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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 '최고의 길지(吉地)'에 영면한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0.07|조회수1,478 목록 댓글 0


“나를 파월 장병이 있는 묘역에 묻어달라”
육군준장 채명신 장군은 죽어서도 더 낮췄다.
장군이 사병묘역에 안장된 것은 현충원 설립 사상 처음이다.
묘지 크기는 일반 사병과 같은 3.3㎡(1평)다. 봉분도 없고 단출한 비석이 하나 세웠다.
그가 갈 수 있었던 장군묘지는 26.4㎡(8평)로 사병묘지보다 8배 넓다.
그에게 주어진 한 평이 대통령의 묘역 80평보다 몇 천 배 더 넓은 것 같다.

현충원 참배객들은 현충탑으로 가면서 꼭 지나게 되는 채명신 장군의 묘소가 되었다.

채명신 장군을 20년 넘게 보좌해온 정재성 보좌관은 "'전우들 곁에 묻히겠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참 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령관님은 다른 장군과 다르다. 월남사령관을 하면서 많은 장교와 사병들이 전사했다. 5천여 명 넘게 사망했다.

항상 마음 아파하시고 나는 목숨을 부지했는데 이 친구들은 여기에 묻혀있다……. 내가 죽으면 여기 전우들하고

같이 묻혀야 되겠다. 이게 늘 원이 있었다."
채 장군의 부인 문정인 여사도 "(채 장군이) 집(동부이촌동)에서 국립현충원을 바라보며'사랑하는 부하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하셨다" "전역 직후부터 그런 얘길 했고 병상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언급을 했다"고 채장군의 유지를 전하고 있다.

채 장군은 주월사령관 임무를 마치고 귀국 후 제2군 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하여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다.
그러다가 10.26사태로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공직을 끝내고 베트남전 정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들 곁으로 돌아왔다.
채 장군은 파월 장병들을 ‘내 평생은인’이라고 말하며 크고 작은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참석해 왔으며 장군을 맞는 장병들은

언제나 ‘사령관님’으로 불렀다. 현역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장군은 병사 출신들과 격식 없이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이때 여기저기서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십시오”라고 요청하면 기꺼이 받아주기도 했다.
채 장군은 베트남전 참전단체가 초기에 정부지원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는 사비를 털어 적극 지원했다.
채 장군은 생시에 미국 알렁톤 국립묘지에는 세계1·2차대전에 참전했던 파울 장군, 패튼 장군 등이 병사들 옆자리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감명을 받는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운명하시기 1개월 전 가족들과 옛 부하들 앞에서 “나는 동작동 파월장병 묘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채 장군이 운명하신 후 국방부장관이 장군묘역으로 모시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유가족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제기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장군의 유언을 지켜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시하며 전장의 전우들과 함께 영면하게 된 것이다.

1965년 3월, 당시 채명신 소장이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할 무렵 한미정부 간에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이 논의되고 있었다.
5.16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6.25 참전에 보은하면서 국가재건을 위한 경제개발 재원확보 등 다목적 방침으로 참전을

추진했다. 일본이 6.25전쟁을 계기로 유엔군 군수물자 공급기지로써 한국전 특수를 누려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김일성의 직간접 침략압박으로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던 시기였다. 김일성은 늘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호언장담할 때였다.마침내 박 대통령은 1965년 1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5.16혁명과업 달성과 경제개발 성과를 높이기 위해 파병을 결단했노라고 발표했다.
첫째 집단안보체제 강화, 둘째 미군의 한반도 계속 주둔 및 한국방위 보장, 셋째 한·미·월남 간 협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외화획득의 호기를 포착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달성한다.이 같은 요지의 파병결정에 대해 일부 비판세력은 ‘용병’이니 ‘청부전쟁’이라고 비난했지만 미국은 주한미군 2사단과 7사단의 계속 주둔으로 한국방위를 보장하며 한국군의 전투력 강화를 지원키로 약속함으로써 파병이 실현될 수 있었다.미국은 1964년 두 차례에 걸친 통킹만 피습사건 이후 계속 미군을 증파했지만 한국군의 파병을 절실히 요청했다.
한국군으로서는 베트남전 참전 경험을 통해 대북 억지력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였다.파병은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으로부터 시작됐다.전투병력을 파견할 무렵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채명신 소장을 임명했다.

채 장군은 6.25 당시 ‘백골병단’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적진을 유린하며 수많은 전과를 기록했다.
1965년 8월 합참에서 이세호, 김용휴 장군을 파견, 월남정부 및 주월 미군사령부와 한국군의 주둔지, 작전지휘권, 군수행정지원 등을 협의한 후 최종 파병방침이 확정됐다.그러나 평소 인도차이나 반도의 군사정세와 게릴라작전을 깊이 연구했던 채명신 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독립된 작전지휘권의 보장을 강력히 요청했다.박 대통령은 이미 미군의 작전지휘권에 동의한바 있었지만

채 장군은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게 되면 계속 용병이니 청부전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는 이유로 미군의 작전지휘권을 거부했다. 월남정부마저 월남을 도우러 왔으면 월남군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이에 박 대통령이 주한 브라운 미국대사에게 주월 미군사령부와 적극 협조하여 한국군의 작전임무를 보장토록 당부하여 채 장군이 주월 한국군의 작전을 지휘하게 됐다.
주월 한국군은 월남 중부지역의 광활한 곡창지대, 주요도로와 해안선 등을 작전지역으로 첫 임무를 수행했다.
채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전술책임지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민지원사업을 전개했다.
현지 주민들이 전쟁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고 우선 부대 주변지역에서부터 식량구호, 학교보수, 치료소운영, 도로와 교량보수 및 어린이잔치, 경로행사, 운동회 등 각종 친선행사를 벌였다. 이로써 한국군이 월남민들을 도와주기 위해 왔노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는 다시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베트공과 주민들을 격리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부대 배치에 있어서도 한곳에 대부대를 집결시키지 않고 80여개 중대단위로 전술기지를 운영함으로써 광활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미군이나 월남군보다 작전에 뛰어나다는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당시 채 사령관은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바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채 사령관은 한국군의 작전성공으로 위상을 확립한 후 임기 후반기에는 군사작전 30%, 대민심리전 70%의 비중으로 주월 한국군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베트남 전적지를 다녀온 한국인들이 현지 주민들 사이에 한국군에 대한 호감을 잊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채 사령관의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높은 인간애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현충원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을 사병 묘역에 모신 육군중장 채명신 장군이다.

그 묘의 넓이는 딱 한 평.병사들과 똑같이 화장해 한 평짜리 땅에 묻힌 채명신 전 주월 사령관이다.
비록 공간이 좁아 참배하기에 불편하지만 병사들 품에 묻혔기에 진짜 명당일 수 있다.김두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파월장병들은 곁에 온 사령관을 환영할 것이다. 그렇게 갈채를 받는 곳이 진짜 명당이다. 죽은 것을 억울해하며

탓하는 원혼도 있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들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동고(同苦)와 동락(同樂)을 하는 종명이 아니겠나.

명당은 아무리 공부해도 잘 모르겠다.교과서적으로는 잡을 수 있지만, 본인이 만든 업이 바르지 않으면 발복이 안 된다.

사람 마음을 잡아야 한다.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을 바로 쓰는 것보다 못하다는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땅은 남에게 나눠주고, 거친 땅에 들어가 고생한 이들과 동고동락한다는 마음이 진짜 명당을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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