黑褐釉小甁)이, 그 아래에는 청동제 용기류와 토기류가 놓여 있었다. 석단 및 외관의 동편에는 세발솥[鐵鼎]·토기류·칠기류·철기류가 있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왕릉 ‘황남대총’ 유물 대규모 전시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이다. 덧널(목곽)을 3중 구조로 쌓아 공간을 확보한 뒤 그 바깥에 돌을 올려 단단히 다진 다음 흙으로 봉분을 쌓은 4세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태. 남북 길이 120m, 동서 지름 80m, 높이 22m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함순섭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황남대총이 신라 마립간 시기에 축조된 왕릉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어느 마립간의 무덤인지는 학계에서도 논란 중”이라며 “무덤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고구려 고분 연구와 일본의 고훈시대 연구의 토대를 이루는 절대연대도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큰 봉분이 생긴 것도 마립간 시기부터였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마립간은 동북아시아에서 지배자 또는 족장의 일반 칭호인 ‘칸(干)’에 최고를 뜻하는 마립을 조합한 것으로 여러 칸 중 최고 지위인 왕을 지칭한다.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주인을 신라에서 처음 마립간이란 왕호를 쓴 17대 내물(재위 356~402년), 18대 실성(402~417년), 19대 눌지(417~458년)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시장은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실물의 95% 규모로 재현해놓았다. 먼저 만들어진 게 남쪽의 왕의 무덤이고, 그로부터 약 20년 안팎의 세월이 지난 후 축조된 게 북쪽 왕비의 묘인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나무 및 새의 이미지가 담긴 신라의 관이다. 그런데 금 허리띠와 화려한 큰칼을 찬 60대 남자로 추정되는 남쪽 무덤 속 주인은 마립간이 분명함에도 금동관을 쓰고 묻혔고, 이 마립간보다 늦게 죽어 북쪽 곁에 묻힌 그의 부인은 금관을 착용했다. 왜 황남대총에서 마립간이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착용했는지는 미스터리이다. 남분과 북분의 관 모양을 통해 신라의 금관의 변천사도 살펴볼 수 있다. 금속제 머리띠에 세움 장식을 갖춘 이 관은 즉위식이나 신궁 제사를 지낼 때 썼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평상시 왕이 착용한 관은 고깔 형태였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고깔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썩고, 귀금속으로 만든 관 꾸미개만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전시장에는 순금과 은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수두룩하다. 함 학예연구관은 “마립간 시기의 신라인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생전에 누렸던 모든 것들을 무덤 속에 넣었으며, 살아 있는 왕은 죽은 왕의 무덤을 잘 만듦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출처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박주연 기자(수정 : 2010-09-07 23:47:30)


≪견해≫

1.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황남대총은 실성이사금의 무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고고학적 견해와 남당유고에 의하자면 5세기 초반에 60세 전후로 죽은 왕 중에 실성이사금이 나이가 근접할 뿐만 아니라, 왕은 금동관, 왕비는 금관이 출토된 사실로 보아 왕의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분 또한 눌지마립간에게 축출된 실성이사금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물(奈勿, 350.3~402.2, 壽53) : 병사

보반(保反, 360.8~428.10, 壽69)

실성(實聖, 359.6~417.5, 壽59) : 눌지마립간에게 반정으로 축출

내류(內留, 362.9~432.4, 壽71)

눌지(訥祗, 387.1~458.8, 壽72)

아노(阿老, 391.4~455.2, 壽65)


2. 그러나 이를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문헌사료를 채택하자면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찾는 일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내물과 실성의 처가 모두 미추이사금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의하면 미추왕의 몰년은 284년이며, 편의적으로 내물과 실성의 처를 미추가 사망해를 출생년으로 본다면 모두가 284년의 일이다.

또 미추의 딸의 출산가능시기를 61세까지로 본다면

눌지와 눌지의 비(妃)의 출생시기는 모두 344년의 일이며, 신라본기의 눌지마립간의 사망시기를 대입해 보면 무려 115세가 되며, 거기에 눌지마립간의 처가 눌지의 사후인 20년 전후로 사망하였을 것이라는 고고학적 견해를 더해보면 무려 135세에 이르게 된다.


눌지가 아니고 내물이나 실성을 대입해 보자면, 오차범위가 넓어서 감히 추측하기 어렵다.

몇 가지 가정을 하여 보겠다.


① 가정 1 : 본인이 추측한 눌지와 눌지의 비의 출생가능 시기인 344년 보다 18세 정도를 많다고 가정하여 내물과 실성은 326년 이전을 출생시기로 보았다.


② 내물과 실성의 조부인 구도(仇道)가 처음 벼슬을 받은 것은 아달라이사금 19년(A.D.172)인데 파진찬(신라 제4등급의 관위)의 관위를 받았다. 구도의 나이를 높이고 낮춤에 따라 내해이사금의 처(구도의 외손, 조분의 妹), 조분이사금(구도의 외손), 첨해이사금(구도의 외손), 우로(내해와 조분의 妹의 소생, 구도의 외증손, A.D.249 卒)의 나이에 영향을 미친다.

구도가 파진찬의 벼슬을 받은 시기를 14세로 본다면 구도의 출생은 A.D.159년이다. 구도와 외증손인 우로의 나이 차이를 50세로 본다면 우로는 겨우 41세에 죽은 것이고, 우로가 첫 출전한 내해이사금 14년(A.D.209)년은 우로가 태어난 해인 1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구도의 출생을 10년을 올려서 A.D.149년으로 보자.


구도는 내물과 실성의 조부이고, 출생시기가 177년 차이가 나온다. 구도와 말구와 대서지는 평균적으로 89.5세에 아들을 보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조분(구도의 외손)의 나이를 보면 구도와 조분은 나이 차이를 많이 둘 수 없기 때문에 35세로 보면 A.D.174년생이 되므로 내해이사금이 즉위한 해에 23세가 되므로 조분이 어려서 내해가 섰다는 기록에 모순이 생긴다.

또 구도(알지-세한-아도-수류-욱보-구도)는 김알지(A.D.65년 3월생)의 5세손이다. 김알지와 김구도는 겨우 84세의 나이 차이이므로 그들의 세대간의 나이 차이가 겨우 16.8세에 불하다.


그렇게 계산해 보면 내물이사금은 326~402(壽 77), 실성이사금은 326~417(壽 92), 내물이사금의 처는 284~422(壽 139), 실성이사금의 처는 284~437(壽 154), 눌지마립간은 344~458(壽 115), 눌지마립간의 비는 344~478(壽 135)세라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는 내물의 아들이 어려서 실성이 섰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에도 모순이 있으나 해결방법이 없다. 또한 흘해이사금 즉위년 기사에 나이가 어리지만 나이 든 사람과 같은 덕이 있다는 신라본기의 기록에도 모순이 있으나 이 또한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러므로 내물, 실성, 눌지로 이어지는 5세기 초반에 사망한 왕중에는 60세에 사망하신 분이 없다. 또한 4세기 후반으로 보아 흘해를 포함하더라도 우로의 사망시점인 249년을 출생시점으로 보야야 하므로 신라본기에는 356년이 사망시기이므로 이분 역시도 108세까지 산 셈이어서 고고학적으로 황남대총에 묻혔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남대총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왕의 재위기와 나이로 비교하여 황남대총의 피장자를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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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9.19 남당유고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결과와 전혀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성의 처인 내류부인은 내물과 실성의 릉에 분골하였다고 한다.
    황남대총의 북분에는 피장자의 묻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분골이 추모경에서 말하는 화장이라면,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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