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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고전 속 정치이야기(2)

작성자마이피|작성시간16.01.14|조회수146 목록 댓글 0

 

 

고전 속 정치이야기

  

거립지교(車笠之交)

 

방관승은 안휘성 동성(桐城) 출신으로 자를 하곡(遐谷), 호를 문정(問亭) 또는 의전(宜田)이라 했다. 조부 방등역(方登嶧)은 공부주사를 역임했다. 부친 방식제(方式濟)는 강희 48(1709)에 진사가 되어 내각중서를 역임했다. 강희 50(1711), 한림원편수 대명세(戴名世)남산집(南山集)’에서 남명(南明) 35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가 독찰원좌도어사 조신교(趙申喬)에게 탄핵을 받아 대역죄로 처형됐다. 대명세가 방관승의 증조부 방효표(方孝標)가 지은 항청(抗淸)에 관한 주장(奏章)을 소개했기 때문에 조부와 부친이 흑룡강으로 유배됐다. 어린 방관승과 형은 남경의 청량사에 맡겨졌다. 형제는 수천 리를 걸어서 흑룡강과 남경을 오갔다. 어느 해 방관승이 홀로 조부와 부친을 찾아 흑룡강으로 갔다. 마침 항주인 심정방(沈廷芳)과 해남인 진표(陳鑣)가 과거를 보러 북경을 향하다가 어린 방관승이 수레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옷은 남루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우뚝한 이마와 단정한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아보였다. 불러서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함께 수레를 타고 가기로 했다. 문제는 수레가 너무 좁아서 두 사람밖에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이 30리씩 걷고 두 사람은 수레를 타기로 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방관승에게 새로운 옷과 전립(氈笠)을 주었다. 20년 후, 직예 총독이 된 방관승은 산동 청도에 있던 심정방과 운남지부로 있던 진표를 초대해 눈물을 흘리며 반가워했다. 이들의 우정을 거립지교라고 한다. 작은 영리에도 부평초처럼 흔들리는 보통 사람들은 흉내도 내지 못할 두터운 인간관계였다.조부와 부친이 흑룡강에서 병으로 사망한 후 살길을 찾아 북경으로 간 방관승은 측자점을 쳐주며 생활했다. 우연한 기회에 평군왕 복팽(福彭)을 만나 그의 막료가 됐다. 옹정 10(1732), 복평을 따라 중가르로 출정했다가 내각중서로 들어갔다. 건륭초기에 군기처로 들어가 군기장경, 이부낭중을 거쳐 1742년에 직예안찰사로 승진했다. 두 차례 잠시 섬감(陝甘)총독서리를 맡은 것을 제외하고 20년 동안 직예총독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직예총독으로 재직할 때 팔기(八旗)의 토지를 측량하게 됐는데 몇 년이 지나도 정확한 성과가 없었다. 어사 범정해(范廷楷)와 임옥(林玉) 등이 방관승을 탄핵했다. 방관승은 책상물림인 언관들이 고담준론만 알고 실제의 정무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해 그들의 예기를 꺾을 하나의 계책을 떠올렸다. 방관승은 일단 사죄하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범정해와 임옥이 강직하고 재능을 갖춘 인재라고 칭하고 그들을 직예로 파견해 자신을 돕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도 윤허했다. 두 사람이 부임하자, 방관승은 정중하게 대접하면서 엄청난 일거리를 그들에게 줬다. 팔기의 토지는 대부분 왕공들의 소유였기 때문에 분명하게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치를 근거로 열심히 논쟁을 펼치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 도저히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이 자주 발생했다. 그들이 비로소 사죄하자, 방관승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자네들은 지도만으로 빨리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지방관에게는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네들이 하고 있는 일을 황상께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곧바로 중지할 수는 없다. 좀 더 노력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방관승은 정식으로 관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32세부터 신속하게 승진해 종7품 내각중서에서 종1품 직예총독이 됐다. 건륭 13(1748), 절강순무로 임명돼 방파제 건설현장을 시찰했다. 엄청난 모래가 쌓이자 그것을 이용해 35만무를 간척하고 빈민들에게 경작지를 마련해줬다. 직예총독으로 승진한 그는 치수사업에 성공해 건륭제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방관승은 20년이나 직예총독을 연임했다. 건륭 28(1763), 천진에 물이 차자 방관승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면직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용서했지만 어사 길몽웅(吉夢熊), 주속경(朱續經)이 부하를 비호하는 불법행위를 범했다고 탄핵했다. 건륭제가 직접 방관승을 위해 변론했다. 건륭 33(1768), 방관승은 학질에 걸려 향년 71세를 일기로 임지에서 사망했다. 시호는 각민(恪敏)이다. 가난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평생 성실했던 인생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BC 681, 제가 노를 격파했다. 노장공(魯莊公)이 영토할양을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하자 제환공(齊桓公)도 수락했다. 양국 군주가 회맹을 체결했다. 노장공이 서약서를 읽으려고 할 때 조말(曹沫)이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하면서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환공이 승낙하자 조말은 비수를 거두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이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管仲)은 신뢰를 잃지 말라고 말렸다.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제를 믿고 패주로 받들었다. 환공 23, 산융(山戎)의 침공을 받은 연을 구하러 갔다가 철수했다. 연장공(燕庄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의 국경을 넘었다. 환공이 말했다.천자를 제외하고는 제후들끼리 국경을 넘어서 배웅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는 연나라에 대해 예의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환공은 도랑을 파서 양국의 경계로 삼고 연장공이 지나온 땅을 그에게 주었다. 제후들은 모두 제에 귀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공은 간통으로 노에서 정변을 일으킨 누이를 소환해 죽이기도 했다. 환공 35년 여름, 천하의 제후들과 회맹을 개최하자 종주국 주양왕(周襄王)은 문왕과 무왕이 제사에 사용했던 기물을 보내고 환공에게 엎드려 절을 하지 말라고 명했다. 환공은 수락하려고 하다가 관중이 반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엎드려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BC 771년에 주평왕(周平王)은 수도를 하남성 낙양으로 옮겼다. 이를 계기로 예악을 앞세워 제후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겸병전쟁이 시작됐다.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부른다. ‘오패(五覇)’라는 실력자들이 잇달아 등장했는데 첫 번째가 바로 제환공이다.환공이 패주가 된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왕이라는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였다. 존왕이란 주왕과 주례를 존중한다는 의미이다. 춘추시대는 예악이 붕괴되고 천하의 주인이던 천자의 정치적 지위와 권세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관중은 추락한 천자의 권위를 회복시킨다는 명분으로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환공은 초성왕이 주왕실의 제사에 사용할 포모를 바치지 않았다고 군대를 동원해 초를 쳐서 사죄를 받아냈다. 주왕실의 위신을 지키고, 무너진 주례의 중요성을 바로잡은 것은 환공의 공이다. 관중의 계획과 리더에 따라서 제환공은 곳곳에서 자신의 힘을 이용해 주례를 준수하도록 강압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천하의 제후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조치들이 형식적이었지만 주왕실의 지지와 제후들에게 신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양이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중원을 지킨다는 정치적 구호이다. 주왕실이 약화되고 천하에 대란이 발발하자 중원의 도처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원을 둘러싸고 있던 소수민족들이 내지로 침투해 중국인이 살던 곳을 점령하고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았다. 중원에서 이민족의 세력이 확대되자 국력이 약한 제후국들은 이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환공은 먼저 제후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그들과 연합해 연을 침공한 이족을 몰아냈으며, ()와 형()을 도와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주었다. 환공의 도움으로 이들 제후국은 사직과 국토를 보전할 수가 있었다. 중국민족의 지지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민족으로부터 중국인들의 터전을 지켰기 때문에, 100년 후의 공자로부터 관중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을 것이라는 칭송을 받을 수가 있었다. 사실상 존왕양이란 주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현실을 인식한 환공과 관중의 패권전략이었을 뿐이지만, 정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룩한 성공이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다지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꿈을 성취하려면 정의를 지킨다는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다.

 

수개실록(修改實錄)

 

당태종 이세민은 진시황, 한무제, 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위대한 황제이다. 그의 대한 극찬은 정치적 업적보다 언로를 개방하여 직언을 잘 받아들인 것에 집중된다. 저수량(褚遂良)은 유명한 서예가였다. 여러 대가의 장점을 두루 취하고 변화가 다양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당태종은 왕희지(王羲之)가 술에 취해 썼다는 난정서(蘭亭序)를 무덤에 넣어달라고 할 정도로 서예를 좋아했다. 위징이 서예의 대가인 저수량을 태종에게 추천했다. 태종은 저수량을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는 기거랑(起居郞)으로 임명했다. 하루는 태종이 저수량에게 물었다.매일 나의 언행을 기록했는데 한 번 보여줄 수 없는가?”기거랑은 고대의 사관과 같습니다. 선행이건 악행이건 모두 기록하여 황제가 잘못을 범하지 않게 견제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저는 역대 황제가 그 내용을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내가 좋지 않은 말과 행동을 했다면 그대로 기록할 것인가?”저의 직무는 폐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기록하는 것이니 모두 기록해야 합니다.”얼마 후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했다.나는 너희의 공과와 득실을 평가하여 거울로 삼을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잘못이 없으나, 듣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임기응변에 능하지만, 군대를 지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고사렴(高士廉)은 군서박람하여 지성이 높고 위기가 닥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으며 당파를 결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간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하다. 방현령(房玄齡)은 계획을 잘 세우지만 결단력이 부족하고, 두여회(杜如晦)는 결단력은 있지만 입안능력은 부족하니 둘을 합쳤을 때 능력이 극대화된다.”태종은 대신들을 돌아가며 평가한 후 마지막으로 저수량에 대해 말했다.저수량은 학문이 높고 성격도 강직하며 조정에 대해 대단한 충심을 지니고 있다. 나에 대한 검정도 매우 진솔하다. 나는 새장에서 기르는 새가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신하들의 장단점을 기탄없이 평가한 이세민은 사관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궁금했다. 황제의 언행을 기록한 것을 기거주라고 한다. 저수량이 거절하자 방현령에게 다시 끈질기게 요구했다. 방현령은 허경종(許敬宗)에게 기거주에서 고조실록금상실록을 정리하게 하여 정관 177월에 태종에게 바쳤다. 태종은 끝내 자신에 대한 기거주 원본은 볼 수 없었다. 이러한 태종의 압력 때문에 사관들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무덕연간에 지은 대당창업기거주는 관청에서 개입하지 않은 기록이고, ‘자치통감 고이(考異)’는 실록, 야사, 물증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자료이며, ‘구당서는 실록을 토대로 다시 기록한 것이다. 이들 자료를 살펴보면 3가지의 다른 곳이 있다. 첫째는 태원기병의 제안자가 누구인가? 둘째는 태자 이건성이 장안을 공격한 전공을 왜 숨겼느냐? 셋째는 현무문의 변 이후 누가 이연을 궁궐에 유폐하고 압력을 가했는가라는 의문이다. 이상 3가지 문제는 모두 이세민이 형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현무문의 변과 유관하다. 나머지 초당시대의 사건은 관청에서 간여하지 않은 패관야사까지 포함한 다른 기록과 대부분 일치된다. 사서에도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과 관련된 전말을 왜곡하지 말고 그대로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왕부지는 이세민이 친형을 죽인 사실을 그대로 남겨둔 것은 부끄러움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학자는 태종이 공공연하게 현무문의 변과 관련된 기록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미화하게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한다. 사관이 지존의 압력을 전혀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무리이지만, 사실상의 창업군주인 태종은 민()이 중하고, 사직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는 관점에서 정변을 사실대로 기록하게 하고 후세의 비평과 정면대결하려고 했을 가능성에 점수를 주고 싶다. 정치가는 역사와 대면하여 당당해야 한다.

 

 

단사표음(簞食瓢飮)

 

곡부의 공묘 동쪽에는 공자가 자랑하고 아쉬워했던 안회를 모신 복성묘(復聖廟)가 있다. 공자는 제자를 받아들일 때 차등을 두지 않았다. 빈부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을 자유로 드나들었다. 안회는 10여세에 처음 공자를 만났다. 키는 작고 옷도 남루했으며 얼굴은 황달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마가 두드러졌고, 깊은 두 눈이 샛별처럼 반짝여서 총명해 보였다. 공자는 처음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안회는 제자들 가운데 독서에 가장 열심이었고, 질문은 거의 없었지만 강의에 열중했다. 공자가 강의를 할 때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마치 탐욕스럽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제자들은 바삐 집으로 돌아갔지만, 안회는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돌아갔다. 밥을 먹은 후에도 제일 먼저 학당으로 돌아와 꾸준히 공부했다. 공자는 도대체 어떻게 그리도 빨리 밥을 먹고 오는지를 궁금했다.어느 날 공자는 사람을 시켜 안회를 살펴보게 했다. 안회의 집은 성 밖에 있었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느라고 집을 나가면서 냄비에 국을 끓여놓았다. 안회는 국에 밥을 말아 먹고 배가 차지 않으면 돌아오는 길에 표주박으로 샘물을 떠서 마신 후 공자학당으로 달려갔다. 공자가 며칠 동안 살펴보았지만 한결같았다. 안타까웠던 공자는 대광주리에 든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로 연명하고, 초라한 곳에서 산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안회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현명하구나! 안회는!’이라고 감탄했다. 후세 사람들은 안회가 살던 곳을 누항가(陋巷街)’, 물을 마시던 샘을 누항정(陋巷井)’이라고 부르며 가난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은 안회를 기린다. 안회는 옳은 일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유한 제자들이 무시한다고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학우들과 비교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진했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돈을 잃었다. 모두 가난한 안회를 의심했다. 안회는 그것을 알고도 태연했다. 특별히 따지거나 변명을 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더욱 의심했다. 누군가 공자에게 안회가 도둑질을 했다고 고자질했다. 고민하던 공자는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공자는 황금에 몇 가지 표시를 하고 흰 종이로 싸서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평상시처럼 안회가 가장 먼저 학당으로 돌아왔다. 백지에 싸인 어떤 것을 발견한 그는 그것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빛이 반짝거리는 황금이 있었고, 포장지에는 하늘이 안회에게 내리는 상금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안회는 빙그레 웃다가 붓을 꺼내어 그 위에 다시 몇 자를 썼다. 그리고 그것을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책을 꺼낸 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다른 학생이 안회가 떨어뜨린 것이라고 종이에 싸인 것을 가지고 왔다. 공자가 열어보니 다음과 같은 글씨가 있었다.천사안회일정금(天賜顔回一錠金), 외재불발명궁인(外財不發命窮人).하늘이 안회에게 상금을 내렸어도,뜻밖의 재물로 가난을 면하겠는가?공자는 그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안회를 무고했던 다른 제자들도 모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중에 잃어버린 돈이 발견되었다. 친구가 사죄했지만 안회는 웃고 말았다. 이후로 공자는 안회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제자를 테스트하려고 했던 속마음이 얼마나 창피했을까? 스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안회는 더욱 학문에 전념했고 인품과 덕성을 수양하여 공문의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사마천은 공자의 삼천제자 가운데 특별히 뛰어났던 72명을 고르고 안회를 그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상하통정(上下通情)

 

상하의 원활한 소통은 국가의 통치관리체계가 제대로 작용하기 위한 요인이다. 2500년 전 묵자는 상동(尙同)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완벽한 상하의 소통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앙에는 천자와 삼공이 있고, 중앙정부 이하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제후국이 있다. 제후국의 군주와 장군과 대부 등의 집권자들이 지방통치기구를 관장한다. 제후국 이하에는 고을이 있고, 고을에도 향장과 이장이 있다. 행정관료끼리는 소통통로가 있어야 한다. 천자는 선한 일이나 선하지 않은 일이나 즉시 위로 보고하라는 정령을 반포한다. 하급자는 기탄없이 건의할 수 있고, 상금자의 과실마저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상명하달과 하의상달이 행정조직을 통해 원활해지면 천하의 정의가 통일되고 대치(大治)가 실현된다.상하의 마음이 소통되어 윗사람이 몰래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베풀어주면, 백성들도 그것을 알고 윗사람을 이롭게 도왔다. 만약 아랫사람의 원망이 자라나 폐해가 쌓이면 윗사람은 그것을 알고 제거해주었다. 천하인들이 모두 두려워서 나쁜 짓을 하지 못했으므로 천자의 이목을 신령스러워했다. 그러나 성왕은 내가 신령스러운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과 귀를 사용했고, 백성들의 입으로 나의 말을 돕게 했으며, 백성들의 마음으로 나의 생각을 돕게 했으니, 백성들의 팔다리를 사용하여 나의 행동을 도왔을 뿐이라고 말했다.”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정을 잘 알면 대치에 이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란이 발생한다.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정의관을 일치시키는 것부터 시작된다. 상급자가 하급자의 사정을 이해하느냐의 여부는 정치적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옛 성왕들은 모두 이러한 정치를 펼쳤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천자가 신통력을 지녔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감히 나쁜 짓은 하지 못했다. 묵자는 성왕이 신통력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목을 이용하여 자신의 보고 듣는 능력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이용하여 자신의 말에 정확성과 신뢰성을 높였으며, 다른 사람의 머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향상시켰고, 묵자의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묵자가 열거한 이러한 과제가 소통이다. 현대의 정치지도자 또는 조직의 관리자는 모두 상하통정이라는 기제를 이용하여 국가 또는 조직 내외부의 정보를 정확히 수집하고 분석해야 한다. 의사소통구조가 제대로 작동되면 정보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으며, 계획을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도 있다. 묵자는 이러한 과정을 정보의 수집(視聽), 설득력(言談), 계획력(思想), 실행(行動) 등의 4단계로 구분했다.소통은 상급자가 하급자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급자도 상급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상하의 소통이 가장 이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형태는 상급자가 누구도 몰래 은밀히 어떤 일을 펼쳐서 이익을 남기면, 하급자가 그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은밀한 관계를 통해 하급자는 상급자를 신뢰하고 복종한다. 이러한 소통구조는 어떤 조직에서도 필요하다. 당시의 행정관리기구와 상업조직은 이미 여러 가지의 잘 발달된 정보소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규정과 제도로 일정한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하의 의사소통수단은 고도로 효율적인 조직운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묵자는 이러한 소통시스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소통시스템이야말로 통일된 시비의 기준이 없어서 발생하는 사회적 분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가 생각한 소통시스템은 전제권력이 사용하는 비밀특무조직과 밀고제도가 아니라 천하에 공개할 수 있을 정도의 공명정대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소통부재로 국가체제가 흔들리는 책임은 최고통치자에게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여유창해미귀인(旅遊滄海未歸人),

사의고정망북신(徙倚高亭望北宸).

청초만당가절과(靑草滿塘佳節過),

도화영락전잔춘(桃花零落殿殘春).

 

너른 세상 떠돌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높은 정자에 기대어 북쪽 대궐을 바라본다.

푸른 풀 제방에 가득하니 좋은 시절은 가고,

복사꽃 떨어지며 봄날은 간다.

 

사명대사께서 무려 7년을 끈 임진왜란을 마무리하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 우에노(上野)의 죽림원(竹林院) 벽에 적었다는 시이다. 음력 3월이었으니 남국은 이미 초여름이었으리라. 우에노는 도요토미정권을 무너뜨린 도쿠가와정권이 새로운 본거지로 건설한 에도(江戶)의 동북쪽에 위치한 얕은 구릉지대로 훗날 일본 최초의 공원인 은사(恩賜)공원이 세워진 곳이다. 이에야스는 원래 호오조오(北條)씨의 영지였던 이곳을 차지하면서 광활한 무시시노(武藏野)를 확보해 서남을 장악한 도요토미와 대등한 강자로 부상했다. 그는 우에노에 죽림원이라는 별장을 건설하고 영빈관으로 사용했다. 사명대사가 오자 죽림원을 거처로 내주었다. 대사는 이곳에서 일본 정계와 종교계의 인사들과 두루 만나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대담을 나누었다. 이에야스에 이어 제2대 쇼군이 된 히데타다도 이곳을 찾아 대사께 선학(禪學)을 배웠다. 대사는 거대한 우주공간은 무진장이요, 고요함을 알면 냄새도 소리도 없다네. 지금 설법을 들었으니 또 무슨 번민을 묻는가? 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병속에 들어있다네라는 시로 화담했다.히데요시가 밑바닥에서 일어나 벼락처럼 일본 최고의 권력자가 되기까지의 추동력은 끊임없이 팽창하는 호기심과 욕망이었다. 그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새로운 욕망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히데요시에게 세상은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이에야스는 약소국의 후계자로 태어나 6살에 이마가와가의 인질이 되면서 욕망을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장남 노부야스에게 할복명령을 내려야 했고, 부인 세나는 가신과의 간통으로 고통을 주었다. 노부나가가 암살된 후에도 건곤일척의 한 수를 던지는 것보다 기다림으로 일관하며 팽창하는 히데요시의 욕망을 지켜보았다. 버림으로써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와도 그것마저 버렸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았던 그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방관자의 입장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조선, 중국, 일본의 거대한 충돌이 끝난 후,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욕망의 불길인 히데요시는 사라지고, 중심이던 명은 동북에서 성장하는 누르하치와 서북을 압박하는 몽고의 후예에게 시달리면서 기력을 잃었다. 유학이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됐다. 새로운 시대는 무엇으로 열어야 하고, 새로운 시대는 무엇일까?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변환기에 불교가 던진 조용한 화두가 바로 평화와 공존이었다. 푸른 풀이 우거지니 봄의 상징이던 복사꽃도 떨어지면서 봄날은 간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으니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대사의 눈에 비친 일본인은 침략자가 아니라 또 다른 피해자였다. 오랜 내전과 침략전쟁은 있어야 할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넘어선 공멸의 길이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대사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인 히데타다는 제2대 쇼군이 된 이후 일본의 해외진출을 강력하게 통제하면서 속죄의 길을 걸었다. 메이지유신으로 다시 욕망이 분출될 때까지 약 250년 동안 일본은 동아시아의 문제아가 아니라 모범생이었다.

 

 

도교의학(道敎醫學)

 

노신(魯迅)은 중국의 근저에는 도교가 있다고 했다. 한대에 시작된 도교는 중국의 토속종교로 현실에서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생이란 즐기기 위해 존재하므로 사람은 당연히 삶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교는 죽음에서 초연하고자 하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모든 교의는 기본적으로 강락(康樂)’ 즉 건강과 즐거움이 바탕이다. 고대 사회에서 유행했던 양생술을 흡수해 독특한 수련법을 발전시킴으로써 건강과 즐거움을 추구해 왔다. ‘삶과 도는 하나(生道合一)’이며, ‘오래 살고 죽지 않는 것(長生不死)’이 도교의 목표이다. 도교의 사상과 교리는 인류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교는 고대 중국의 민간신앙인 신선설을 중심으로 도가사상, 역학(易學), 음양오행사상, 복서(卜筮), 무술(巫術), 점성술, 유가사상, 방술(方術)과 주술(呪術), 불교의 조직체계가 혼합돼 형성된 종교이다. 도교는 자신의 운명은 자기가 결정할 뿐이지 천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아수진(自我修眞)’을 통해 정신을 평안하게 하고 형체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천명을 깨달을 수가 있으며, 건강은 즐거운 삶의 선결조건이므로 질병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교는 고대 사회의 양생술과 의약보건지식을 받아들여서, 질병을 없애는 방법과 양생의 방법을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거기에 종교적 주석을 가미해 의학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도교의학은 이론과 실천을 통해 양생보건과 향락장수의 체계를 형성했으며, 신도들은 실행을 통해 생명에 관한 지식을 민간에 전파했다. 건강과 향락을 위해서는 양성수신(養性修身)에 이르는 도공(道功)과 수명고형(修命固形)에 이르는 도술을 연마해야 한다. 도공과 도술은 치료 후의 건강회복, 지능개발, 감성과 인성의 함양을 통해 인체의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전됐다. 내관(內觀), 수정(守靜), 존사(存思), 수일(守一)과 같은 수련법은 정신과 형체의 상호의존(神形相依), 형체가 정신을 바로 세운다(形須神立)’는 교의에서 유래됐다. 인체의 오장육부에는 모두 각각의 신()이 있으며, 그러한 신은 인체가 건강할 때라야 온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도교에서는 생명의 본체인 양기(陽氣)를 중시하며, 천지의 생기를 체내로 흡수하는 방법이 복식(服息), 즉 호흡조절법이다. 청기가 몸 안에 채워지면 질병을 치료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명도 연장시킬 수가 있다고 한다. 안마와 지체운동을 배합한 도인술(導引術)도 중요하다. 도인술은 영기(營氣)와 위기(衛氣)를 조절하고 소화작용을 도움으로써, 풍사(風邪)를 제거하고 혈기의 흐름을 활발하게 한다. 기혈의 흐름이 활발해지면 질병의 발생을 방지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치료와 회복에도 큰 도움을 준다. 도교는 음식과 약으로 장생을 추구하는 복이법(服餌法)과 남녀가 기를 합하는 기술, 즉 방중술(房中術)도 중시한다. 다양한 방법을 모두 활용할 수는 없지만 자기치유능력을 강화한다는 생각은 무시할 수 없다. 도교는 중국전통문화에서 불가결한 구성요소로서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 넓고 깊이 침투했으며, 특히 신비경을 창조해 건강과 장생에 관한 희망과 환상을 불어 넣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건강과 질병의 치료에 관한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도교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다. 왜 질병이 발생하는가? 왜 누구는 동일한 환경에서 메르스에 감염되고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정확히 말하면 전염병은 누구든지 감염된다. 문제는 질병으로 악화되느냐, 증상이 나타나지 않느냐에 달렸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치료능력이 강해 감염이 돼도 질병이 악화되지 않는다. 현대 문명국가의 질병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임란전야(壬亂前夜)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조선의 최대관심사는 명종의 외아들 순회(順懷) 세자의 부인 덕빈 윤씨의 장례식과 시호에 관한 문제였다. 윤씨는 11살에 과부가 됐으며, 세자의 4촌 선조가 뜻밖에 왕이 됐다. 윤씨는 29년 동안 창경궁에서 부처님을 섬기다가 40세에 죽었다. 선조는 왕후에 버금가는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논쟁이 시작됐다. 의논이래야 상복착용과 참석의 범위, 제사상에 올릴 소와 양의 선택과 같은 문제였다. 시호를 정하는 것도 중요했다. 망자에게 어울릴 두 글자를 정하기는 어려웠다. 유식한 신하들은 인(), (), (), ()를 내세워 해박함을 자랑했다. 시호가 결정되지 않으니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했다. 왜란발발 보고는 1592417일에 도착했다. 중신들은 윤씨의 시신에 곡하고 오늘은 기필코 시호를 결정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산해(李山海)의 중재로 북인의 ()’과 남인의 ()’를 섞어 공회빈으로 결정했다.중신들에게 일본군이 침입했다는 장계가 도착했다. 웃고 떠들다가 모두 조용해졌다. 공포가 밀려오자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이산해가 임금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선조는 그때까지 일어나지도 않았다. 중신들은 고작 미개한 왜군에 불과하다고 성토하고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유성룡과 몇 사람이 모여 내놓은 대책은 고작 신립(申砬)이나 이일(李鎰)과 같은 명장을 보내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신립은 제1의 명장이니 이일을 보내자고 결정한 후 안심하고 귀가했다. 다음 날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됐다는 급보를 받은 조정은 조금 더 다급해졌다. 초조해진 선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은 삼포왜란 정도일 것이며 일본군은 수전에는 강하지만 육전은 약하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수전에서는 참패를 했지만 육전에서는 연전연승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일국의 국방을 책임진 자의 판단이 그 정도였을 뿐이다. 조정은 이일이 왜군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라고 기고만장해졌다.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것이다. 다음 날도 위급한 보고가 잇달았다. 오랜 평화에 안일해진 정부는 군사에는 문외한인 문관을 고을 수령으로 임명했다. 이들에게 군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넋이 나가 있을 때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이 결사대를 조직해 출전하겠다고 자원했다. 선조도 덩달아 출전하겠다고 나섰다. 신하들도 따라나섰다. 약삭빠른 이산해가 군주의 출전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만류했다. 선조도 신하들도 다행으로 여겼다. 신립이 전쟁은 장군들의 몫이라고 하자 특공대를 조직하겠다던 이원익은 실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어떻게 한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위기관리능력이 이렇게 허술했을까? 조선은 건국 후 200년 동안이나 외침을 받지 않았다. 몽골족은 북방의 초원에 가뭄과 추위가 닥치자 삶의 터전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중국도 오랜 평화를 누렸다. 조선과 명은 일본의 정세변화를 주시하지 않았다. 대가는 참혹했다. 임란에 출병한 명은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망했다. 조선은 명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또 외교적 오판으로 여진족에게 두 번이나 혼쭐이 났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다가 상대가 경계심을 풀었을 때 발생한다. 북한과의 교섭이 강화돼 위협이 없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국방에 대한 위협은 사라질까? 오히려 중국, 일본, 러시아라는 강대국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지금보다 더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국방은 여전히 국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군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 적에 대한 증오심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증오해야 할 상대는 누구일까? 북에는 아직도 막강한 군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은 북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고 있다

 

 

보연왕서(報燕王書)

 

제갈량은 출사하기 전 자신을, 제환공을 춘추시대 초대 패주로 만든 관중(管仲)과 전국시대의 명장 악의(樂毅)에 비유했다. 관중이 문()이라면 악의는 무()이다. 관중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악의는 뛰어난 능력과 높은 공을 세웠음에도 불운하게 각국을 전전했다. 대부분의 뛰어난 무장은 공을 세울수록 견제를 받는다. 군주에게 문신은 그리 두렵지 않지만, 무장은 언제 무기를 거꾸로 들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악의는 중산국 출신으로 나라가 조()의 무령왕에게 망하자 저절로 조의 백성이 됐다. 무령왕이 아들에게 포위돼 사구(砂丘)에서 굶어죽은 후, 조를 떠나 위()로 갔다. ()의 소왕은 비겁하게 국상을 노려 침공했던 제()에 복수를 하려고 인재를 모았다. 사신으로 연을 방문했던 악의를 본 소왕은 첫눈에 반했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서쪽의 진()과 동쪽의 제가 양강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악의는 조, , , 위와 5국연합군을 구성해 제를 공격했다. 지금의 산둥성 제남의 서북쪽에서 제군을 격파한 악의는 도성인 임치까지 추격했다. 제왕은 거()로 도망쳤다. 임치를 함락한 악의는 보물과 종묘사직의 기물을 모두 연으로 보냈다. 악의는 5년 동안 제에 주둔하면서 70여개의 성을 함락했다. 제는 거와 즉묵(卽墨)만 남았다. 악의는 무력만으로는 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해 인심을 얻기 위해 포위만 하고 성을 점령하려고 하지 않았다.문제는 연에서 소왕이 죽고 혜왕이 즉위하면서 발생했다. 혜왕은 태자 시절부터 악의를 좋지 않게 생각했다. 즉묵을 지키던 제의 전단(田單)은 그 틈을 노려 반간계를 펼쳤다. 전단에게 넘어간 혜왕은 악의가 일부러 남은 제의 두 성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오해하여 그를 소환하고 기겁(騎劫)으로 교체했다. 악의는 조국 조로 돌아갔다. 전단이 교묘한 심리전과 화우진(火牛陣) 연군을 대파하고 실지를 모두 회복했다. 비로소 잘못을 인정한 혜왕은 악의에게 사람을 파견해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이때 악의가 비통한 마음으로 혜왕에게 보낸 편지가 유명한 보연혜왕서이다. 이 글은 자신을 믿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소왕에 대한 절절한 마음과 비록 오해로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이 충성을 다한 소왕의 아들 혜왕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담은 명문으로 군신지간의 관계에 대한 귀감이 될 만하다. 그는 소왕의 업적을 밝히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지 못했다고 토로하면서 군자는 절교하고도 비난하지 않고,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누명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감동한 혜왕은 악의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으로 봉했다. 악의는 연과 조를 왕래하며 양국의 객경이 되었다. 악의는 조에서 죽었다.사마천에 따르면 제나라 출신으로 한신에게 자립을 권했던 괴통(蒯通)과 한무제에게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해 국정을 안정시킨 주보언(主父偃)이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악의는 황로학의 선구자였다. 그의 병법과 정치에 대한 식견은 무위(無爲)’를 바탕으로 삼은 유연함이 요체였다. 악의를 가장 철저히 신봉했던 사람이 한나라 초기의 명재상 조참(曹參)이다. 요절한 천재 가의(賈誼)는 악의야말로 황로학의 정수에 통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소동파는 악의가 전국시대의 영웅이었으나 대도는 몰랐다고 악평했다. 그는 소왕이 살아 있어서 반간계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도 악의는 결국 실패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악의의 완병책(緩兵策)은 제가 다른 나라와 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역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의 현종은 역대명장의 무묘(武廟)를 설치하고 주왕조의 개국승상이자 군사인 여상(呂尙)을 위주로 제사를 올렸다. 한의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악의를 포함한 역대 명장 10명을 더했다. 당의 숙종은 역대로 무공이 탁월했던 명장 10명을 무성왕묘에 배향하고 무묘십철(武廟十哲)’이라 불렀다. 악의와 동시대 인물로는 오기와 백기(白起)뿐이었다. 악의는 제를 정벌할 때 악릉(樂陵)의 대추가 유난히 달고 맛있어서 1천여 그루를 연으로 옮겨 심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무성하게 자라 악의수(樂毅樹)라 불렀다고 한다. 보연왕서는 무장이 남긴 희귀한 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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