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진②, 해방에서 전쟁까지 - <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 만남의 집 (39) - 6.25전쟁 전 38선 무력충돌 상황
작성자정론직필작성시간14.06.15조회수803 목록 댓글 1유기진①, 구순의 통일운동가
<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 만남의 집 (38)
류경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4.06.05 11:24:40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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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진②, 해방에서 전쟁까지
<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 만남의 집 (39)
류경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4.06.14 14:18:51
해방 후 어린 나이에 선생은 면당위원장의 추천으로 입당하고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흥남공장은 비료, 화학, 카바이트, 화약공장과 제련소가 있는 이북의 공업 중심지였다. 공장을 폭파하고 도망가려는 일본인들의 시도를 알게 된 주영하, 김태식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선생의 6촌형 등과 함께 급히 쫓아와 공장을 정상화시킨다.
일본인 기술자들을 설득해 밤새워 기술을 전수받고, 청년 노동자들로 자위대를 구성해 공장을 지켰다. 1주일이 걸려 공장이 탈 없이 돌아가게 되자 일본인들이 다시 공장을 파괴하려 했다. 화약공장 같은 데는 청년 자위대가 3일 밤 동안 습격해 오는 일본인들을 막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결혼 사흘 만에 입대한 신병을 ‘조국의 부강건설에 가정이 중요하다’며 집으로 돌려보낸 박금철 연대장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동한 적도 있었다. 훈련을 마친 선생은 하사로 부분대장에 임명된다.
그동안 38선의 정세는 격동한다.
초기에는 인민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감시하면서도 장사꾼들의 내왕은 묵인해 주었지만, (남한의) 백골부대 김석원이 38선 이북을 침범해 마을을 소각하면서 48년 초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남한) 국군들이 105mm 포로 전쟁처럼 들이치니 (북한의) 38경비대에서도 포가 필요했다. 인민군이 박격포와 45mm포 중대를 소환한 48년 7월, 선생도 내무성에 소환되어 38경비대로 나온다.
내무성에서 교재도 없이 백지 노트에 필기하며 교육 받기를 일주일, 그 노트를 심사해 포학교육 능력을 인정해 38선으로 보냈다. 사리원 도착 후 해주포병직속중대로 45mm 포병중대가 창설되고 선생은 1분대장으로 복무하게 된다. 포중대 5명의 분대장이 새로 충원한 포대원들을 교육하고, 정치사상 교육은 문화부 중대장이 맡았다.
38선에서의 훈련은 곧 싸움이었고 싸움이 학습이었다. 김석원의 백골부대와 밀고 당기며 1년 6개월 간 까치산, 운파산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크고 작은 전투는 6.25까지 지속되었다. ‘나의 고지 조국의 고지, 조국의 고지 나의 고지’, 38선 부근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죽어가던 한 병사의 마지막 외침은 선생에게 일생의 전투지침으로 각인되어 있다.
인민군 부대에서 ‘아바이’로 통하던 최현 장군에 대한 선생의 추억은 각별하다. 백전백승의 신화로 아무리 전세가 불리해도 “우리 아바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사기가 무섭게 올랐다. 한밤중에 총소리가 나면 (최현) 혼자서라도 밖에 나가 꼭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잠을 잤다.
평상시 부하들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한다. 부대를 돌 때는 늘 식당으로 먼저 갔다. 주방장을 불러놓고 “소뼈는 얼마동안 고았는가?” 일일이 지적했다. 비가 와서 천막을 지어도 먼저 들어가 쉬는 일이 없었다. 천막이 다 완성된 후 병사들이 다 들어간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한번은 전세가 불리한 전투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으나 상급간부가 오판으로 싸움을 계속 진행하다가 병사 두 명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최현은 격노하여 그 간부에게 “우리 아들 내놓아라”하며 총을 꺼내 들 정도였다. 그런 장군 밑에서 인민군들은 언제나 솔선수범했고 무기 하나 포 하나 대충 닦는 일이 없었다. 인민에게 보답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700
위 게시글을 퍼온 이유는.....
나이어린 한국국민들 중에는....6.25 전쟁이 평화롭던 한반도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사건으로 잘못 아는 국민들이 많은데...
그러나 일제패망후, 즉, 일제해방후 한반도 상황은 사실
현재의 이라크, 아프간 상황과 아주 비슷했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즉, 38선 부근에서만 계속해서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라
남북한 내륙 지역들에서도 계속해서 포탄 등이 폭발하여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이었지요.
위 내용은....38선 부근의 얘기만 있는데...
혹시 남북한 내륙 지역에서의 남북충돌 상황들을 묘사한 게시글이 있거든
우리 카페로 퍼와주셨으면 합니다.
자료 수집 및 보관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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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역사나무 작성시간 14.06.15 "남북한 내륙 지역에서의 남북충돌 상황들을 묘사한" 인터넷 게시글은 잘 모르겠지만,
해방정국에서 전쟁후 80년대까지의 상황을 기술한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저자: 박세길>,을 추천합니다. 총 3권
그리고 우리 카페에도 6.25전쟁 당시의 국제정치적 인과관계를 잘 설명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몇일전 '붉은바다'님이 올린 "도올 김용옥 특강 역사를 말한다." http://cafe.daum.net/sisa-1/dqFG/729 , (두번째 동영상)
김용옥님의 역사인식이 모두 기록물들에서 얻어진듯 하고, 미국(서양)의 정체성을 간과한듯 합니다만,
동북아의 근현대사를 정말 잘 설명하는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