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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배다리를 건너며(過舟橋)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7.05.11|조회수418 목록 댓글 0

 

경기도 남양주 세미원에 설치한 배다리이다,

노들나루에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배다리 주교(舟橋)를 설치한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 ''배다리를  지나며過舟橋)' 시(詩)를 남긴다.

화성 설계며 거중기 고안 등 화성축성의 일등공신인 다산이 배다리 건설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배다리는 정조의 명에 따라 주교사(舟橋司)를 설립한 후
『주교지남(舟橋指南)』(정조 지음) 등 집대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완성된다(1789년).
이후 배다리는 건설과 해체를 거듭하며 원행에 더 아름다운 꽃을 얹는다. 
정조의 화성 행차에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한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정조는 대규모 행차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배다리의 건설을 지시하였다.
1789년 배다리  건설을 주관하는 관청인 주교사(舟橋司)가 설치되었고 『주교절목』을 만들어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비판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1795년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화성행차를 계획하면서
배다리 역시 이에 걸맞은 규모의 건설을 요구했던 것이다.

배다리의 설치 후보지로는 처음에 동호와 빙호, 그리고 노들나루 등 3곳이 우선 순위에 올랐다.
즉, 지금의 동호대교 부근과 서빙고동, 노량진 등이었다.
동호와 빙호와 달리 노들나루는 강폭이 좁으면서도 물의 흐름이 빠르지 않고 수심도 깊어서 배다리의 건설지로 선정되었다.
1793년(정보 17년) 1월에는 주교사에서 배다리 설치 및 운영에 필요한 규정을 제정한 ‘주교절목’을 정조에게 올렸다.
그것을 보면 배다리의 설치가 매우 과학적이면서도 경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예전에는 배다리를 설치할 때마다 큰 배를 물가에 집채처럼 몰아 선창을 세웠다.
 공역과 비용이 아주 많이 소요될 뿐더러 배다리 철거시 함께 헐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주교절목에서는 강가의 잡석들을 모아 물고기 비늘처럼 연달아 축대를 높이 쌓은 다음 석회로 틈을 메워

영구히 사용할 수 있는 선창을 만든다고 되어 있다.
또 배다리에 사용될 배가 몇 척이나 필요한지 알기 위해 노들나루 양쪽의 거리를 정확히 재었다.
그 결과 190발[把 ; 1발은 사람이 두 팔을 벌렸을 때의 길이로서, 약 177㎝로 계산됨]로 측정되었다.

요즘 길이로 환산하면 약 336m 정도였다.

배는  한강을 드나드는 경강선을 활용하였다.
새롭게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세곡이나 어물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에게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여 비용의 낭비를 막은 것이다.
배는 가로로 엇갈린 형태로 배치한 다음 이들 배를 막대기로 연결하여 전체가 하나로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배다리는 가운데가 높은 아치형으로 제작되었다. 따라서 가운데는 큰 배를 설치하고 남과 북 단계적으로
조금씩 작은 배들을 설치하였다.
배들의  설치가 끝난 후에는 소나무 판자를 이용하여 횡판(배를 가로지르는 판자)을 만들었고,
송판 위에는 사초(莎草:잔디)를 깔았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약 7.2미터).

배다리에 편성되는 민간 선박의 선주들에게는 세곡 운반이나 소금 운반 등의 원하는 혜택을 주었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배다리에 참여할 기회를 서로 얻기 위해 노력하는 형국이 되었다.
또 배다리 건설에 사용되는 기둥이나 난간, 판자 등의 재료들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창고를 노량 근처에 별도로 지어
다음 배다리 건설에 재활용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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