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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벽비

작성자나도사랑을했으면|작성시간06.08.12|조회수86 목록 댓글 0

글 쓴 이  
   하하도사  (2006-08-07 13:28:35, Hit : 65, Vote : 18)
제     목  
   [re] 고구려벽비에 대한 해석 중 하나
동천왕 벽비에 대한 해석은 여러견해가 있으나 아직 통일된 견해는 없습니다. 아래는 본인이 전에 이곳에 한번 올린 적이 있는 것입니다.


동천왕 벽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은 2005년 4월 11일 공사창립 30주년기념 특별전시회에 평양 벽비를 전시한 적이 있다. 이 벽비는 가로 세로 30㎝, 두께5㎝ 크기에 점토판에 글씨를 새기고 구리 가루를 넣고 구운 것으로 290여자가 새겨져 있다. 이 벽비는 1930년대에 평양에서 출토되어 한 집안에서 대대로 소장해온 것이라 전하며, 귀퉁이 일부가 깨지고 일부 글자는 불분명하다.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魏明帝 靑龍癸丑(二: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 煙雲丘壑 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愛月摩詰道 形今溯坐我士 頗得城郭根引七家 因相傳諸譜間 意不可自秘 引世出再(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 流芳益黠倫 叱(以)啓傹怢陵芥 王幸 安次三塞 始獲習元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於相 百三十三歷輯宗 渲引之叱(以)公世天地 蹈事師之風 須萬前郞衆 始異焉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繼 明帝還(逐)(多)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世 高麗殊氏天祖鄒牟王 慾殺鎩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永 傳百世存祖]

[참고:계축년은 명제 청룡 원년으로 A.D 233년이고, 청룡 2년은 A.D 234년으로 갑인년이며, 동천왕 11년은 A.D 237년이다. 이로 보아 청룡계축(二)年은 "五"자가 오래되어 일부 획이 희미해진 것이다.그리고 후미에 적혀 있는 내용은 관구검의 침범 이후 사실을 적은 것이다.]

박물관측은 전문가 20여명에 자문을 받아본 후 진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이 벽비에 대하여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가치를 판단하기 이전에 진위 판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한국 고대사 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유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 벽비 서두에 나오는 <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 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 위 명제 청룡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왕은 현현궁의 삼태읍장을 불러 보기 200과 위나라로 가게 하였다. (후에 이들이) 도성에 돌아와 삼가 분부하신 광대한 계책대로 꾀하고 돌아왔습니다라고 복명하였다 > 문구는 고구려와 위나라간의 외교관계에 관한 것이댜.

이 무렵 고구려와 위나라는 어떤 외교관계를 가졌을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천왕 8년(234년)에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로 보아 위나라와 고구려는 234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한 후 고구려는 237년에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위 벽비 문구 중 의미가 있는 것은,
앞 부분에 나오는 외교에 관한 부분[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王 詔峴睍宮三太邑長 入漢魏步騎二百 回都愼冊廣欲答]과

뒷 부분에 나오는 백수 등의 공적에 관한 부분이다[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繼 明帝還(逐)(多)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幣世 高麗殊氏天祖鄒牟王 慾殺鎩存其故都 將不耐城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囘卒本邑都 叱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 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永 傳百世存祖].

위 벽비 문구를 살펴본다.

1. 魏明帝 靑龍癸丑五年 東主高麗東川王十一年

위 벽비 문구에는 魏 明帝라고 적혀 있고 그 뒤에 동천왕이 東主로 나온다. 東主는 동쪽의 왕이라는 뜻이다. 의미상으로는 위나라 명제보다 격이 낮은 왕이다. 따라서 이 벽비는 고구려보다 위나라를 더 상국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벽비를 만든 사람은 위나라로부터 관작을 받은 고구려 지방 호족 또는 殊(마힐도 승려)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실의 공식 입장은 아닐 것이다.

2.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偖百殊規止 짐승들이 이상한 징후를 보이며 시조 사당 전실에 떨어져 죽자 백수는 의식을 멈추었다.
[참고 : 이 사태 후 殊는 (위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간하였으나 죽이려 하자 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문구를 보면 당시 百殊(마힐도 승려 중 가장 높은자)가 시조 사당을 관장하고 있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 문구는 나라에 국난이 생길 것을 예언하는 문구로, 벽비에는 이러한 현상이 언제 일어났는지 적혀 있지 않지만 관구검의 침범 전으로 추정된다.

3. 繼明帝逐多護(寧)東 百殊司吏邑都沸流 安泰久歲禮樂世 高麗殊 代天祖 鄒牟王 慾鎩 存其故都 將不耐城 명제가 (요동의) 많은 무리들을 쫓아내고 (백수를) 護寧東에 封하고 백수, 관아, 관리, 도읍을 비류를 두니 평안하고 태평하며 예악이 있는 세월이 되었다. 高麗殊가 天朝, 추모왕을 대신하여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히 하였다.

위 문구를 보면 요동반도에 있는 위나라 요동군(치소:요양방면), 현도군(치소:심양방면) 관장지역 내에 있는 고구려 무리들은 위나라의 관작을 받고 위나라에 복속하였다. 고려수 이후는 관구검 침범 이후 사실을 적은 것이고, 고려수는 당시 위나라가 허수아비로 임명한 고구려 통치자로 추정된다. 그리고 백수는 마힐도 승려 중 가장 높은자로 보인다.

4. 往尉那巖城 繼造三千國卒本邑都 以祭祀祖尉那岩東 記告後人 復國都 再造昌天府宮 拜謁日月祭示天地 衆邑長百長國殊 誠意立壁碑 永傳百世存祖 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만든 후 (이러한 사실을) 위나암성 동쪽에서 시조에게 제사드린 것을(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시조에게 고했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린다. 다시 수도를 회복하고 천부궁을 다시 만들어 일월신과 천지지신에게 제사지냈다. 읍장, 백장 국수 등이 정성을 다해 벽비를 세우니 백세토록 영원히 존속하여라.

[관구검이 고구려 지역을 점령한 후 고구려를 통치하기 위하여 임명한 邑長, 百長, 國殊 등 벽비의 주인공들은 그뒤 고구려가 피점령지를 수복하였을 때 위나라의 요동군, 현도군 방면으로 도망갔거나 아니면 고구려 군사에 붙잡혀 처형되었을 것이다.]

위 문구 역시 관구검 침범 이후 사실을 적은 것이다.

5. 峴睍宮, 摩詰道

위 벽비에 현현궁, 마힐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고구려 왕실이 공식적으로 대승불교를 받아들이기 전에도 민간에 유마힐도가 전파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나라는 고구려를 점령한 후 고구려를 통치하기 위하여 고구려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마힐도 승려나 지방 호족들에게 읍장, 백장 등 관작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殊나 지방호족들이 모두 위나라에 복속한 것이 아니고 일부는 관구검의 침입 때 위나라에 대항하는 등 고구려에 충성한 것으로 보인다.

6. 殊의 의미

"四十六殊" "百殊" "高麗殊" "國殊" 등 문구가 나오는데, 殊는 마힐도 승려의 관장지역을 나타내는 직위로 추정된다.

7. 邑長, 百長

고구려 관작에 읍장, 백장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사서에 의하면 읍장, 백장 등 관작은 중국왕조의 직할통치 지역 내 토착거수 등에게 준 작위이다. 위 벽비에 나오는 읍장, 백장은 위나라 직할통치 지역에 있으면서 위나라로부터 읍장, 백장 등 관작을 받은 마힐도 승려나 지방 호족들로 보이는데, 이들은 위나라로부터 읍군, 읍장 관작을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를 벽비 등에 적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관작은 고구려 관작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나암성 등 위나라의 직할통치 지역이 아닌 고구려 지역에서도 읍군, 읍장 이름이 나온다. 이를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군사가 일시 위나암성 등지를 점령하였을 때 일부 殊나 지방 호족들은 위나라로부터 읍군, 읍장 관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위나라 군사가 위나암성 등지를 점령한 해는 246년이므로, 위 벽비는 246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8. 拜謁日月 祭示天地

위 문구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해와 달을 숭배하였고, 천지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 무리는 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으로 섬겼고, 자신들을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으로 불(不:해, 뒤에 부로 발음) + 여(黎:무리)라고 적거나 高(하늘나라) + 黎(무리)라고 또는 高(하늘나라) + 九(온세상 또는 중심지:8은 수도를 제외한 8방을 뜻하고 9는 온세상 또는 중앙을 뜻한다) +黎(무리)라고 이름 지었다.

9. 國名

고려와 고구려 두 가지를 함께 쓰고 있다. 여태까지는 중국사서를 보고 처음에는 고구려, 뒤에는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 벽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고려와 고구려를 함께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기의 내용과 부합된다.

10.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시기

중국의 사서인 위지 관구검전에는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이 정시년간에 1차, 정시6년(245년)에 2차로 적혀 있고, 위지 고구려전에는 정시5년(244년)으로 적혀 있으며, 위지4 3소제기 제4에는 정시7년(246년)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동천왕 20년(246년)으로 적혀 있다.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 시기는 사서 문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244-246년경이다.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妊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篙」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官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裡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正始中幽州刺史毋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余...正始三年 宮寇西安平 其五年 為幽州刺史毋丘儉所破>[烏丸鮮卑東夷傳高句麗傳]

<七年春二月 幽州刺史□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三國誌卷四 魏書四 三少帝紀第四]


관구검기공비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까?

1906년 중국 길림성 집안현 판석령에서 도로공사중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 이 비는 가로 26.4cm 세로 25.7cm에 자경(字徑) 약 2.7cm이다. 사서에 의하면 이 비는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한 해에 만든 것이다.

관구검기공비에는 고구려 침범년도가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蓼  威寇將軍都亭侯蓼  行裨將軍領蓼 "으로 적혀 있다.

위 기공비 문구에 의하면 위나라는 244년에 고구려를 침범하고, 다시 다음해 245년에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역법상의 차이로 1년은 차이가 날 수 있으므로, 관구검의 고구려 침범은 244년과 245년 또는 245년과 246년으로 보인다.

앞에 나온 벽비 외에 몇종류가 더 보이는데 벽비에 나오는 상황은 모두 동천왕 때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위 벽비 문구는 아주 한정된 시기 즉 동성왕 시대에 위나라의 관작을 받은 마힐도 승려나 지방 호족들의 입장에서 적은 것으로, 이를 고구려 역사 사료로 사용하기에는 좀 문제점이 있다.



다른 종류의 벽비


위에 나오는 벽비 외에 다른 종류의 벽비로 수종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위 벽비 문구와 연관되는 것으로 모두 동천왕 시대 상황을 적은 것이다.

1.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134자) 가로 25㎝, 세로 26㎝, 두께 2.3㎝

[正始武侵宮 百殊固諫慾鎩 還亡命存其固都誠不耐城 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委+台) 七年十月繼明王封护寧東國吏玄菟沸流 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 殊代天府祖鄒牟 王以城民之意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赤+見)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旨?)記天地之中 銘存永世隨登愿 此碑永立以傳百世紹示百殊城民] 정시년간에 침범이 있었다. (침범이 있기 전) 백수가 (왕에게) 간하자 (왕이 백수를) 죽이려 하였다. 백수는 (망명했다가 관구검의 침범 후) 망명에서 돌아와 정성을 다해 옛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였다.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수와 백위와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정시 7년(서기 246년) 10월 명왕에 이어 (齊王이 백수를) "护寧東國吏玄菟沸流"에 봉하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려에 이어졌다. 수는 천부와 시조 추모왕과 성민의 뜻을 대신하였다. 가을 8월 보병과 기병 2000으로 혁현령에서 관구검과 싸워 수천리를 치고 수천명의 적병을 항복받았다. 관구검이 성 북쪽을 뚫자 왕과 전 신하 고(高)가 항복하였다. 왕의 뜻으로 천지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여 오래 보존되도록 금석문에 새겨 때마다 윗사람에게 바치고(읽게 하고), 이 비를 오래 두어 백세를 전하라고 백수 성민에게 알려라.


나. 흙으로 구운 네모판(50자)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正始武止宮不從固諫 食蒿而死 殊還亡命慾鎩 存其固都將 誠不耐城往丸都遣訖繼造邑 都護位殊麓酋魏正始七年 百殊宣]정시년간의 병란이 끝났다. 왕이 간하는 것을 듣지 않자 쑥만 먹다가 죽었다. 殊는 망명에서 돌아와 정성을 다해 옛 수도 불내성을 보존하였다. 환도에 가서 흘계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 수, 고구려 호족들을 통솔하였다. 위나라 정시 7년(246년) 백수가 선포하노라.

다. 흙으로 구운 여덟모기둥 비(86자) 밑바닥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 百殊司吏玄菟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百 殊心意□□ 年功建國 都玄菟郡紒継]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와 옛 땅을 이어받았다. 수성왕 10년(155년) 동서남북 수, 명제가 (요동의) 많은 무리들을 쫓아내고 개척하여 동쪽 방면을 평안하게 하였다. 백수, 관아, 관리를 현도에 두고 도읍을 비류에 두어 다스리니,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백제와 고려에 이어졌다. 殊가 천부를 대신하여 시조 추모왕의 뜻을 이어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백수가 마음과 뜻 □□년 공을 들여 나라를 건설하고 도읍을 현도군(심양 방면)에 두고 나라를계속하였다.


위 문구에 의하면 동천왕 당시 위나라의 요동지역 치소는 비류(혼하 방면)와 현도(심양 방면)에 있었고, 고구려 수도는 현도(심양 방면)에 있었다.
이후 서천왕 11년(A.D 280년), 19년(A.D 288년), 봉상왕 2년(A.D 293년) 등에 고구려왕이 심양 동북쪽에 있는 신성으로 행차한 내용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심양 방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는 동천왕 때 옮긴 평양성이 지금의 심양 방면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문구를 보기 전에는 동천왕 때 옮긴 평양성이 환인 방면이라느니, 평양 방면이라느니 설이 구구하였다.

고구려 동천왕의 5세손 고국원왕은 서쪽 강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심양방면에서 환인의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긴고 자주국이 되었다(이를 국인들은 새나라라며 좋아했다:國人謂之新國).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묘용씨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불타자 다시 지금의 평양 인근으로 옮겼다.

「桓州 高麗中都城 故縣三 桓都,神鄉,洪水皆廢高麗王於此創立宮闕 國人謂之新國 五世孫釗 晉康帝建元初為慕容皝所敗 宮室焚蕩 戶七百 隸淥州 在西南二百里」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桓州

고구려가 동천왕 때 수도를 위나라 현도군 지역에 두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위나라에 사실상 굴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석 (2006-03-23 19:22:57)

 
누구 해석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하나 가져 왔습니다. 불교와 연관시킨 것이 흥미롭습니다.

1. 위명제 청룡계축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237년
魏明帝 靑龍癸丑 [五]年 東主高麗 東川王十一年

이는 위명제 때 계축으로 시작하는 청룡년의 5년이다.
위명제 청룡원년은 계축년 즉, 233년이고
그 5년은 고구려 동천왕 11년으로서 237년이다.

청룡년의 간지를 쓰고 그 계속 년도를 기록하는 기법은 이 벽비에서 처음 나타났다.
그러나 382년의 고구려 기록인 [아도화상축봉문阿道和尙築封文]에서 똑같은 기법이 있다. 아도화상축봉문에는 진태원병자7년晉太元丙子七年이라고 했는데, 즉 진나라 병자년으로 시작하는 태원년(376)의 7년, 즉 382년의 기록이다.

날자를 기록할 때는 월의 초하루(朔日)의 간지를 쓰고, 계속되는 날을 기록하여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408년 고구려 기록인 덕흥리 고분에서 십이월신유삭十二月辛酉朔 을유乙酉는 12월 1일이 신유일인 12월의 을유일, 즉 24일을 말한다.

따라서 벽비의 기록은 계축년으로 시작하는 청룡년(233년)의 5년
(237년)으로 해설되는 것이고,
이런 기록법은 처음 보는 방식이지만, 그간의 날자 간지 기록법으로 보면,
당연히 날자 간지 기록법보다 우선하여 존재했어야만 하는 방식이니 쉽게 이해된다.

237년, 청룡 5년은 3월에 개원改元하여서 청룡 5년 3월을 경초景初 원년 4월로 고쳤다.
따라서 벽비의 아래 내용 중에 나오는 4월은 청룡 5년 4월이 되니 경초년으로 하면 5월이 된다. 이때 위나라는 1월을 인(寅)월에서 축(丑)월로 바꾼 것인데, 어느날 갑자기 12월을 1월로 하라니 혼란이 심할 수밖에 없어서, 2년후 경초 2년 12월에 이를 다시 환원하여서 정시원년 1월을 다시 인(寅)월로 바꾸었다.

2. (불내성의) 동천왕이 (현도성의 비전 도교) 현현궁을 찾아오라고 하여서,
삼태읍장이 보기병 이백으로 위나라(공손연의 요동국 경계) 현현궁에 들어갔다가 도성에 돌아와 (마힐도) 책을 바치며
광욕(삼태읍장)이 보고를 했다.
王詔 峴睍宮 三太邑長 入漢魏 步騎二百 回都 [捐]冊 廣欲 答

현현궁峴睍宮; 현도군 고구려현에 있던 도사들의 도장. 부신시 탑영자 고성.
현산峴山은 도교산. 峴山:自有宇宙,便有此山
捐冊; 기부자와 기부물품 명단 책 捐=獻,
玄都; 신선들이 사는 곳 ; 금나라 왕적은 의주懿州를 현도玄都라고 함.
왕적의 [요동행부지]에 의하면 의주 반파사에는 후주後周에서 현도주자사로 책봉받은 고려 광종이 만들었던 “은자대장경; 반야바라밀다경”이 보관되어 있었음.
玄兎; 달, 달토끼, 신선들이 사는 곳
玄玄; 도교

3. 연기와 구름이 가득하여 오르기 어렵고, 산과 물이 깊은 곳, 방외方外에서 왕(석가)이 태어난 4월에 마힐도는 오늘도 굳세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煙雲丘壑扶筇登蟦 [邡]外其所於水山深間 生[王四]月 摩詰道 形今[擰]坐

方外; 도사들이 사는 곳
生王四月; 석가모니 탄생월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됨
摩詰道; 석가모니의 속가제자 유마힐에서 유래하며, 유마힐은 선종을 일으켰으니 수련가였는데, 이 도사들은 그 선종의 수련가로서 마힐도임.
維摩詰為胡語的音譯。意譯為 淨名、無垢稱。為維摩詰經的主角。隨著維摩詰經在中國的流行,經中維摩詰居士的神通機智,深為中國佛教徒所欣賞。
維摩詰經佛教典籍。現存的漢譯本有三:一、三國吳(222年)支謙所譯的維摩詰經,二卷。二、後秦鳩滅什譯的維摩詰所說經,三卷。三、唐玄奘譯的說無垢稱經,六卷。本經是早期大乘經典之一。經中維摩詰示現生病,以引來佛弟子和菩薩的探望,在病榻之前透過幽默、精采的辯論,批評當時流行的各種佛教思想。再配合不可思議的神通,中觀思想得以深刻有趣的表達,是中國和印度最流行的佛教經典之一。甚且編成戲劇。本經除漢譯本外,尚有梵語本和藏譯本傳世。
벽비에 의하면 오나라 건국 130년 전에 고구려에 유마힐도가 전래되었음

4. 우리 사졸들이 성곽을 약간 깨고 성 안에 들아가니 인연 있는 일곱 가문 안에서 여러 책이 전해옵니다.
我士 頗得城郭 根引七家因 相傳諸譜

5. 뜻을 알 수 없어서 스스로 비밀스러운데
선대의 오래된 유적에서 책 한권이 세상에 나왔고,
특이하게 향기를 남기고 방점을 더한 체필로서 상세합니다.
[尙]意不可自秘引世出[一冊] 先世遺所已久 奇爲詳盡 體筆流芳益點倫

6. (이 책의) 가르침으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 돌릉(동천왕릉)의 개왕은 (현현궁) 채에 세 번 행차하여 원을 익혔다.
以啓傹 怢陵 芥王 幸安次 三塞 始獲 習元

怢陵 = 능호 陵號 / 시하 시원의 동천왕릉 / 돌릉은 장님릉이라는 뜻인데 신하들이 따라 자살하여 능을 가렸다는 벽비의 기록이 있다.

7. 46수(지역 추장)가 (마힐도를) 금하여서 (마힐)도의 궁실이 끊어졌는데, 133년이 지나서 집종“선”이 이끌고 있다.
禁凡四十六殊 道宮室畢節 於[以]百三十三歷 輯宗渲引之

輯宗은 마힐도의 수장 직명으로 추정

8. (선)공이 세상에 나와서 바람을 부리니 만인이 따르고
낭중들(徒) 앞에서 기적을 행했다.
以公世天地蹈事 師之風須萬 前郞衆 始異焉

9. 짐승들도 이상한 기미를 보여서 떨어져 (쓰러져) 죽으니
(서천왕의) 조왕인 동천왕전실께서 백수(동천왕)의 이름으로 멈추게 하여 짐승들의 죽음이 그치었다.
觀獸異微 斯狀墜委遺矣 祖宮前室 [借]百殊 規 止

이는 동천왕 생전에 현도군 국내위나암성에 방문해서 있었던 일이다.

10. 비류에 도읍하였던 호영동백수사사 “유리명제 축다”를 이어서 예악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하늘의 아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이어서
(동천왕은) 자살(살신 공양 치성)하여 불내성을 보전하려 하였다.
繼明帝逐多 護(寧)東百殊司吏 邑都沸流 安泰久歲禮樂
世高麗殊 代天祖 鄒牟王 慾釒殺 存其故都 將不耐城

11. (서천왕이) 국내위나암성으로 가서,
3천국의 졸본읍도를 이어받아 성을 세워 제를 올리고,
위나암성 동쪽에 (동천왕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린다.
다시 국도(불내성)을 세우고, 천부궁을 세우고, 천지에 일월제를 지냈다.
往 尉那巖城 繼造 三千國 卒本邑都 以祭祀祖 尉那岩 東 記告後人
復國都 再造昌 天府宮 拜謁 日月祭 示天地

12. 모든 읍장과 백장 국수 등의 정성으로 벽비를 세워 백세에 알려 후손들이 조상을 존경토록 한다.
衆邑長 百長 國殊 誠意 立壁碑 永傳 百世存祖
신래한예 (2006-03-24 10:47:18)
삼국사기 지리지 미상지명에 赫炫岺인가 나오는데 이게 벽비에 보이는 혁현령 아닌지 싶네요. 김부식 때에도 이런저런 많은 고문서가 전해지고 있던가 봅니다.
세연 (2006-03-24 19:41:59)
고구려 벽비 관련 게시판 글

(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iscuss&no=10510 )

(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iscuss&no=10541 )
세연 (2006-03-24 19:52:39)
서석님의 글
(
http://www.history21.org/zb41/zboard.php?id=discuss&no=10555 )


예전에 나왔던 것(고구려연구회)

(
http://www.koguryo.org/old_board/data/board2/김양동.hw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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