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이해
이세형(협성대학교 교수)
I. 들어가면서
오늘 우리는 지구 도처에서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자연이 파괴되어 죽어가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질병, 전쟁, 가난 등으로 인해 무죄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미움과 증오에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사태로 준비하지 않은 죽음을 맞기도 한다. 죽음의 소식, 죽음의 소리를 접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무겁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맞아야 하는 보편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삶의 과정이다. 이처럼 누구나 아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죽음 혹은 자기와 가까이에 있는 죽음은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필연적 사실로서 맞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죽음은 자신의 전 존재가 참여하는 지칭할 수 없는 전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곧 자신의 전체가 죽음에 먹혀 버리는 두려움 때문에 죽음은 자기와 관련해서는 일반화할 수 없는 삶의 궁극적 질문이 된다. 때문에 죽음이 우리의 삶을 먹어버리기 전, 죽음을 대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점에서부터, 죽음에 임박해서가 아니고 아직 죽음이 예기되지 않은 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종 사람들은 죽음이 언제 죽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죽음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죽음을 준비하고 삶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길은 먼저 저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태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런데 죽음을 준비하고 삶 안에 초대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준비하고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죽느냐는 곧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다.
죽음 준비와 관련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그녀의 죽음이해를 다뤄보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과제이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삶의 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삶의 인간에게 성숙과 성장을 가져오는 최고의 경험이며, 또 다른 세계에로의 참여라고 이해한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에 들 때까지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완성을 이루도록 남아있는 사람들과 제도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가르침이다. 먼저 엘리자베스의 생애를 통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이해로서의 삶의 이해가 발전되어 갔는지 살핀 후, 그녀가 쓴 대표적인 책들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기본적인 죽음이해를 다뤄보고자 한다.
II.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애
엘리자베스는 1926년 7월 8일 스위스 취리히의 중상층 가정에서 아버지 에른스트 퀴블러(Ernst Kubler)와 어머니로부터 에릭카(Eriak), 에바(Eva)와 함께 세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세 쌍둥이로서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였다. 나는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가?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위해 그녀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초등학고 6학년 때 동생인 에릭카의 아픔을 경험하고는 의사가 되고자 결심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순종적인 전통적 여인이기보다는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는 자기 의견이 뚜렷한 이였다고 회고했다. 자기 의견이 뚜렷했기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삶의 여정으로 이해하였고, 우리가 더 많은 어려운 여정을 거칠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자서전 {삶의 수레바퀴}(The Wheel of Life)에서 자신의 여정을 4가지 동물의 상징으로 표현하면서 전개한다. 유년기는 생쥐로서 모든 것에 관심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남보다 언제나 앞서기를 좋아하는 시기였다. 곰으로 표현된 청년기는 겨울잠을 즐기며 유아기를 돌아보며 즐기는 삶을 살아갔다. 장년의 시기는 물소로서 대 초원을 거니며 안정된 분위기에서 삶을 즐기며 중후한 과제를 실천하는 시기 그러면서 독수리로 날개 치며 올라가는 시기를 고대하는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노후는 세상위로 날개 치며 비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높이 바라보도록 격려하는 시기였다고 술회한다. 이제 간략하게 그의 인생의 여정을 {삶의 수레바퀴}에 소개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I.1. 어린시절(생쥐의 시기)
어린 시절 엘리자베스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기억하는데 아프리카의 삶을 담은 그림책을 읽은 것과 아버지와 함께 말 경주에 참관한 후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간 일이었다. 그림책은 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하였고, 병원에서 죽어가는 아이와 만남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였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이미 의사와 간호사의 비인간적인 태도를 경험하였고, 환자는 의술보다도 따뜻한 사랑을 필요로 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엘리자베스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애완동물을 돌보며 사랑하였다. 또한 자기의 애완동물 블랙키의 죽음, 친구인 수지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 친구의 준비된 죽음 등을 초등학교 시절 경험하면서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죽는 방법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비참할 수도 존엄스럽게 될 수도 있음을 경험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배려로 자연 안에서 영감과 깊은 쉼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학교의 종교 교사로부터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개신교로 벗어나고 싶었지만 짐머만(Zimmerman) 목사의 배려로 16세 때 루터파 교회에 입교하였다. 이때 세 쌍둥이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란 이름이 주어졌는데 엘리자베스는 사랑이란 이름을 받아 이를 자신의 삶의 책임과 과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42년 고등학교를 마치고 엘리자베스는 의사가 되려는 그녀의 꿈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병자를 고치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아픔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것이 자기 생애의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라는 제안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브라운 박사의 실습생을 거쳐 취리히에서 화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을 공부하고 칸톤 병원의 피부과 실습생이 되었다. 그 후 젠더 박사 아래에서 매춘부들의 피를 채취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 일에 종사하면서 엘리자베스는 피를 뽑는 것 뿐 아니라 저들과 대화하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많은 피난민이 스위스로 들어오게 되자 엘리자베스는 병원에서 많은 희생자들을 돌보아야 했다. 그 후 새로 들어온 의사인 아브라함 봐이츠의 제안과 아버지의 별장에서 만난 평화 봉사단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위스 밖에서 전쟁 후 고통당하는 이들을 돕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에커시(Ecurcey)로 향했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는 고통당하는 이들을 도우면서 삶의 목적을 키워갔다. 그리고는 유럽 전역을 돌며 평화단과 함께 전후 희생자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면서 이전 아브라함 봐이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폴란드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삶의 의미를 더욱 깊게 발견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엘리자베스가 삶의 의미에 대한 가장 큰 교훈을 발견한 곳은 인간을 참옥하게 해쳤던 가장 잔인한 현장에서였다. 폴란드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엘리자베스는 30만 명 이상이 죽어나간 어느 나찌 수용소를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인간의 잔혹함,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가스실과 수용소의 방들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던 그 장소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나비였다. 삶이 부서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인류가 저지른 잔인함을, 잔인하게 죽어가는 순간에도 삶이 끝이 아님을 나비를 그려냄으로서 증언하고 있었다. 이후 8개월 동안 유럽에서 봉사하면서 엘리자베스는 나비에 대해서, 폴란드계 유대인 소녀로부터 우리 안에 히틀러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언어와 국경을 넘어 사랑과 형제애를 가르쳐준 러시아 집시들에 대해서, 생사를 넘나들며 버려진 자신을 병원으로 안내했던 가난한 여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더 깊이 삶은 희망할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II.2. 청년기(곰의 시기)
스위스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다시금 암슬러 교수 밑에서 이전의 실험 동에서 일을 계속하며 공부한 후 1951년 의과대학 자격시험에 합격하였다. 취리히 대학에서 엘리자베스는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그녀의 과제를, 칼 융과의 깊은 교제는 없었지만, 그를 통해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남편이 된 뉴욕 브루클린 출신의 임마누엘 로스(Emanuel Ross)를 만나게 된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여동생인 에바의 남편인 세플리(Seppli)가 암에 걸려 수술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돕게 되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삶은 미래에 맡겨서는 안 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곧 삶은 현재에 대한 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엘리자베스가 랑겐탈(Langenthal)에서 바쁘게 환자를 보던 어느 날 세플리에게서 와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고, 마지막 죽기 전 보고 싶어했던 세플리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후에 엘리자베스에게 큰 회환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랑겐탈에서 엘리자베스가 경험한 것은 의사로서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시간은 환자를 돌보고 치료를 하는 시간이 아니고, 친구가 필요한 환자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저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결국 랑겐탈의 경험에서 엘리자베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운다.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해부학을 잘한다든지, 수술을 잘 한다든지, 혹은 약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선하게, 돌봄의 자세를 가지고, 사랑을 지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1958년 엘리자베스는 만니와 결혼한 후 미국으로 향했다. 뉴욕에 도착한 이들 부부는 글렌 코브 커뮤니티 병원(Glen Cove Community Hospital)에서 순회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 브롱스에 소재한 콜럼비아 장로교 병원에서 소아과 래지던트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장로교 병원에서 해직되고 맨하탄 스태이트 병원(Manhattan State Hospital)의 정신병원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배안에 있던 아이가 유산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후에 엘리자베스는 이 아픔의 경험을 통해 보다 높으신 이의 능력을 경험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십니다."
맨하탄 스태이트 병원에서 일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세플리의 임종시 가보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였던 엘리자베스는 조건이 허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해 스위스로 향했다. 죽어가는 환자의 요구는 내일이 허락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와 깊은 관계 회복을 경험했다. 다시금 뉴욕에 돌아와 일하게 된 맨하탄 스태이트 병원은 시설과 분위가가 엉망인 병원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만난 환자들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비참하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맨하탄 스태이트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얻은 성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봐준데 있었다. 말하자면 환자를 환자로 취급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대해준 것이었다. 저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습관을 인지하고 저들의 편에서 대해주자 저들이 반응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2년 동안의 래지던트를 마치고 엘리자베스는 몬트피오레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병원에서 엘리자베스는 죽어가는 환자들이 무관심에 방치된 것을 경험했다. 이미 엘리자베스는 유럽에서의 경험과 맨하탄 병원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과학과 약의 처방 너머의 또 다른 치유의 힘을 알고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들은 사랑과 어루만짐 혹은 의사소통을 원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는 의사로부터 격리된 안전지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정직함을 원합니다. 저는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려는 우울증 환자조차 저들의 삶 속에 아직도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최악의 처우를 받고 있었다. 방문이 금지되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방식에 참을 수 없었다. 죽어가는 환자들은 엘리자베스에게 가장 소중한 스승이었다. 그는 이들이 저들의 운명에 대해 거부하고 분노하고 울부짖다가 타협하면서 우울해 하다가 마침내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엘리자베스는 누군가 저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이미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므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임박한 죽음을 저에게 알릴까 말까도 아니고, 그가 이 사실을 알까 모를까라는 질문이 아니다.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죽어가는 이들의 소리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가?'"이다. 이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맞을 때까지 참된 인간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를 듣게 된다. 이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더욱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1962년 만니와 엘리자베스는 콜로라도 대학에서 정신과 의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곳에서 의술보다 인간관계에 관심이 있었던 마골린(Margolin) 교수를 만났다. 마골린 교수가 잠시 유럽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를 대신해 엘리자베스는 의과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강연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주제는 의사들이 죽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죽음의 문제를 좀더 편안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론과 실제부분으로 나누어 이론을 준비하고는 실제 부분에서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16살 난 린다(Linda)라는 소녀의 증언을 첨가시켰다. 이 증언은 참석자들에게 자신들의 죽음 가능성에 대한 느낌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자신이 린다의 경우라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할까? 그때에 엘리자베스는 이제야 여러분은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는 멘트로 강의를 마쳤다. 죽어가는 이의 말을 들음으로써 저들은 엄청난 도전과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1965년 엘리자베스는 만니와 함께 시카고로 자리를 옮겨 빌링스(Billings) 병원 정신병동에서 헬무트 바움(Helmut Baum) 박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시카고 신학교 학생들이 방문하여 죽음과 임종에 대해 질문하면서 죽어가는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갑작스런 두려운 삶의 종말, 비극적인 죽음, 살인 혹은 알 수 없는 끔찍한 병의 일종으로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죽음을 끔찍스런 아픔으로 생각했다. 의사들의 경우는 환자의 죽음을 자신이 베푼 의술의 실패로 생각했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되도록이면 피하려 했다." 환자들 또한 죽음을 맞는 환경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는 것은 슬프고, 외롭고 비인간적인 사건이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들과 응급실에 실려 간 환자들은 외부와 차단되어 외로운 시간들과 분투해야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엘리자베스는 죽음과 임종을 맞는 이들, 이들을 책임지고 있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또한 환자들의 가족들 사이에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서로 나누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가에 관심하였다.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고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죽음이란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죽음은 삶의 총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고, 어떻게 죽느냐는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신학생들의 요구로 시작된 죽음을 맞는 이들과의 면담은 1967년쯤 매주 금요일 세미나로 발전되었다. 의과대학 교수, 의과대학 학생, 신학생, 간호사, 성직자, 랍비, 사회복지사가 이 세미나에 대거 참여하였다. 세미나에 대한 이와 같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죽음을 의술의 실패로 이해한 전문의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자베스가 여자라는 이유에서 더 많은 반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주변에서 많은 죽음을 경험하였고, 더욱이 네 번이나 유산을 경험하였으며 두 자녀를 둔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는 죽음을 더욱더 삶의 한 일부로 생각하게 되었고, 죽어가는 이들과 이들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위한 일을 새로운 사명으로 생각하여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병원을 청소하고 있던 한 흑인 여성의 증언처럼 죽음을 낮선 것으로서가 아니고, 자신의 오랜 친구로 삼게 되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불평하는 것은 의술의 허술함이 아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동정이나 이해가 부족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의사들은 내 간의 크기가 얼마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나를 더 괴롭히는 것은 집에서 돌봐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아무도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얘기해 주지 않아요." 이는 엘리자베스가 만난 한 여인의 절규였다. 환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엘리자베스가 얻은 것은 아무도 의사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면담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저들의 삶에는 아직도 삶의 목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죽음에 들기까지 성숙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는 모든 인간들도 같은 여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임종을 앞둔 이들과 저들을 돌보는 모든 인간이 삶을 정직하면서도 충분히 살아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죽음과 임종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병원 채플린이었던 젊은 흑인 목사 랜포드 게인스(Ranford Gaines)를 만났다. 둘은 죽음과 임종을 맞는 이들이 관심하는 것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한 인간이 죽느냐는 어떻게 그가 살았느냐와 관계된다고 결론하게 되었다. 곧 죽어가는 이와의 만남은 영성의 문제와 관계된다. 이점에서 랜포드와의 만남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종교를 자신의 과제에 포함시키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1969년 플러스모어에 집을 이사한 후 엘리자베스는 스위스에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였다.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게 해주고, 다른 한편 어머니와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식물인간이 되었을 경우 자신을 잘 돌봐달라고 요청하였다. 미국에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다시 스위스로 향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말처럼 식물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삶을 삶답게 살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임종을 맞은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 나름의 사랑을 느끼며 사랑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완성을 향해 살다가 죽음을 맞았다. 어머니와의 시간은 엘리자베스에게 죽음을 앞둔 시점은 인생에 있어 최후의 가장 엄숙한 성숙의 기간임을 몸소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평화단을 조성하고 격려하는 일과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를 둔 부모들을 위해 일하는 영역에까지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삶의 유일한 목적은 사랑임을 더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나 불행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충격과 부정, 격노와 분노, 그리고는 슬픔과 아픔을 토로한다. 그러다가 하느님과 타협의 시간을 거쳐 우울에 빠지면서, 질문한다. 왜 나인가? 그리고는 세상 여타 관계와 단절을 거치면서 평화와 받아들임의 단계에 접어든다. 엘리자베스는 임종 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심리적으로 다섯 단계를 거치는 것을 발견한다. 거부 혹은 사태를 부정하는 것은 기대치 않은 소식을 맞는 방어적이면서 정상적인 건강한 방법이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사태는 이내 분노로 대치된다. "왜 나 인가?"라는 질문은 "왜 저 사람이 아닌가?"로 바뀌게 된다. 이 기간 가족, 의사, 간호사 친구 등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몹시 힘든 기간을 맞게 된다. 공격의 대상은 건강한 모든 사람들에게 향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느님에게까지 향한다. 분노의 단계를 거쳐 환자는 타협의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가 사실은 환자와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최적기이다. 이제 까지의 분노와 삶에 풀리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는 기회이다.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수치를 느끼지 않고 표현할 수 있도록 허락될 때 이들이 마침내 아름다운 반응을 하는 것을 묵도하게 된다. 그러나 환자가 더 이상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마침내 깊은 우울에 빠지게 한다. 도움을 줄 만한 말도 필요치 않은 단계이다. 그저 환자로 하여금 슬픔을 표현하도록 허용해주고 사랑의 어루만짐이나 기도를 들려주고 그의 침대 곁에 있어주는 것이 최고의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환자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울부짖음, 슬픔을 표현하도록 허용이 되고, 아직 끝내지 않은 일들을 마무리하게 하고, 그들의 두려움을 표현하게 하며, 보다 위의 단계들을 향해 나아가도록 허락된다면, 마침내 이들은 수용이라는 마직막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는 행복한 시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울해하거나 분노해 하는 단계는 아니다. 조용하고, 명상 가운데 모든 것을 접고 평화로이 앞으로 전개될 과정에 대해 기대를 하게 된다. 이전의 분투는 사라지고 조용히 잠에 들기도 하고 긴 여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쉼을 가지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죽어가는 임종 자들과의 만남에서 배운 것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만난 임종 자들은 죽어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 이상을 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등을 가르쳐 주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게 참으로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죠. 그것은 죽어감에 대한 것이 아니고 살아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1969년 {죽음과 죽어감}을 출판하고 라이프 잡지와의 인터뷰 한 후 엘리자베스는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일하고 있었던 병원의 환경은 여전히 죽어가는 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있었다. 이점에 분노를 느낀 엘라자베스는 점점 더 병원의 환경 변화에 역점을 두어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자 관심을 집중하였다. "죽은 이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엘리자베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탄생과 죽음은 아주 비슷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탄생과 죽음은 모두 새로운 여정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탄생보다 오히려 더 평화롭고 즐거운 경험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나찌와 에이즈와 암 같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죠!" 실제로 모든 죽음은 고요한 평화와 함께 찾아온다. 이제까지 엘리자베스는 죽음을 관찰하고 생명이 떠나가는 것만을 묵도하였다. 그런데 그녀에게 찾아온 질문은 "죽으면 우리의 생명이 어떤 모습으로 떠나가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그리고는 20년 전 마이다넥(Maidanek) 수용소에 그려져 있던 나비들을 생각해내었다. "왜 나비인가?" 수용소에서 죽어갔던 저들은 이미 죽음을 맞고 있는 이들과 같은 경험을 했던 이들이고 이들이 보았던 것은 지옥과 같은 육체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환상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비는 죽음에 드는 나찌 수용소에서 죽어갔던 이들이 인류에게 남기려 했던 유산이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쉬와츠 부인(Mrs. Schwartz)의 임사 증언과 죽음을 경험했던 이들과의 대담을 통해 죽음이후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키워갔다.
II.3. 장년기(아메리칸 들소의 시기)
엘리자베스는 병원을 옮겨 라 라비다(La Rabida) 어린이 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1973년까지 어린이로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엘리자베스는〈삶, 죽음, 그리고 전이〉라는 공동 연구회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회는, 죽어가는 환자들과의 면담, 1주일간의 집중 강의, 질문과 대답의 시간, 그리고 임종 자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 때문에 지닌 눈물과 분노를 극복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있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1970년대 2만 명 이상의 환자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이들과의 면담을 통해 전통적인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하게 되었다. 곧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만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렇기에 단순히 이 땅에 존재하고 생존해야 하는 그 이상의 삶을 위한 삶의 이유가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임사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죽음에 들어선 이들이 느끼는 것은 고통도 아픔도 두려움도 염려도 슬픔도 아니었다. 죽음에 들어선 이들이 경험한 것은 나비로 변형되는 따뜻함과 고요함이었다.
증언자들에 의하면 죽음에 들어가는 몇 가지의 단계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몸을 떠나가는 단계이다. 마치 나비가 고치를 빠져나가듯이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였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자기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억하고 있고, 몸이 빠져나가면서 몸의 온전함,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였고, 죽음 이후 다시 생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았다고 증언한다.
둘째 단계는 몸을 벗어나 영과 혼이 자유로이 여행하면서 슬픔에 잠긴 이들을 위로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임사자들은 천사들을 만나기도 하고 이미 죽은 이들과 만나기도 한다.
셋째 단계는 터널 혹은 전이의 문을 통과하는 단계이다. 그리고는 밝은 빛을 만난다. 이 빛의 에너지는 흘러 넘치는 무제약적 사랑이다. 또한 우주의 궁극적인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이 빛을 그리스도라 하기도 하고 부다라 하기도 한다. 이때 이들은 흥분과 평화와 고요함과 영원한 집에 돌아갈 기대감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한 이들은 한결같이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유일한 대답은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네 번째 단계는 하느님이라 부르는 가장 높은 근거의 현존 안에 있음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이들은 이전과 오늘과 내일이 동일하게 하나로 경험되고, 이전의 육체는 벗고 영적인 에너지가 되어 하나 됨 곧 존재의 완전함을 경험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살았던 이전의 삶을 돌아보면서 왜 그렇게 살았는지의 이유를 보게 된다.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을 하느님께로 받는다. 그러나 그 선택을 가지고 최상의 선택 곧 사랑의 삶을 살라는 책임을 가진 자유를 선물로 갖는다. 실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성장하고 사랑할 자유를 선물로 받은 인간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책임을 가진 존재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살렘을 만났다. 살렘은 엘리자베스가 사자와 만남을 경험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후 엘리자베스의 관심은 더욱 죽음과 관계된 환자들과 전문인들을 돕는 곳에로 향하였고 마침내 자신이 운영하는 치료 센터를 건립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만니와 이혼했다. 이혼 후 그녀는 더욱더 죽음 이후의 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본인 스스로 저 세상의 영들과 대화를 경험할 뿐 아니라, 영이 몸을 떠나는 경험, 삶의 다른 단계를 거쳐 영원한 세계에 이르는 경험을 하였다. 특별히 먼로의 집에서 그녀는 천 번의 죽음, 다시 태어남에 대한 경험 등을 거쳐 "산티 닐라야(Shanti Nilaya)"를 경험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 속에 있는 생명에 대한 인식, 곧 우주적 의식(cosmic consciousness)을 경험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치료센터를 [산티 닐라야]로 개명했다.
[산티 닐라야]에서 엘리자베스는 무제약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아이와 어른의 심리적, 육체적, 영적인 치유에 관심하게 되었고, 〈삶, 죽음. 전이〉의 웍?事? 날로 번창하여갔다. [산티 닐라야]의 목적은 인격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는 "죽음이란 두려워 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죽음이란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신비한 경험이죠. 죽음이란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에게 또 다른 삶의 도전은 에이즈 환자들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진행하는 〈삶, 죽음, 전이〉의 웍?乍? 에이즈 환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들도 같은 인간으로 사람답게 죽을 권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1983년 7월 1일 엘리자베스는 버지니아에 농장을 구입하여 1년의 작업을 거친 후 1984년 7월 1일 에스콘디도를 떠나 버지니아 헤드 워터스로 이사했다. 이곳 농장의 이름을 힐링 워터스 농장(Healing Waters Farm) 으로 바꾸고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감옥에서 비인간적으로 대우받고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방문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미국 정부로 하여금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하도록 했다.
II.4. 노년기(독수리의 시기)
노년에 이르러 엘리자베스는 에이즈 환자들을 돌보고 저들의 임종을 돕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서 이 과제를 이룰 수 없음을 알고는 자기가 관계하고 있는 [산티 닐라야] 구독자들을 향해 돌볼 가정을 지원받고 사회의 여러 기관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에이즈 환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갔다. 아울러 자신의 농장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센터(Elizabeth Kubler-Ross Center)로 키워가면서 1990년 7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센터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임종 자를 위한 돌봄의 프로그램을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했다. 1992년에는 남아공을 방문해 백인 죄수들과 흑인죄수들이 같이 모인 상황에서 웍?事? 진행했다. 이와 같은 모든 과정을 통해 엘리자베스는 성장과 사랑과 봉사가 삶의 목적임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생애는 결코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배신과 아픔과 상실을 경험하였지만 언제나 그러한 아픔을 통해 새로운 성숙의 기회로 삼았다. 1994년 그녀의 농장이 불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픔을 오히려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스카스데일에 있는 아들집으로 옮겨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진정한 삶을 살았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죽음이란 삶의 최고의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오히려 이 세상의 아픔과 투쟁에서 완전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의 세계에로 옮겨가기를 희망하였다. 노후에 엘리자베스는 중풍으로 남에 의지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소망은 나비가 되어 고치를 떠나 위대한 빛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희망하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엘리자베스는 인내하며 관상하는 것을 배워갔다. 그리고 이제까지 먼저 보냈던 이들의 죽음 경험을 자신이 직접 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영혼을 감싸고 있던 육체를 벗고 자유하게 될 때, 고통과 두려움과 염려에서 자유 하여 나비처럼 자유로이 날아서 하느님께로 귀향할 것이다. 이곳은 결코 우리 홀로 있는 곳이 아니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 사랑했던 이들과 함께 하는 곳,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사랑이 넘치는 곳일 것이다.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끝난 엘리자베스는 이 땅이 너무 황폐하고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전쟁과, 물질주의와 파괴가 일삼아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에 인류의 자연을 통한 재앙이 임할 것임을 예감했다. 자연과 영성 세계의 보호를 위해서 자연의 재해는 불가피한 것으로 예감했다. 그리고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그대들이 살아온 것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죠. 궁극적인 교훈은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느냐? 입니다. 이 땅에는 굶어죽는 사람들, 노숙자들, 에이즈 환자들, 폭력에 희생당한 자들이 있어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해와 동정을 바라며 외치고 있죠.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소리들이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큰 행복은 궁핍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오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은 언제나 도움을 주는데서 온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근거에서 와서 동일한 근거에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당하는 삶의 어려움, 재해처럼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어려움의 시간들은 성장의 기회이고, 성장이 삶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자신을 먼저 치유하지 않고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왔다면 우리 모두는 신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 부여받은 신성 때문에 우리의 불멸성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이죠.
엘라자베스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마친다.
죽기까지 살아야 합니다.
누구도 홀로 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해를 넘어서 사랑을 받습니다.
모든 이는 축복을 받았고 인도를 받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난할 수 있고, 배고플 수 있고, 누추한 곳에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대가 이 땅에 이룩하러 온 일을 이루었기에 네 삶을 축복할 것입니다. 가장 배우기 힘든 교훈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죽어 감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죽어감이란 당신 삶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경험입니다. 어떻게 죽느냐는 어떻게 살았느냐에 결정되죠. 죽음은 이 세상에서 고통과 아픔이 없는 다른 세계에로의 전이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이 있을 때 견딜 수 있죠. 나의 소원은 여러분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사랑을 베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죠.
II.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 이해
사람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죽음의 현상을 의식적으로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이 그리고 자주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을 오히려 극복해야 한다. 퀴블러 로스에게서 삶과 죽음은 나누이지 않는다. 삶은 죽음의 시작이고,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여정이다. 이점에서 삶과 죽음, 탄생과 죽음은 서로의 공통점을 안고 있다. 곧 삶은 죽음을 안고 태어나고, 죽음은 삶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점에서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존재한다. 삶과 죽음은 변화의 과정이다. 죽음은 삶의 과정 안에 공존하는 한 부분이다. 따라서 삶을 모르면 죽음도 모르는 것이고 죽음을 모르면 삶도 모르는 것이다. 죽음이 삶의 한 과정이라면 이제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죽음을 통한 우리의 삶을 보다 의미 있고 값있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생각이다. 삶의 순간순간을 죽음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 인생에 더 깊은 의미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은 소망이 있는 것이다. 곧 죽음을 삶 한가운데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진실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고 그 의미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이해는 그의 인간 이해와 상응한다. 로스는 인간을 "인간과 하느님, 순간과 영원, 개인과 우주, 부분과 전체 사이에서 항상 갈등과 해결을 반복하는 완전 지향성"의 존재로 이해한다. 이점에서 죽음이란 삶의 최종적이며 완성의 순간에 드는 변화과정이다. "죽음은 생의 완성이며, 졸업이며, 또 다른 출발을 하기 전의 작별인사이며, 새로운 시작 전의 종결입니다. 죽음은 위대한 변환입니다." 인생은 비행과 비유할 수도 있고, 우리가 걷는 걸음에 비유할 수 있다. 비행의 이륙이 탄생이라며 착륙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고, 발을 드는 것을 탄생이라 한다면 발을 대지에 내리는 것을 죽음이라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엘리자베스가 쓴 몇 권의 책 내용을 살펴보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1969》은 20세기 후반에 쓴 죽음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심리학적 연구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퀴블러 로스 박사가 죽음과 삶 그리고 그 전이 과정에 대한 학제 간 연구를 통해서 탄생시킨 책으로 죽음이 선고된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5가지 심리적 단계를 소개하고 있다. 곧 거부와 소외,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받아들임의 과정이 그것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직접 면담하고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퀴블러 로스 박사는 어떻게 임박한 죽음이 죽음을 앞둔 환자와 환자를 돕는 관계자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 곧 그녀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죽음을 인식시켜 그가 그의 죽음을 완성된 삶의 가치 위에 승화시키도록 준비할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체적으로 이 책은 죽음을 다루면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밝히는 책이다. 죽음이란 삶의 종말도 아니고 죽어가는 과정이 끝나는 한 삶의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이해의 빛에서만 죽어가는 이가 비인간적으로 식물처럼 죽어가지 않고 인간적으로 살게끔 도와줄 수 있게 된다. 곧 이 책은 죽음의 이야기를 통해 죽기까지 사는 얘기 그리고 잘 죽음으로 참 인간답게 되기를 말해주고 있다.
《죽음과 임종에 관한 의문과 해답(Questions and Answers on Death and Dying),》 퀴블러 로스 박사의 고전인 《죽음과 죽어감》의 책 자매편으로 쓰여 진 책이다. 《죽음과 죽어감》이 출판된 후 700여회의 강습회와 강연회 그리고 쎄미나에서 나온 349개 항목의 죽음에 대한 질문을 심리적 통찰을 거쳐 열정을 가지고 대답을 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에서 퀴블러 로스 박사는 임종, 자살, 만성질환, 안락사 등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논하고 있고, 어떻게 환자에게 죽음과 관련된 문제들을 말하고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에 둔 남아있는 자들이 어떻게 비탄의 경험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엘리자베스는 모든 인간이 죽음에 들 때까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임종자들을 돕는 이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환자의 입장에서 마음으로 저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보살펴야 하며, 그리고 마음을 터놓는 솔직한 소통이라고 주장한다. 죽어가는 이들을 돕는 과정에서 엘리자베스는 우리 모두가 죽는 다는 사실, 인간의 유한성, 인간이 죽은 다음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 자신에게 있어서 죽음은 평화라고 힘주어 말한다. 결국 죽음은 우리의 일상이어야 하고 일상 가운데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때, 삶은 더욱 값진 의미를 가지게 되며, 매일 매일이 마지막인 것 같은 종말론적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죽음: 성장의 최후 단계(Death: The Final Stage of Growth)》는 일단 죽음을 인간 발달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죽음이 인간 실존의 의미에 중요한 일단을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앞서도 지적한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인간은 완전을 향해 발전해 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으로 이해한다. 죽음을 앞에 둔 임종 자들이 겪는 5가지의 단계는 죽음 뿐 아니라 슬픔의 경험이나 특별한 종교적 과제에 부딪혔을 때에 그 충격을 받아들이기까지 같은 과정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죽음도 이와 같이 삶의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죽음을 거부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하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면, 죽음은 거부할 것이 아니고 어떻게 죽음을 맞고 준비하며 죽음을 다루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죽음의 면전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금기시 하는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음을 맞을 때, 어떻게 우리의 슬픔을 표현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각자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인간뿐 아니라 다른 피조물의 죽음을 직시하고 있는 퀴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과 관련된 여타 질문들에 대해 목회자, 랍비,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사회학자들의 대답을 제시한다. 아울러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전하는 죽음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의 관점을 제시해준다.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가장 창조적인 힘이 된다. 삶의 최고의 영적 가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과 연구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죽음 인식은 종교, 철학, 윤리,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의미와 인간의 보편성 그리고 통합성을 이루도록 한다.
《안녕이라고 말할 때까지 살기(To Live Until We Say Good- Bye)》는 엘리자베스가 글을 쓰고 말 와쇼(Mal Warshaw)가 임종 환자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 만든 책이다. 죽음에 이르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이일을 위해서 호스피스 프로그램도 책 말미에서 소개해주고 있다. 이 책도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돌봄은 환자의 편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제시하고 있고, 특별히 임종 자들은 차디찬 병원에서보다는 가정에서 혹은 가족이 있는 곳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함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허락되는 한 저들이 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의료진과 시스템은 전환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어린이와 죽음(On Children and Death)》은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어린이와 어른이 어떻게 다른지? 연령에 따른 죽음의 개념은 무엇인지? 이별기간동안 어떻게 부모, 조부모, 형제자매를 도울 수 있는지? 아동자살을 어떻게 줄일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로 쓰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어린이들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적으로 곧 영적인 차원에서 안다고 한다. "어린이의 즉흥적인 그림, 창작적인 미술작품, 시, 처음에는 '별 것 아닌'것 같은 아이들의 말 등 그들의 숨겨진 메시지의 뜻을 어른들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되죠." 죽음을 인지한 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을 맞기 위해 신뢰할 만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또한 "죽음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명력 있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아름다움에 싸여 있습니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여정을 앞서간 것뿐이죠." 결국 아이들은 나비가 되어 진정한 세계에로 옮겨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육체라는 형체는 진정한 삶이 아닌 껍질, 즉, 번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 알게 되면, 떠나보내는 데 대해 갈등을 덜 느낄 것이고, 모든 대가를 치러가면서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은데 대해서도 죄의식을 덜 가질 것입니다."
《죽음과 죽어감과 더불어 살기(Living with Death and Dying)》 는 임종 자와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가르쳐 주는 안내서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책에서 어떻게 임종 자들이 자신들의 내면의 마음과 욕구를 표현하는지 이해하는 그녀 자신의 방법을 소개해 주고 있다. 임종 자들과의 마음을 연 대화는 저들이 평화와 품위를 가지고 죽음에 임하도록 돕는다. 이점에서 엘리자베스는 진정한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엘리자베스의 생애를 통해 그가 어떻게 죽음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또한 그녀의 주요 저서를 통해 죽음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삶을 통해 얻은 지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다.
III. 결론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듯이 임종 자를 돕는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평생을 통해 20,000여명 이상의 임종 자들을 도왔던 그녀는 죽음을 통해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의 삶은 계속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임종 자를 향한 그녀의 방법은 상담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먼저 임종 자에게 주의를 기우려 저들의 편에서 들어주고 나서 의술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삼쌍둥이의 하나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언제나 노력을 통해 자신을 확인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 속에서 자라야 했다. 거기다가 자연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러면서도 자기의 주장을 자녀들에게 관철시키려 했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자기주장이 강했던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자기가 결정한 독특한 삶의 영역을 지칠 줄 모르게 도전하도록 하였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엘리자베스의 과제는 사람들이 자연스런 죽음을 맞을 때까지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인간은 죽음 앞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필연성과 누구나 죽는다는 보편성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음을 공포나 두려움으로 맞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죽음을 적극적으로 만나게 하는 몇 가지 엘리자베스의 신념이 있다.
첫째로, 이 세상의 삶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엘리자베스는 임종 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그리고 자신과 가까이에 있었던 이들의 죽음 경험에서 죽음이후의 삶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엘리자베스가 사용하는 죽음에 대한 상징은 고치를 떠나 나비가 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죽음이란 육체를 떠나 또 다른 삶에로의 여정이다. 이점에서 삶이 하나의 여정이듯이 죽음 또한 삶의 또 다른 여정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난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삶은 잘 죽는 것이다. 잘 죽는 것은 삶을 끝까지 인간답게 삶답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삶을 끝까지 살 수 있는 것은 삶이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녀의 확신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확신 때문에 오히려 죽음 이후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 더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관심하는 것이다. 임종 자들이 자신의 삶을 완성하고 잘 떠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이러한 도움을 통해,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인간은 서로 사랑 가운데 연대하기를 배우고 더욱 성숙하기를 배우게 된다고 주장한다.
엘리자베스에게 죽음과 삶은 궁극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죽음을 과정으로 이해하면서 서로가 대극적이면서도 상보적인 상대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에게 있어서 죽음과 삶을 넘어서는 궁극적인 것 그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때문에 삶 안에 죽음을 초대하고 죽음 너머에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궁극성이 무조적적 사랑이라는 신앙으로 표현된다.
둘째로, 그녀는 인간을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한다. 아울러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본다. 삶의 한 과정으로서 죽음이란 끝이 아니고 죽음 너머의 또 다른 삶을 전제한다. 엘리자베스는 결국 죽음을 통해 삶의 이야기 곧 삶의 중요성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과정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삶의 여정을 완성을 향한 여정이라고 보았을 때, 죽음이 가져다준 충격은 여타 다른 충격적 사건과 같이 심리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곧 충격과 부정과 타협과 우울을 거쳐 승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같은 5가지의 과정은 학자에 따라 6가지 혹은 7가지의 과정을 거치는 유형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용의 단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같은 유형으로 같은 시간대를 거쳐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5가지의 유형은 인간이 발전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거치는 인간의 심리 과정을 관찰하고 제시한 것이다. 이점에서 인간은 죽음을 맞아서도 삶의 과정에서 가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영원한 세계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죽음이 이처럼 과정으로 그리고 긍정적인 면에서 수용이 되고 받아들여지게 될 때 죽음은 놀랍고도 긍정적인 경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무지에 의해 지연될 때는 악몽과 같은 것이 된다. 때문에 임종 자만이 죽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임종 자를 돕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관계된 전문인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해함으로서 죽음에 임하는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잘 죽어가도록 돕는 일이 인류가 부여받은 "무제약적인 사랑"이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무제약적인 사랑의 실천은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고 내부와의 싸움인 것이다.
에이즈 환자를 돕는 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때 엘리자베스는 에이즈 환자도 한 인간으로 돌봄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문둥병자들과 창기들을 돌보지 않았던가! 에이즈는 전쟁과는 달리 우리 내부에서의 전쟁이다. 우리가 미움과 차별을 택할 것인지 아니며 사랑과 봉사를 택할 용기를 가질 것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통해 결단해야 한다. "에이즈가 치료되기 전 인류가 먼저 저들을 인간으로 받아들이도록 치유 받아야 합니다. 치유 이전에 돌봄을 근간으로 할 수 있는 인류의 의식이 먼저 고쳐져야 해요." 이점에서 임종 자들에게 귀 기울려 들어주고 저들이 죽음을 잘 맞도록 도와주는 일은 인류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사회의식의 혁명인 것이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임종 자들을 위한 삶은 무조건적인 인간 사랑에서 기초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자연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 둘은 밀접히 관련이 되어 있다. 인간의 탐욕, 미움이 서로의 죽음을 가져왔고, 이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경고한다. 이점에서 엘리자베스는 궁극적인 인류의 과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인류의 질병을 치유할 최고의 약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용서하고, 동정과 이해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치유함으로서 우리는 어머니 대지를 치유할 수 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교훈을 인류가 배우는 길은 죽음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더 소중한 자리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임종 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들을 돌보며 배려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돕는 일을 통해서 인류는 비로소 인간의 궁극적 과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를 삶으로 보여주었던 이가 엘리자베스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 말들.
우리가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패배와 고통과 분투와 상실을 경험하고 그 아픔의 깊이에서 자신들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삶의 감사와 예민함과 이해를 가진 사람들로 동정과 온유함과 깊은 애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후에 여러분 대부분이 처음으로 이 땅에서의 삶이란 삶의 매순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총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한 모든 말과 행동 우리의 삶뿐 아니라 수천 명의 다른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우리에게 몇 점 맞았는지, 얼마나 많은 저택을 가졌는지, 혹은 몇 대의 롤스 로이스를 구입할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임종 자들이 이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죽어감이란 삶의 가장 훌륭한 경험일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생을 살았느냐이다.
매 순간 우리의 삶을 바르게 살았다면 두려워 할 것이 없다...삶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단서들을 얻는다...우리의 삶이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우리는 삶의 교훈을 배우게 된다.
어려운 과정이 없이는 삶에 기쁨이 없다. 죽음이 없이 우리가 삶에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 미움이 없다면 궁극적 삶의 목적이 사랑임을 알 수 있을까? ...매순간 우리는 부정적인 영역에 머물러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치유와 사랑의 삶을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인생의 의미를 알면 아픔은 사라진다.
이 땅에서 배워야 하는 과제를 배우고 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졸업하게 된다. 곧 우리의 영혼을 둘러쌌던 몸을 떠나가게 된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들에 대해 저주와 불평을 멈출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이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진보를 가져 올 것이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저항하기보다는 죽음에 대해 배운 사람은 우리에게 삶의 스승이 된다.
우리 내면의 침묵과 교류하기를 배우라.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꽃밭에 안아 있다면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프고 고통 가운데 있어서 상실을 경험할 때, 소극적으로 아픔을 피해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픔을 아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 선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성장해 갈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과 생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해할 때만이, 오늘이 마치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삶의 충분하게 살기 시작한다.
죽음이란 나비가 그 고치를 떠나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를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인식하고 이해하고 웃고 성장할 수 있는 의식의 더 높은 단계에로 옮겨가는 것이다.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죽음이란 고도의 창조적인 힘이다. 삶의 가장 높은 영적 가치는 죽음에 대한 생각과 연구에서 온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선택에 우리 스스로가 책임이 있다. 우리는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이 가져온 삶의 결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은 마치 스테인 글라스 창문과 같다. 햇빛이 비췰 때는 빛이 반사되어 튕겨 나간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건물 안에서 빛이 켜지면 진정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죄의식이란 아마도 죽음의 순간에 겪게 되는 가장 아픈 동료이다.
실수나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모든 사건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축복이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궁극적인 가르침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포함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인류의 가장 큰 선물이자 가장 큰 저주는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서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두려움에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협곡이 폭풍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아름다운 결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평화를 찾기 위해 인도나 그 외의 나라에 갈 필요가 없다. 우리의 방, 정원, 심지어는 욕실 안에서 침묵의 깊은 자리를 발견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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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heel of Life: A Memoir of Living and Dying. N.Y.: A Touchstone Book, 1997. 박충구 옮김.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 가 치창조, 1998.
-----. Why Are We Here(Germany Only - Silberschnur), 1999.
-----. Life Lessons(With David Kessler), 2001.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5.07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연구가 더 많이 진행되 더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죽고 저도 나중에 웃으면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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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감초 작성시간 12.05.07 제가 작약님 발에 깃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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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작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5.07 진짜로 다음에 꼭 저보다 장수 하셔서 제발 제 발 간지럽혀주세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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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감초 작성시간 12.05.07 .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은 해부학을 잘한다든지, 수술을 잘 한다든지, 혹은 약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은 선하게, 돌봄의 자세를 가지고, 사랑을 지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