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자료]](세계최초로 핵폭탄을 투하한) 2차대전 최고의 4발 중폭격기 하늘의수퍼요새 B-29A (Superfortress) PT2
작성자mirageknight [왕성국]작성시간14.08.01조회수3,029 목록 댓글 0
안녕하세요~ 미라지나이트 입니다.
진짜 징글하게 덥네요... 오늘 낮에 밖에 나왔던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진짜 더워도 너무 더운날이였습니다. 비같지 않은 비 몇일 오고 금방 이렇게 덥다니 반칙 이네요..
계속해서 2차대전 최고의 폭격기인 B-29 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심층적으로 탄생부터 쓸라고 했는데 곧 815 라 우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부터 먼저 다루고 넘어갑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투하에 투입된 B-29 폭격기 (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1. 개요
[1941년 12월7일 이른아침 일본의 진주만의 기습으로 시작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6일과 8월9일 두발의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긴 5년간의 전쟁을 끝을 보게된다]
[ 초기에는 완벽한 기습전으로 우세를 떨치던 일본군은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해전에서 대부분의 함대를 잃고 정신을 차린 미국이 거대한 공업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하게 되자 1944~45년이 들자 이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미군은 한때 자신들의 식민지였다 일본에게 빼앗긴 필리핀을 비롯한 남태평양일대의 과거 식민지들을 수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65개 일본내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는 작전으로 이미 일본의 항복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미육군항공대를 이끌던 커티스 르메이 (Curtis Emerson LeMay) 장군은 폭격을 통한 독일의 항복을 이꿀어낸 작전에 이어 유럽전선이 정리되자 이어 일본을 상대로 67개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여기에는 일본의 경우 대부분 목조가옥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통상폭탄대신 불이 잘붙는 소이탄을 이용하는 작전을 펼치게 되느데 대부분 목조건물인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사진은 B-29를 이용해 일본도시를 폭격중인 모습 이때 B-29의 공습은 현재까지도 살아있는 생존자들에게 무서운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2.1. 투하의 동기
[이오지마 전투(영어: Battle of Iwo Jima, 일본어:
[이오지마 전투이후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위해 일본에 상륙작전을 펼칠시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점령하려면 미국인 100만 명과 영국인 50만 명이 전사할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핵 두 발로 일본을 항복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실 올림픽 작전이 핵탄두 20여 발과 그에 상응하는 독가스까지 사용되는 작전이라 너무나 잔혹하기는 하지만 거듭된 항복 권유를 묵살하고 반자이 어택을 일삼는 일본군의 모습을 치가 떨리게 봐온 미군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결정에는 카미카제도 크게 작용했는데 이를 본 미군은 "도대체 일본인은 어떻게 된 놈들인가?" 라는 식의 오리엔탈리즘 연구가 있었고 이런 연구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이었다. ]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상륙전 말고 다른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중하나가 바로 핵폭탄을 이용한 폭격이였다. 미국과 영국은 이미 1942년부터 맨해튼 계획 또는 맨해튼 프로젝트(영어: Manhattan Project)라는 프로젝트를 계획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원자분열을 이용한 새로운 폭탄을 개발하는 연구였다 사진은 194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회동 중인 어니스트 로렌스, 아서 콤프턴, 배너버 부시, 제임스 코넌트, 칼 캄프턴, 알프레드 리 루미스 의 모습 이들은 당대 내놓라 하는 석학들로 훗날 맨하튼프로젝트팀의 주요 연구원들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1945년 트리니티 실험 현장을 다시 찾은 로버트 오펜하이머 (맨하튼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 와 레슬리 그로브스. 낙진 때문에 흰색 방제화를 신고 있다.]
2.2. 에놀라 게이
[ 일본내 핵폭탄을 투하할 폭격기로는 당시 최고의 4발 중폭격기자 무려 9톤의 폭탄을 싣고 5천킬로 이상을 비행할수 있었던 B-29 가 선정되었다. 최초의 핵폭탄 투하기체는 에놀라 게이(Enola Gay) 라는 기체였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관중인 에놀라게이의 모습 긴전쟁을 끝을낸 기체로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체로 무려4톤이 넘는 핵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만을 한채 회전포탑 마저 제거한채로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에놀라 게이는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글렌 L. 마틴 사 (현 오퍼트 공군 기지) 벨뷰 공장에서 제조되었다. 그 후, 폴 티베트 대령이 개인적으로 골라 1945년 5월 18일에 미육군항공대 509 혼성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7월 6일에는 미국 본토로부터 티니안 섬에 도착해, 그 날 안에 원자폭탄을 탑재하기 위해 폭탄창의 개조가 행해졌다]
[에놀라게이는 배속 당초, 번호「12」로 지정지만, 소속 부대를 나타내는 수직꼬리날개의 마킹을 특수 작전기라는 것을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일반 폭격 전대인「제6 폭격대」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R로 변경했기 때문에, 오인 방지를 위해 「82」로 변경되었다. 초기는 특수 임무기 표시인 대형 원 중심의 좌향의 화살표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4톤이 넘는 핵폭탄을 운반하기 위해 모든 회전포탑을 제거하고 폭탄창도 개조하여 비행하였다.
에놀라 게이에는 1945년 8월 6일 총 12명이 탑승하였다.
- 기장 - 폴 티베츠 대령
- 부조종사 - 로버트 A. 루이스 대위
- 폭격수 - 토마스 피어비 소령.
- 항법사 - 테어도오 판 커크 대위
- 전자전 담당 - 제이콥 베서 중위 (또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투하한 두 비행기에 모두 탑승했다)
- 무기 및 폭탄 담당 - 윌리엄 스털링 패슨 해군 대위
- 무기 부담당 - 모리스 R. 젭슨 소위
- 레이더 담당 - 조 S. 스티보릭 중사 Sergeant
- 후미 기총수 - 조지 R. "밥" 캐론 기술하사관(O)
- 부항법사 - 로버트 H. 서머드 하사
- 레이더 운용사 - 리처드 M. 넬슨 일등병
- 항공 기관사 - 와트 E. 던젠베리(Wyatt E. Duzenberry) 기술하사관(O)]
[현재 에놀라게이는 스미소니언 항공기 박물관에 전시중에 있는데 전시초기에는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 측이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도 포함해 복원 중의 에놀라 게이의 전시를 계획했다. 이 정보가 전해지면 미 퇴역군인 단체등 에서 항의와 강한 압력을 받을 수 있어, 전시는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을 생략하게 되어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 일련의 소동의 책임을 지고 박물관장은 사임했다.
그 후, 복원이 완료되어, 스미스소니언 항공 우주 박물관의 별관이 되는 스티븐 F. 우드바-헤이지 센터(워싱턴 덜레스 국제 공항 근교에 위치)가 완성된 것에 의해 현재는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중요한 상용 전시 기체이며, 그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파괴 행위 등이 행해지지 않게, 복수의 감시 모니터로 감시되어 조심성 없게 기체에 가까이 가는 수상한 사람에 대해서는 감시 카메라가 자동 추적 해 동시에 경보가 발생하는 시스템을 채용했다. 2005년에는 영상 해석 장치도 도입하는 등, 엄중한 관리 하에서 공개되고 있다.
전술한 것과 같은 사태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폭 피해나 역사적 배경은 일절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전시 방법에는 비판적인 의견도 존재한다]
[에놀라 게이에 이어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의 핵폭탄을 투하한 기체는 복스카로 불리는 기체였다]
[비행기의 이름인 '복스카(Bockscar)'는 해당 B-29 기체의 기장인 프레드릭 복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기체 역시 모든 무장을 철거하고 핵폭탄 탑재를 위한 폭탄창을 개조했으며 폭격후 피해를 기록할 다수의 카메라들이 설치되는 개조를 가했다고 한다]
2.2.1. 가로챈 이름
[일본에 척 핵폭탄을 투하한 애놀라게이 라는 명칭은 본기의 기장 폴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성함으로 어린 시절 비행사가 되려 했던 그의 꿈을 북돋아줬던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ENOLA GAY' 로 명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임무를 수행하는 기체의 기장인 폴 티베츠는 부대장이었고 원래 이 기체 담당도 아니었다. 그러나 임무 직전에 지휘관으로서 꼬장 독단을 부려 원래 기장이었던 로버트 루이스를 빼버리고 히로시마 작전만 자신이 맡는 것으로 바꾸었다.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 로버트 루이스는 불쾌해했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참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아침에 루이스는 계류장에서 자신의 애기에 커다랗게 '에놀라 게이' 라는 페인팅이 되어있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티베츠 스스로도 뒤가 켕겼던지 야음을 틈타 하룻밤 사이에 칠해놓은 것이었다. 이 일만큼은 루이스도 격분하여 티베츠에게 달려가 극력 항의했으나 묵살당했다. 억울하면 군대 일찍 오든가! 티베츠가 이런 무리한 일을 저지른 이유는 물론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기체로써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2.3. 위험한 명령불복종
[ 에노라 게이는 네브래스카 주에 있는 글렌 L. 마틴 사 (현 오퍼트 공군 기지) 벨뷰 공장에서 제조되었다. 그 후, 폴 티베트 대령이 개인적으로 골라 1945년 5월 18일에 미육군항공대 509 혼성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7월 6일에는 미국 본토로부터 티니안 섬에 도착해, 그 날 안에 원자폭탄을 탑재하기 위해 폭탄창의 개조가 행해졌고 이후 에놀라 게이는 8회의 훈련 임무와 2회의 산업 목표를 파괴하는 고베·나고야에의 펌킨 폭탄(모의 원자 폭탄)을 사용한 폭격 임무를 실시했고, 1945년 7월 31일에는 원폭 투하 임무 리허설을 모의 원자폭탄을 탑재해 티니안 인근 바다에서 훈련, 투하했다.한편 기체 명칭인 에놀라 게이는, 기장인 폴 티베트 대령의 모친인 에놀라 게이 티베트(Enola Gay Tibbets)로부터 따온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44-86292호기 사령관인 로버트 A. 루이스 대위(원폭 투하 임무시는 부기장을 맡았다)는 운명적인 이 작전에 모친의 이름을 붙이는 일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2.4. 원자폭탄
[맨하튼 프로젝트에 의해 제작된 두발의 원자폭탄의 모습 각각 펫맨과 리틀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물론 생김새에서 딴 이름이였다. 이들은 당시 핵분열을 불러 일으킬수 있는 두가지방법을 각각 적용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였다. 이때는 아직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압축하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무게 4톤이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이를 운반할수 있는 기체는 그리 많치 안났다 (당시로는 랭카스터나 B-29 나 가능했다)]
B-29에 의해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은 '리틀 보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은 '팻 맨' 이라는 이명이 붙어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후자의 경우는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두 원자폭탄은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다. 리틀 보이는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팻 맨은 텅 빈 공간 바깥에 플루토늄을 배치한 후 기폭과 동시에 이 조각들이 안쪽으로 날아가서 공 모양으로 합쳐지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도록 되어있었다. 이렇게 두가지로 만든 이유는 당시 시간이 촉박하여 뭐가 나은지 테스트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B-29 에 장착되기 위해 운반중인 펫맨. 무게 4톤의 거대함이 느껴지는듯 하다]
3.1. 죽음의 날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를 투하한 에놀라 게이와 승무원들.]
[히로시마에 투하된 세계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의 모습 위에 설명한 대로 두 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갖고 있는 구조였다]
[히로시마는 원자 폭탄이 투하될 제 1순위 목표 도시였으며 임무 수행 중 변수가 생길 시 이를 대체할 목표 도시는 고쿠라와 나가사키였다. 8월 9일에 투하된 이유는 그 전에는 기상 문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393사단 폭격 비행중대에 속했던 B-29 에놀라 게이는 일본 본토 영토에서 비행시간으로 6시간 떨어진 서태평양 티니언 섬 북쪽에 있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히로시마로 향하였으며, 제 509 혼성부대 폴 티베츠 대령이 폭격기를 조종하고 지휘했다. 에놀라 게이는 두 기의 다른 B-29 폭격기와 함께 일본 본토로 향했는데, 그 두 기 중 한 기는 찰스 W.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그레이트 아티스트로 원폭투하 후 결과 측정을 담당했으며, 나머지 한 기는 조지 마쿼트 대위가 지휘하는 폭격기로 처음에는 기체명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후에 네세서리 이블이란 이름으로 정해졌다.티니언 섬에서 이륙한 후 각 폭격기는 산개비행을 하다가 이오 섬 고도 2,440 미터에서 재 집합한 후 일본 본토로 향했다. B-29 에놀라 게이는 목표도시 히로시마에서 고도 9,855 미터 상공에서 시야를 확보했다. 본토로 향하는 동안 해군 대령 윌리엄 파슨스가 이륙 시 끼칠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리해뒀던 원폭 리틀 보이를 장착했고, 보조를 담당하던 모리스 젭슨 소위가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안전 장치를 분리했다.]
3.2. 일본의 반응
"이건 원자폭탄이 아니다. 큰 재래식 폭탄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첫번째 핵폭탄인 리틀보이에 일본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대한 피해를 끼친 핵폭탄임을 인정하지 않고 규모가 재래식 폭탄으로 전과를 평가절하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미국은 두번째 핵폭탄인 펫보이를 준비하게 된다]
4.1. 여기가 아니다
[8월6일 첫번째 핵폭탄인 리틀보이의 투하이후에도 일본의 반응이 없자 3일후 미군은 두번째 핵폭탄 투하를 준비하게 된다. 사진은 두번째 핵폭탄인 펫맨을 투하한 복스카 의 승무원들 모습]
[ 히로시마에 이어 두번째 원폭 피해를 입은 나가사키 시는 일본 본토 남쪽에 있는 가장 큰 항구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대규모 산업 지대를 포함하고 있었고 군수품, 선박, 무기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도시였기에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였다.
히로시마의 모습과는 달리 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 대부분의 건물들은 나무로 지어진 전통 일본식 집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많았다. 수많은 공장과 사무실들 또한 폭발과 화재에 약한 재료나 나무로 지어졌었다. 또한 나가사키는 계획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민들 중 대부분이 산업 지대 공장에 굉장히 근접한 곳에서 살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원폭 투하가 있기 전에 한 번도 대규모의 공습을 겪지 않은 도시였지만 1945년 8월 1일 수많은 재래식 고성능 폭탄들이 도시 투하됐다. 이로 인해 도시 남서쪽에 있는 조선소와 부두가 피해를 일부 입었으며, 미츠비시 중공업 공장과 군수공장이 타격을 받았으며 6발의 폭탄이 나가사키 의과 대학과 병원에 떨어졌으며 그 중 세 발이 직접타격을 받았다. 피해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으나 나가사키 시와 아이들을 둔 주민들에게는 큰 염려를 불러일으켰으며 곧 나가사키 주민들은 안전을 위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지역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원폭투하가 이루어졌을 당시 도시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었다.]
[1945년 8월 9일 아침 미국 찰스 393사단 비행 중대 찰스 스위니 소령이 지휘하는 B-29 벅스카가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을 싣고 주요 목표 도시 고쿠라로 향했다. 임무 계획은 히로시마 임무와 거의 동일했다. 두 기의 B-29가 팻 맨을 실은 비행기를 뒤따라가면서 기상 관측 및 사진 촬영과 원폭 투하 결과 측정을 맡았다. 찰스 스위니 소령은 비행기에 이미 팻 맨을 장착한 상태였지만 전기 안전 플러그는 해제하지 않은 상태였다.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비행기가 고쿠라, 나가사키 모두 시야확보를 찰스 스위니 소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벅스카가 일본 해안에 있는 재 집합 장소에 도착할 무렵 그 뒤를 따르던 세 번째 B-29 빅 스팅크를 조종하던 제임스 I. 홉킨슨 중령이 재 집합에 실패했다. 벅스카와 다른 B-29는 빅 스팅크 없이 40여분 동안 상공을 활주했지만 원폭 투하 계획에서 30분이나 지연됐기 때문에 찰스 스위니 소령은 홉킨슨 중령 없이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30분 후 B-29는 고쿠라에 다다랐으나 이미 구름이 도시 70%를 가려버려 육안으로 폭격을 하지 못하게 됐다. 도시 상공을 3회 배회한 찰스 스위니 소령은 이륙 전 예비 탱크의 연료 공급 펌프를 수리 받지 못해 연료가 부족하게 된 상태가 되어 대체 목표 도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49] 나가사키에 대한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시 벅스카는 오키나와에서 원폭을 옮겨 필요한 경우 바다에 버려야할 상황이었다. 당시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드릭 에쉬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 할 시,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 투하를 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현지 시각 07시 50분 경, 나가사키에 공습경보가 울렸으며 08시 30분에 경보가 완전 해제됐다. 10시 53분, 두 대의 B-29가 포착되자 일본군은 정찰 비행기로 확정하고 아무런 경보를 울리지 않았다.
몇분 후 11시 00분, B-29 그레이트 아티스트를 조종하던 프레드릭 C. 벅 대위는 세 개의 기기들을 낙하했는데, 이 기기들 안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세 명의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 폭탄을 연구한 도쿄 대학 사가네 료키치 교수에게 담긴 편지가 담겨있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사가네 료키치 교수가 대중들에게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일본군 장교들이 앞서 찾아내었고, 한 달이 지나서야 사가네 교수에게 전해졌다.[51] 1949년 이 편지에 관련된 인물인 루이스 알바레즈는 사가네 교수를 만나 사인했다.
11시 01분, 나가사키에서의 마지막 1분에 벅스카의 폭격수였던 커미트 비핸 대위가 타격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약 6.4 킬로글램의 플루토늄 239가 담긴 팻 맨이 나가사키 산업 지대에 투하됐다. 팻 맨은 43초 후 나가사키 남쪽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 공장, 군수공장과 북쪽에 있는 미쓰비시-우라카미 어뢰제작공장 사이에 정확히 투하돼 도시 위 상공 439 미터에서 폭발했다. 본래 타격지점에서 북서쪽으로 거의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폭발된 것이다. 폭발은 우라카미 계곡에서 한정된 채 일어나 나가사키의 주요 부분은 언덕으로 인해 보호를 받았다.팻 맨은 TNT 21 킬로톤에 상응하는 폭발을 일으켰으며,진주만에 91타입 어뢰를 공급하던 미츠부시-우라카미 어뢰 제작공장이 파괴됐다.폭발반경은 약 1-2 킬로미터로 측정됐고 후에 화재가 북쪽에서 남쪽까지 3킬로미터 퍼졌다.폭발지점에는 순식간에 섭씨 3,900도의 열이 달아올랐으며 후폭풍의 바람 속도는 1005km/h로 측정됐다.]
[나가사키의 두번째 원폭 투하로 인해 40,000명에서 75,000명에 이르는 사람이 즉사했으며, 1945년 말까지 총 80,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측정됐다.또한 최소 8명에서 최대 13명의 전쟁 포로가 원폭 투하로 사망하였다]
4.2. 일본의 2번째 반응
5. 일본 외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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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 폴 티베츠 : 1975년 인터뷰에서 "나는 맡은 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습니다. 매일 밤마다 잠을 잘 잡니다."라고 했으며 2005년에는 "만약 같은 상황이 또다시 내게 주어진다면 똑같이 할 것입니다."라고 발언했다. 또 2005년 BBC다큐멘터리에서는 "나는 맡은 바 임무를 다했으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나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2007년 사망하기 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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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격수 토마스 W. 페러비 : 폴 티베츠처럼 폭탄을 투하한 일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이)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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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더 담당 장교 제이콥 베서 : "내가 한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진주만과 일본이 한 잔학 행위들을 기억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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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법사 시어도어 J. 밴 커크 : 똑같은 상황이 다시 주어질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네, 저는 다시 할 겁니다. 우리는 5년간 전쟁했고 항복하지도 패배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적과 싸웠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사람은 나중에 비키니섬 핵실험에도 참가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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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종사 로버트 A. 루이스 : 폭탄 투하시 "오 주여,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도 죽을 때까지 그의 임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저 발언은 폭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란 것으로는 볼 수 있을지라도 후회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 유일하게 죄책감을 보였다고 알려진 것은, 기상정찰 임무를 맡고 에놀라 게이보다 1시간 먼저 비행에 나섰던 스트레이트 플러쉬의 클로드 이덜리 소령이었다. 그는 한두 번 자살시도한 적도 있었고 히로시마에 사과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나중에는 위조죄로 감옥에 가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 겸 작가 William Bradford Huie는 그의 사죄의 진위성의 의심스럽다고 밝혔는데, 이유로 전후 이덜리 소령이 몇 년간 핵폭탄 투하 훈련을 계속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반핵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이덜리 소령 자신은 명성을 얻거나 주의를 끌고 싶어서 그랬다고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참고로 기장인 폴 티베츠는 그에 대해 "폭탄이 떨어질 때는 거기 있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것이다.[23]
[일본은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부 강화 콘크리트 건물들은 굉장히 견고한데, 히로시마에도 이런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 건물들 중 일부는 원폭에도 붕괴되지 않았다. 생존자 노무라 에이조(野村 英三)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170미터 떨어진 강화 콘크리트 건물(전후엔 레스트 하우스로 바뀜) 지하에 대피해있어 살아남은 것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그라운드 제로에서 300미터 떨어진 히로시마 은행에 있던 타카쿠라 아키코(高蔵 信子)도 대표적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원폭 투하가 이루어진 후 폭발은 샛길보다는 큰 길을 향해 퍼져나갔으며 이것은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이 폭발에서 붕괴되지 않게 해주었다. 히로시마 산업 전시관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후에 이 건물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으로 명명됐으며 1996년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됐다. 또한 히로시마 원폭 투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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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쟁이 끝난 후
6.1. 반성 및 피해주의
6.2. 한국인 원폭 희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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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논란
7.1. 반대
7.2. 찬성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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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 사진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 중의 하나는 사진빨(...). 히로시마의 버섯구름 사진은 나가사키의 것에 비해 어딘가 흐릿하고 구름의 형태가 살짝 뭉게진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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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핵무기 투하 자체는 네바다 핵실험장 등에 수백번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격용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2번 뿐.
- [3] 이 '묵살'이 거부한다는 뜻이 아닌 No comment의 의미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발표 내용을 놓고 보면 그런 해석은 불가능하며, 당연히 '묵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일본인 기자들도 모두 ignore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오역/일반사회 항목 참조.
- [4] 정확히는 선전포고가 없었던 건 아닌데 공습 후에 선전포고가 도달했다.
후전포고? - [5] 선전포고를 한 뒤에 공격한 것이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왜곡된 주장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믿으면 골룸하다.
- [6] B-29의 적재한계가 9톤인데 리틀 보이의 중량은 4.5톤. 혼자서 적재중량의 반을 차지하는 무식한 물건이다.
- [7] 타임-라이프 월드워2에 따르자면, 파슨스는 이륙 직전까지 분해 조립 연습에 열중하다가 손을 다치자 한 장성이 파슨스에게 "장갑이 필요하겠군! 내 장갑을 가져가게. 얇고 좋은 장갑이라네."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죽장갑을 내주었다고 한다.
- [8] '리틀 보이' 의 처음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별명인 THIN MAN이었다. 만드는 동안 길이가 줄어서 LITTLE BOY로 바꿨다.
- [9] 다만 <맨발의 겐>에 보면 비행기 3대가 총알로 집들을 쏘는 장면이 있다. 소규모 공격은 있긴 있었나 보다.
- [10] 하지만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후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띄고 있는지는 몰랐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 [11]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대에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 [12]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광복절인 8월 15일과 8시 15분이 서로 일치한다!!
- [13] 대충 해변에서 피부 그을리는 거랑 비슷한 원리.
- [14] 이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힌다면 나무를 뽑아버리고 건물에 피해를 입히는 태풍의 초속이 33m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된다. 간단히 말해 주변의 모든 것이 음속과 비슷한 속도로 개발살난다.
- [15] 두꺼운 석조건물의 가장 안쪽에 들어와 있었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 [16] 방사선 화상은 DNA 자체의 파괴를 일으켜 조직 재생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방사능은 다른 조직도 파괴하여 신체 내외에서 출혈을 일으키고(혈관세포 파괴) 구토, 설사(위장관세포 파괴)를 끊임없이 하게된다. 영양 흡수가 안 되어 아무리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려 죽게 된다.
- [17]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 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다.
- [18] 일본의 작가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의 초반부에서 코쿠라가 고향인 주인공 '나' 의 어머니가 이때의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공 '나' 는 항상 어린 마음에 "날씨가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그런 정도에 그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리고 말고 하다니,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는 짓이 참 어설프고 바보 같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19] 당시 야하타(야와타) 제철소에서 직원이 콜타르를 태워 연기를 내서 시계를 어둡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고쿠라가 가려졌고, 나가사키에 떨어졌다는 것.
영어기사
일본어기사(유료)
- [20] 흔히 황족 언어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일본어 문어로 구성된 선언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옥음방송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 [21] 그는 전쟁 후인 1947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22] 나중에는 독일은 핵개발에 거의 관심도 없었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 [23]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 [24] 이와 관련해서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항목의 논란 항목을 같이 참조하길 바란다.
- [25] 스벤 린드크비스트,「폭격의 역사」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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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사회과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 역시 민족적인 착취 못지않게 조선인끼리의 계급적인 착취가 심했다고 하고 태평양 전쟁이 일본 민중들의 이익에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사실 일본 민중들 입장에선 망했어요.
- [27] 감이 안오면 그 당시 일본문학을 읽어보자 인간실격이라던지
- [28]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2737862
일부 사진과 내용은 추가하였습니다.
PT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