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와 DJ.
거산(巨山)과 후광(後廣)
상도동과 동교동
'영원한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단어다.
두 김을 빼놓곤 우리 정치사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두 인물은 반평생 민주화의 동지이자 라이벌로 협력하며 경쟁을 벌였다.
두 전직 대통령은 1950년대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30대 시절부터 민주당 신구파의 기수로 성장한다.
경상도 부잣집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남 목포 하의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성장 배경이 달랐음에도 뜻이 잘 통했다.
두 사람이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맞붙은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은 우리 정치사에서 흔치 않은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예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1위를 했다.과반 득표에 실패해 2차 투표에 돌입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역전에 성공하는
이변을 연출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선거운동 지원에 나선다.
두 사람은 박정희 유신과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내내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위해 힘을 합쳤다.
두 사람은 야권의 단골 메뉴인 후보단일화의 원조다.
1987년 첫 직선제 대선 당시 노태우 후보에 맞서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끝내 결렬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틀어졌고 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삼당 합당에 참여하면서
반목을 거듭한다.92년 대선에서 두 사람은 세 번째로 맞붙었다.
결과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승리. 김대중 전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고 정계를 떠난다.
바로 5년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하며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이 다시 화해를 한 건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직접 병문안을 한뒤 화해했다고 밝혔다.
그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 정치인들 역시 화합 분위기를 이어간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영원한 동지이자 라이벌로 한국 정치사에 남게 됐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도 쌍둥이, 돌아가셔도 쌍둥이 형상이네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묘소 자리를 잡은 황영웅 영남대 환경보건대학원 풍수지리전공 교수의 말이다.
황 교수는 지난 2009년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울현충원 묘소 자리를 정할 때도 같은 역할을 했다.
전직 대통령 2명의 묘소 선정을 위한 지관(地官)을 연거푸 맡은 것이다.
황 교수는 “YS와 DJ 묘소 자리는 각각 봉황의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이며 두 사람의 묘소는 봉황이 날개 안에 품고 있는 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YS와 DJ의 묘는 우주와 지구의 좋은 기(氣)가 응축된 대명혈(大明穴)로 이 곳에 안장된 사람과 후손들의
혼이 맑아져 하는 일이 잘 풀릴 수 있다”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서 커다란 알 모양의 돌덩이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는 “알 모양의 돌이 7개 이상 많이 나왔다.국가와 민족을 위해 대통령의 영혼이 밝아지는 길한 현상이다.”라고 말했다.
"황 교수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데 왼쪽 날개에 품은 알은 김영삼 전 대통령, 오른쪽 날개에 품은 알은 김대중 전 대통령,
공작의 가슴에 품은 알은 박정희 전 대통령, 다리 사이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안긴 것”이라며 “이 일대 전부가 공작 날개 안에
있으니 호국영령들이 모두 명당에 있는 셈”이라고 했다.두 묘소 사이의 거리는 300미터 정도다.물론 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양 김은 죽어서도 각각 좌청룡과 우백호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영면을 취하게 된 셈이다.생전에 정치적 경쟁 관계였던 YS와 DJ는 고인이 되어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