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노들나루 동작진

박정희대통령의 '경제과외교사' 김학렬 부총리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0.21|조회수858 목록 댓글 0


부총리 김학렬의 묘이다. 제1국가유공자묘역에 있다.그는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여난다.

1944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했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대학과 오하이오주 에크론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귀국해서  구 재무부의 사세국장·예산국장과 경제기획원 조정관 등을 거쳤고, 1962년 경제기획원 부원장보로 발탁되었다.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 1966년 재무부장관, 대통령수석정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69년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되었다.퇴임 후 1972년 1월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그는 경제관료로서 한국경제의 제반 기획과 운영에 크게 공헌하였으며,특히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입안과

포항종합제철 설립에 큰 역할을 하였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아래의 사진과 글은 2015년 4월 10일 고성신문  기사 <‘쓰루’ 김학렬, 대한민국 경제의 산파였다>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1972년 3월 21일 오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종합평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 중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된 메모지 한 장. 박 전 대통령이 홀연히 사라졌다.
경호원들이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1층 화장실에서 대성통곡하는 박 대통령의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암살당할 뻔한 현장에서도 찬찬히 다음 말을 이은 냉철한 대통령의 눈물은 김학렬 부총리의 부음에 터져 나왔다.
철의 사나이를 울린 김학렬 부총리는 1923년, 고성 수남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자그마한 가게를 꾸리며 지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일지언정 자식 공부에 돈을 아낄 수 없었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게다.
고성초등학교, 그때의 공립고성보명학교를 거쳐 김학렬 부총리는 부산으로 유학을 떠났고,

부산상업고등학교와 원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의 중앙대학교를 졸업했다.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걷던 김학렬 부총리는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교)에 합격한 후

경제관료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1952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과 오하이오주의 에크론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김학렬 부총리는 재무부 관료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며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 1966년에는 재무부 장관, 1969년 6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박 전 대통령이 육군 소장이던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고시 합격 후 재무부 관리과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 육군 소장이 김 부총리를 찾아와 물었다.
 “무능한 장면 정권을 대신해 경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 보면 김학렬 부총리의 능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김학렬 부총리는 본격적인 제3공화국 경제 주역으로 활약한다.
김 부총리는 특유의 배짱과 소신으로 성장주도형 경제정책을 밀어붙였고, 그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버티고 있었다.
경제발전과 함께 교육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꼽았던 김학렬 부총리는 모교인 고성초등학교에 강당을 건립하고,

축구대회를 열어 고성군 청소년들의 건강을 관리했다.
그런 그에게 써머스쿨과 장학사업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바닷가의 지극히 평범한 소읍이었던 고성을 한우비육으로 고향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렸고,

여름이면 대독리와 수남리가 온통 물바다가 되던 원인인 대독천에 제방을 쌓아 군민의 피해를 막았다.
김학렬 부총리의 손에 꼽을 수도 없는 업적들 중에서도 항상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다투는 것이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포항종합제철 건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다.
서울과 부산을 횡단하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됐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그 시절 필리핀보다, 북한보다도 살기가 고달팠던 대한민국을 신흥경제강국으로 끌어올리는 초석이 됐다.
 이어진 포항종합제철의 건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맞물려 국가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 모든 경제발전의 뒤에는 김학렬 부총리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에는 수많은 경제참모들이 있었다.

막대한 영향을 끼친 비중에 비해 김학렬 부총리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발전의 디딤돌을 닦아놓은 1972년 1월,

퇴임한지 3개월 만에  생을 달리해 알려질 겨를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너무 열심히 뛴 탓일까. 1972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김학렬 부총리는 부인 김옥남 여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는 포철 때문에 병이 들었다. 이걸 세상이 한 백년 뒤에나 알아줄까.”
김학렬 부총리를 이야기할 때 박정희 대통령과의 숱한 일화들은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렬 부총리의 ‘학’자를 따서 일본어로 ‘쓰루’라고 불렀단다.
이름자뿐만 아니라 학처럼 고고하고, 독설을 아끼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 탓에도 그렇게 불렸을 게다.
박 대통령은 가끔 늦은 밤에 서울 혜화동 김학렬 부총리의 집을 방문했다.
둘은 대통령과 부총리임과 동시에 술친구이기도 했고, 국가의 경제를 고민하는 동지이기도 했기에 허물없이 방문했을 터.

취기가 오르면 박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가 틀림없이 터져 나왔다.
김학렬 부총리의 부인인 김옥남 여사는 박 대통령의 늦은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배포가 꽤 큰 여자였던 김옥남 여사는 국가원수인 박 대통령에게 눈을 흘겼더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단다.

“여보시오. 자네 바깥양반은 내 과외선생이야. 내가 경제를 배우러 과외선생 집에 오는데 뭐가 잘못 됐어.”
김학렬 부총리는 공직관이 투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어느날 김 부총리가 김옥남 여사에게 갑자기 100만원을 급하게 준비해서 봉투에 나눠

넣어 달라 했다. 모두가 배를 곯던 시절이었다. 경제기획원 부하직원들이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지 않고 바둑을 두거나,

중앙청으로 산책을 나가곤 하더란다. 눈 여겨 보니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심을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100만원은 부하직원들의 점심값으로 지급됐다.

김학렬 부총리의 화장실 참을 ‘忍’자 일화도 유명하다.
워낙 칼날 같은 성미에 참는 일도 좀처럼 없었고, 불의를 보면 더더욱 그랬다.
본인도 그걸 알았던지 김학렬 부총리의 집 화장실에는 참을 忍자가 붙어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독설가로 유명했던 김 부총리의 부하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들어왔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얼마나 살벌하게 독설을 퍼부었던지 이 부하직원은 적잖이 당황해 방문인 줄 알고 캐비닛 문을 벌컥 열었단다.
김옥남 여사는 후에 김학렬 부총리의 독설과 관련된 일화들을 놓고 ‘참 불 같은 양반’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숱한 업적은 오랜 세월 묻혀 있었다. 후손들도 이미 고성을 떠난 데다 사람의 기억은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다.
김옥남 여사가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해도 학림유치원이 운영돼 김학렬 부총리의 뜻을 이어갔지만, 운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은

학림유치원은 학원도 됐다가, 지금은 교회가 됐다. 김학렬 부총리의 동상은 예전 학림유치원 교사 옆에 있다.

 한 쪽 옆에는 책을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교육으로 이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던

생전의 뜻일 게다.그러나 그의 모습은 푸른빛을 띈 녹으로 뒤덮였다. 받침대는 화강암 덩어리 사이로 녹물이 흘러나와

흉하기 짝이 없다. 녹이 슨 채로 키 큰 나무들에 가려져 한눈에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도했고, 고향 고성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은 이의 동상이라기엔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의 업적을 기억하는 이들이 김학렬 부총리의 동상을 이전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지난 6일 드디어 김학렬 부총리 동상이전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참 다행인 일이다.하지만 그나마도 쉽지가 않다.
추진위가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김학렬 부총리의 모교인 고성초등학교로 옮기자니 이 큰 인물을 모교 후배들만 보고 지내는 것이 안타깝고, 또 남산공원으로 옮기자니 그 절차나 부지도 문제다.
학림유치원의 기억을 가진 이들 그리고 김학렬 부총리의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야 동상의 존재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성군민들 중 20대, 30대의 젊은이들에게 김학렬 부총리에 대해 물어본다면

누가 제대로 대답할까. 김학렬 부총리는 분명 고향 고성을 위해 애썼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이다.
그를 기억하고, 그를 후세에 알리는 것은 김학렬 부총리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쉰도 되기 전인 49세의 일기로 췌장암이라는 몹쓸 병을 만나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입안으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산파역할을 했고, 포항제철의 건설로 국내 중화학공업의 주역이었던 김학렬 부총리가 세상을 뜨자
자신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눈도 깜빡하지 않았던 철의 사나이 박정희 대통령은 대성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했단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일하다 죽었어. 내가 임자를 죽였어.”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