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해탈문
조선시대에 세워진 도갑사의 정문. 국보 제50호.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주심포 형식의 단층건물이다. 1960년 5월 해체보수 때 종도리(宗道里) 밑의 장여[長舌] 윗면에서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어, 1457년 중건을 착수하여 1473년 완공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문은 가람(伽藍)의 정문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문 앞에 안치하는 사천왕문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현재 사천왕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문의 서쪽에 문수보살(文殊菩薩), 동쪽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신 안치했다. 기단 위에는 자연석으로 초석을 배열하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헛첨차를 두어 주두 위에 놓인 살미첨차를 받도록 했으며 그위로 대들보를 놓아 결구했다. 대들보 위에 우미량(牛眉樑)과 포대공(包臺工)으로 종보를 받고 있으며 종보 위에는 소슬합장재와 복화반을 두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이 문의 건축양식은 기본적으로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과 같은 계통이지만 주심포(柱心包) 중기 건물로서 여러 가지 세부기법이 골고루 혼용된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즉 어중간한 2출목, 무위사의 보아지형[樑捧形], 부석사 조사당과 관룡사 약사전의 다포계 포대공,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마루대공이 혼용되었다. 많지 않은 산문건축(山門建築)의 하나로 귀중한 자료이다.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국보 제144호. 총높이 860㎝, 상높이 600㎝, 선재동자상 87㎝. 암벽을 감형(龕形)으로 파고 그 안에 상을 고부조로 새겼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높은 육계(肉髻)가 있고, 네모진 얼굴은 불신(佛身)에 비해 큰 편이다. 약간 치켜올라간 눈꼬리와 꽉 다문 입 등에서 엄숙한 분위기가 풍긴다. 어깨는 각이 져 당당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팔은 가늘고 가슴은 빈약하며, 하체로 내려올수록 평면성이 강해져 전체적으로 신체 각부분의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입었는데 얇아서 몸체의 굴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왼팔 위에는 촘촘하게 주름이 잡혀 있으며 가슴 부분과 다리 위에는 가는 선으로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고, 흘러내린 옷주름이 대좌를 덮어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손 모양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 초기에 유행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그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긴 거신광(擧身光)인데 두광 안에는 연꽃무늬와 당초무늬[唐草紋]를, 신광 안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이 상의 오른쪽 무릎 옆에는 오른손에 지물(持物)을 든 선재동자상이 조그마하게 부조되어 있다. 이 마애불상은 얼굴이 불신에 비해 크고, 신체 각 부분의 불균형과 경직된 표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