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민주주의(民主主義)
근대 유럽의 민주혁명은 봉건적 전제제도를 허문 역사적 진보였다. 그러나 전쟁을 강화한 측면도 있다. 1차 대전은 민주제도의 최전성기에 발생했다. 전쟁과 민주는 쌍둥이와 같다. 원시사회에서 성년 남자는 모두 전사였다. 이들은 무조건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원시적 군사민주제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원시시대의 부족전쟁은 총체적 성질을 지녔다. 군사민주제라는 용어가 전쟁과 민주정치 사이의 비밀을 폭로하는 셈이다. 고대 그리스군의 방진(方陣)은 평민이 중심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무기로 집체적 전투대형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시민의 권력의식을 다졌다. 로마의 카이사르 시대에 종군과 시민권은 동의어였다. 미국 역사에서 수많은 흑인이 참전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했다. 해전은 민주정치 형성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종전에는 경제적 제약으로 참전하지 못했던 평민이 살라미스해전에 참전하면서 정치와 접촉했다. 당시 여론은 조타수, 조선공, 해군을 명문부호보다 중요한 국가의 동량으로 여겼다. 무산평민이 위주였던 영국함대는 알마타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근대민주주의의 서막을 열었다. 근대민주주의는 평민의 참전에서 비롯됐다. 시민권과 종군의무가 동시에 제도화됐다.프랑스대혁명 시기에도 보통선거와 의무병역제도가 동시에 의회에 제출됐다. 대혁명 시기 프랑스는 봉건왕조에 의해 포위됐다. 프랑스는 국민개병제를 실행해 봉건왕조의 군사력에 대항했다. 나폴레옹의 공화국 군대는 봉건왕조의 군대를 두들겼다. 프러시아는 나폴레옹에게 패한 후 의무병역제도를 도입했다. 콩드르세는 ‘인간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에서 보병의 흥기가 민주의 흥기와 직결됐다고 지적했다. 풀러도 소총이 근대민주주의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민주국가는 국민들에게 국가에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국가가 소유한 인력과 물력은 모두 전쟁자원으로 쌍방의 소멸목표였다. 토인비는 민주사상이 왜 전쟁을 억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의 규모를 키웠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풀러는 토인비가 민주라는 신화에 함몰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과 평화는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하며, 평화는 내부, 전쟁은 외부관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키루스의 아버지는 장군이라면 음모꾼, 사기꾼, 소매치기, 강도가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키루스가 도덕준칙과 어긋난다고 반박하자 아버지는 그것은 친구나 동포에게만 해당된다고 대답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에서 ‘정의는 친구를 도와 적을 해치는 것’이라고 했으며, 홉스는 ‘리바이어단’에서 ‘전쟁에서 위력과 속임수는 두 가지의 큰 미덕’이라고 했다. 데이비드 흄은 전쟁에서는 정의감과 동정심을 적의와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인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인류 자신이다. 인류의 본성은 토인비가 상상한 것처럼 아름다운 평화주의가 아니라, 오랫동안 선배들이 남긴 야만과 잔인함이다. 두려움은 가장 큰 보편적 심리로 인류의 본능을 형성했다. 이 점은 야만인과 문명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부족시대에 사람들은 언제 멸족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두려움은 현대인의 영혼에서 깊이 잠복해있다. 근대민주제도는 국가라는 방대한 집단단위를 형성했다. 그러나 정당하건 왜곡됐건 구성원 모두에게 외부집단에 대한 도덕준칙, 감정과 관념을 준수하며 깊은 원한을 품고 전쟁에 참가하라고 부추긴다. 근대민주제도는 전쟁의 총체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인력을 제공하는 기초가 됐다. 그 근저에는 공포로 가득 찬 군중심리가 작용한다. 토인비의 의문은 풀러가 ‘민주의 원동력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원한’이라는 말로 풀었다. 민주제도는 내부집단의 모든 도덕, 감정, 관념을 움직여 자신의 역량을 형성함으로써 외부집단을 소멸시키려는 의지의 체현인 셈이다. 내부집단의 원칙인 사랑을 이용해 외부집단에 대한 원한을 해결하는 목적이 민주제도였다. 1차 대전은 자유와 평등을 앞세운 민주제도가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대민주제도는 전쟁을 더욱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동산재기(東山再起)
관대함은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관대하려면 우선 느긋해야 한다. 느긋하려면 낙관적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태도를 보이면 국민들이 안심한다. 이러한 덕목으로 국난을 극복한 대표적인 인물이 동진의 사안(謝安)이다. 그는 명문세가 출신으로 자를 안석(安石)이라 했다. 4세에 명사 환이(桓彛)가 크게 될 아이라고 예언했다. 어렸을 때부터 침착하고 생각이 기발했으며 풍모도 당당했다. 왕희지(王羲之)로부터 행서를 익혀 대가라는 평을 들었다. 신언서판을 겸비한 셈이다. 재상 왕도(王導)도 사안의 기량을 매우 중시했다. 소년 시절에 이미 상류사회에서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출신과 명망에 의지해 고관후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급 관리로 임명됐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왕희지, 허순(許詢) 등 명사들과 어울렸다. 손작(孫綽)과 바다에서 배를 타고 놀았는데 파도가 일렁거리자 모두 놀랐지만 사안만은 휘파람을 불며 태연자약했다. 선원은 사안이 배를 많이 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풍랑이 크게 일자 사안은 느긋한 말투로 언제 돌아갈 것이냐고 물었다. 선원은 비로소 배를 돌렸다.동생 사만(謝萬)이 일찍 출세해 변방에서 중임을 맡았다. 명사 유담(劉惔)의 누이였던 사안의 아내가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출세했는데 당신은 대장부가 되어 욕심이 없느냐고 따졌다. 사안은 낮은 소리로 화근을 피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사만이 북벌에서 실패하자 사씨의 권위가 흔들렸다. 사안은 40세에 비로소 동산에서 나와 관직을 맡았다. 이를 ‘동산재기’라 한다. 당시 최고 권력자 환온(桓溫)의 막하로 들어갔지만, 마침 사만이 죽자 장례를 핑계로 환온과 헤어졌다. 환온은 북벌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황제를 바꾸었다. 그러한 환온이 입경하자 사안과 왕탄지(王坦之)가 영접 책임을 맡았다. 환온은 중무장 병력을 배치하고 일행을 맞이했다. 왕탄지는 겁을 먹고 식은땀을 흘렸지만, 사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제후의 행차는 사방에서 경호한다고 들었는데, 명공께서는 담장 뒤까지 배치하셨군요!”라고 말했다. 환온은 웃으면서 병력을 물러나게 하고 오래도록 담소하다가 본거지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왕탄지와 사안의 우열이 결정됐다고 평가했다. 환온은 죽기 전에 원굉(袁宏)을 시켜 왕위에 해당하는 구석(九錫)을 달라는 표를 올렸다. 사안은 환온이 곧 죽을 것이라고 판단해 열흘이나 문장을 고치며 시간을 끌었다. 과연 환온이 죽자 구석에 대한 안건은 자연적으로 소멸됐다.당시 전진(前秦)은 부견(苻堅)의 통치를 받으며 날로 강성해졌다. 사안은 여론을 무시하고 자기의 조카 사현(謝玄)에게 장강 하류에서 강북을 잇는 방어선을 맡겼다. 사현은 광릉에서 유명한 북부병을 양성했다. 사현은 전진과 동진의 비수대전 전초전에 해당하는 회남대전에서 북부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83년, 부견이 100만 대군이라 자칭하며 동진을 침범했다. 모두 공포에 휩싸였지만 사안은 사현을 비롯한 젊은 장군들에게 8만의 병력으로 막게 했다. 긴장한 사현이 고별인사를 하며 대책을 물었지만 사안은 별도의 조치를 취해두었다고만 말했다. 사현은 나중에 장현(張玄)을 보내 다시 물었다. 사안은 친구들과 놀다가 장현에게 바둑이나 두자고 권했다. 고수였던 장현은 몇 번이고 패했다. 나중에 비수대전에서 전진의 대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도착했을 때 사안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첩보를 힐끗 본 그는 태연하게 계속 바둑을 두자 손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안은 담담하게 아이들이 적을 격퇴했다고 대답했다. 손님이 떠나자 사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면서 치아가 모두 부러졌다. 385년 4월, 사안은 천하의 안정을 선언하는 것처럼 가족과 함께 물길을 따라 동산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병이 깊어지자 아들을 불러 군대에 휴식을 주라고 당부했다. 사안의 자와 왕안석(王安石)의 이름은 같다. 금릉으로 은퇴한 왕안석은 사안이 살던 곳을 사서 저택을 짓고 집안에 사공돈(謝公墩)이라는 언덕을 만들었다. 그는 우스개삼아 시 한 수를 지었다. ‘공은 가고 나는 왔으니 이 언덕은 내 것인데(公去我來墩屬我), 언덕의 성씨도 공을 따라가지 말아야 하지 않겠소(不應墩姓尙隨公).’ 누군가 죽은 사람과 땅을 놓고 싸웠다고 평가했다
번뇌해탈(煩惱解脫)
글자 그대로라면 종교는 세상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인 가르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이승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살고, 저승에 가서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것이다.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기도하면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다. 편견을 버리고 대부분의 종교를 자세히 알아보면 이승에서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다. 행복한 삶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승으로 가기 전까지 질병에 걸리지 않고 사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종교를 창시하신 분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동시에 ‘대의(大醫)’라고도 부른다. 가장 위대한 의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승에서 사는 인간의 병든 영혼을 치유해 건강하게 살도록 하는 가르침과 동시에 어떻게 이승에서 살아야 죽어서도 평안함을 얻게 되는지에 관한 가르침도 분다. 그 가운데 불교의 가르침을 알아보자.불교에는 ‘약사불(藥師佛)’이라는 부처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라 하며, ‘대의왕(大醫王)’이라고도 하는 동방세계의 교주이다. 글자 그대로는 ‘약사로서 유리처럼 밝은 빛을 내며 현세에 다가온 부처’라는 의미로 동방에 거처하며 죽어서 가는 서방정토의 아미타불과 짝을 이룬다. 현생의 구세주 약사불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12가지의 서원을 했는데, 그 가운데 몇 개는 심리적 건강과 관련이 있다. ‘소구만족(所求滿足)’은 중생들이 자유자재로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이고, ‘안립정견(安立正見)’은 중생들이 일체의 번뇌로부터 해탈해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며, ‘고뇌해탈(苦惱解脫)’은 일체의 고뇌로부터 해탈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이다.약사불은 두 가지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약수왕(藥樹王)’으로 의사의 몸으로 현신하여 인체의 질병을 치료해준다. 다른 하나는 ‘여의주왕(如意珠王)’으로 사람의 정신적인 질병, 즉 심리적인 질병을 치료해준다. 사람은 마음이 명랑하고 즐거워지면 신체도 안락해져서 건강해질 수 있다. 약사불은 대의로 약왕인 동시에 심리학 전문가로서 현신해 중생의 심리적 건강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불교는 고도의 심리학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어서 인류의 심리적 상황과 각종 고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인류의 심리적 건강에 대한 불교의 공헌은 지대하다. 대부분 불교의 교의는 인생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각 개인의 특정한 판단에 의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규범과 준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심리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모든 종교는 신앙생활과 종교의식을 통해 경건함과 신비감을 준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과 해탈을 얻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도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심리적 평형을 이루게 돼 심신의 건강을 얻는 데 유리하다. 번뇌는 인간의 심리적 건강과 밀접하다. 현대사회에서 번뇌는 망상, 억울, 초조와 같은 심리적 불균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번뇌는 불교만의 특수용어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보편적 심리작용이다. 1979년 3월, 국제노동기구에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10명 가운데 1명은 모종의 심리적 장애를 겪고 있다. 20세기 말에 이르면 세계에서 약 2억명이 심리적 질환을 앓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종교가 순기능으로 작용할 때는 이러한 현상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그 자체가 역기능으로 작용하면 오히려 엄청난 재앙으로 돌아온다. 현대사회에서 인류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 정치이다. 정치의 역기능으로 야기된 문제는 종교가 순기능으로 작용할 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종교가 뒷전에 물러나 있을 때가 아니다.
풍교야박(楓橋夜泊)
한산사(寒山寺)는 옛 소주성에서 서쪽으로 십리 정도 떨어진 풍교고진(楓橋古鎭)에 있으며, 불교가 극성을 부리던 양(梁)의 천감(天監)연간에 건설됐다. 이 일대는 작은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대평원이다. 일반적으로 절은 산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산사는 수많은 물길 사이에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다. 당대의 시승 한산자(寒山子)와 습득(拾得)이 이곳에서 노닐었다. 대웅전을 돌아가면 한습전(寒拾殿)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한 송이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는 한산자와 묵묵히 귀담아 듣는 습득의 조상이 있다. 사이가 좋기로 소문난 까닭은 한 사람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기만 했기 때문이다. 조용히 바라보면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이곳에는 볼거리가 많다. 건물로 눈에 띠는 것은 보명보탑(普明寶塔)이다. 5층의 수려하면서도 단조로운 목조건물인 이 탑은 3층까지 개방이 되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소주 시내가 널리 보인다. 3층에 올라가서 주변을 돌아보니 한겨울인데도 대나무 숲에서 푸른빛이 돌아서 남방의 정취가 느껴지고, 사찰의 뒤를 흐르는 운하를 따라 특유의 2층식 주택들이 늘어섰다. 한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긴 회랑에 연이은 비석들이다. 가장 여러 사람이 남긴 글은 역시 한산사를 유명하게 만든 당의 시인 장계(張繼)가 남긴 ‘풍교야박’이라는 칠언율시이다. 풍교(楓橋)는 한산사 주변을 흐르는 운하에 놓인 다리이다. 이 시는 한산사의 종소리와 수국(水國)의 달밤이 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가장 절묘하게 표현했다고 하여 널리 사랑을 받았다.
월락오제상만천(月落烏啼霜滿天),
강풍어화대수면(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외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야반종성도객선(夜半鐘聲到客船).
달 지고 까마귀 소리 들릴 제, 찬 서리 하늘에 가득,
강교와 풍교에 댄 어선이 마주보며 시름에 겨워 졸고 있네.
고소성 밖 한산사 한밤중을 알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리누나.
중국사상 가장 화려했던 당대에도 한산사는 수많은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장계가 이 시를 지은 후 많은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배를 타고 놀다가 밤이 깊으면 다리에 배를 대고 한산사의 종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어선에서 비친 불빛이 물결에 따라 흔들리니 조는 것 같다. 절묘한 감흥에 젖은 이태백은 아무리 시를 지르려고 해도 머릿속에서 장계의 풍교야박이 맴돌았다. 결국 그는 붓을 던진 대신 풍교야박을 읊조렸다. 이태백은 시를 지으면 절창이었지만, 시를 짓지 않아도 더 절창이다. 이후로 묵객들은 시를 짓는 것보다 붓을 들어 풍교야박을 적고 비석에 새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다양한 사람들의 글씨를 감상하는 것도 풍교야박을 읽는 기쁨이다. 유월(兪樾)의 글씨는 매끄럽고 부드러워서 사랑하는 여인과 마주앉은 느낌이고, 유해속(劉海粟)의 글씨는 호랑이의 걸음처럼 웅혼하여 지기와 천하지대사를 논하는 것 같고, 진운(陳雲)의 글씨는 취흥이 도도한 일필휘지이다. 문징명(文徵明)의 글씨는 가을날 계곡물처럼 청량하고, 중국공산당의 창시자 이대쇠(李大釗)의 글씨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고집스럽다. 장계의 자서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정에 겨워하는 것 같고, 전태초(錢太初)의 전서는 나란히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고, 화인덕(華仁德)의 글씨는 새색시가 남편을 기다리며 조바심하는 것 같다. 사람의 본능 가운데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도 만만치는 않다. 그렇다고 아무 것이나 남기면 보기 싫은 낙서가 되고 만다. 재주가 많아 무엇인가 남기려다가 그것을 억누르며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중한 사람들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진다.
황소지란(黃素之亂)
대당제국의 붕궤를 재촉한 황소의 농민반란은 신라의 최치원이 ‘토황소격문’을 지은 일로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荷澤) 출신으로 조상은 3대째 사염매매업에 종사했다. 여러 차례 진사과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자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을이 되어 9월이 오기를 기다렸다가(待到秋來九月八), 국화가 피면 모든 꽃들을 없애리(我花開後百花殺). 하늘까지 퍼지는 향기 장안에 스며들면(冲天香陳透長安), 성안 가득 황금빛 갑옷으로 채우리라(滿城盡帶黃金甲).’ 훗날 반란을 일으켜 장안에서 ‘7일 천하’를 누릴 것을 예상한 것 같다. 귀향한 그는 조상의 업을 이어받아 염방의 수령이 되었다. 674년, 하남에 가뭄이 발생하자 왕선지(王仙芝)와 상군장(尙君長)이 농민을 모아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을 비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황소도 거기에 가담했다. 몇 달 사이에 수만명이 모였다.왕선지와 황소는 철저한 유격전술로 관군과 싸웠다. 조정의 회유책에 넘어간 왕선지가 관직을 받자, 분노한 황소는 그와 헤어져 북상했다. 유격전술은 장기적인 대책이 아니었다. 박주(亳州)에서 왕선지의 부장 상양(尙讓)과 연합한 황소는 충천(沖天)대장군이라 자칭하고, 초보적인 농민군정기구를 설립했다. 농민군의 기세가 커질수록 관군의 반격도 강했다. 낙양을 공격하려다가 실패한 황소는 방향을 돌려 양자강을 건넜다. 강서, 절강을 거쳐 복건까지 남하했다. 황소는 시간을 벌기 위해 조정과 협상을 하다가 전투력을 회복하면 요충지를 기습했다. 영남 일대를 점령한 그는 의군통령을 자칭하고, 환관의 폐해와 조정의 실정을 공격하는 격문을 돌렸다. 역사는 당시의 극단적인 폐단을 지적했다고 평가한다. 광주에서 독립정권을 수립하려고 했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마침 전염병이 돌자 병력의 절반을 잃었다. 북방출신인 부하들도 북상하여 더 큰 이익을 도모하자고 주장했다. 북상하는 도중에 가담자가 늘어 강릉을 공격할 때는 50만명이었다고 한다. 황소가 절강 일대를 장악했을 때 고병(高騈)이 제도행영도통으로 진압군을 지휘했다. 이 무렵 최치원이 격문을 지었다. 고병은 황소의 완병계(緩兵計)에 넘어가 궁지에 몰린 황소가 전력을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다. 황소가 장안을 노리자 그를 막겠다고 나선 사람은 전영자(田令孜)라는 환관이었다. 그가 끌고 온 신책군(神策軍)은 이름은 거창했지만, 군적에 들었던 부호의 자제들이 돈을 주고 대신 출전시킨 빈민들이었다. 결국 장안이 위험해지자 희종은 성도(成都)로 도망쳤다. 황소는 그의 시에서 예언했던 대로 황금빛 옷을 입고 장안에 입성했다. 황소의 반란을 진압한 것은 농민군에 가담했다가 조정에 투항한 주온(朱溫)과 사타족 출신 이극용(李克用)이었다. 관군의 집중 공격을 버티지 못한 황소는 장안을 버리고 다시 유격전을 전개했다. 도망치던 황소는 고향 부근인 태산의 낭호곡(狼虎谷)에서 생질에게 피살되었다. 조카 황호(黃皓)가 패잔병을 이끌고 유격전을 펼치다가 호남에서 피살되자 10년을 끈 농민반란도 마무리되었다.황소에게는 23명의 여자가 있었다. 희종이 왜 도적을 따랐느냐고 묻자, 한 여자가 대답했다. “국가는 백만의 병력으로도 종실을 지키지 못하고 파천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도적을 막지 못한 책임을 공경과 장수들에게 묻지 않고 한 여자에게 묻습니까?” 희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모두 죽였다. 집행관은 여자들을 불쌍히 여겨 술에 취하게 한 후 참수했다. 황제에게 따지던 여자는 술을 마시지 않고 당당하게 형을 받았다. 황인우(黃仁宇)는 ‘장강을 4번, 황하를 2번 자유롭게 오간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반란군이 당제국의 무수한 틈새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각지의 지방관들은 자기 지역의 안전을 돌보기에 바빴기 때문에 그들을 잡기 위한 유효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신당서’에서는 ‘현명한 신하는 배척을 받아 죽고, 겁쟁이가 자리를 차지했다. 세금과 형벌이 가혹하자 천하에 근심이 늘었다. 하늘은 당을 없애려고 도적들을 내놓았다. 5개의 왕조를 거치면서도 전쟁은 계속되자가, 송에 이르러서야 천하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한이 망한 것도 천하의 대란 때문이었고, 진에 이르러서야 안정됐다. 진이 망한 것도 천하의 대란 때문이었고, 당에 이르러서야 안정됐다. 치세는 짧고, 난세가 길었던 것은 고금의 형세이다’라고 지적했다. 지금은 치세인가, 난세인가?
하화중생(下化衆生)
1592년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일본은 ‘가도정명(假道征明)’ 즉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부산과 동래를 공격하면서 일본의 침략목적은 명나라이므로 조선이 길을 열어준다면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일본군의 침입전략은 교묘했다. 이 구호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일본과 모의해 중국을 칠 수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막다른 길에 몰린 조선이 지원을 요청하자, 명의 조정에서는 중국군을 유인하려는 조선의 책략이라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고 했다. 이 전쟁은 임진년인 1592년에 시작돼 1598년인 기사년에 마무리되기까지 7년 동안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적 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꾸노에끼(文祿之役)’라고 부른다. 이 무렵 유럽은 1492년에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1451~1506)가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지원을 받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기 위해 출항했다가 뜻밖에 오늘날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의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이래, 아메리카 대륙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 발견 5년 후에 포르투갈 출신 바스코 다 가마(1469~1524)가 마누엘1세의 후원으로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함으로써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유럽의 욕망은 오스만투르크가 가로막은 육로를 피해 바다를 이용해 아시아로 향했다. 일본은 오랜 센가꾸(戰國)시대를 마무리하기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부하에게 암살된 후 재빨리 상황을 수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국정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내전을 마무리했다. 중국과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를 차단한 것과 달리 일본은 노부나가가 네델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병기인 조총을 전투에 활용하면서 냉병기 시대에서 열병기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의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하급무신출신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힌 망상가였다. 신무기로 무장한 당시 일본의 육군은 세계 최강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훗날 메이지(明治)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황당한 명분으로 아시아를 침략한 전초전에 해당하는 ‘가도정명’을 구실로 일본에서는 할 일이 없어진 전쟁기계들을 조선으로 밀어 넣었다. 그로서는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계획이 성공하면 해외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양수겹장식의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이 시기에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각국은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눈을 들리지 못하고 전통적인 유가적 세계관에 안주한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의 선각자들은 시대적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운서주굉(雲棲袾宏), 자백진가(紫栢眞可), 감산덕청(憨山德淸), 우익지욱(藕益智旭) 등의 고승들이 유교와 도교를 불교와 융합시키기 위한 거대한 사상적 개혁을 주도했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운동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관방학을 넘어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린 유교는 이 무렵 성리학과 예교논쟁으로 시대적 변화를 간과하고 내부의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서산대사로 알려진 휴정(休靜)은 불교 내부적으로는 교종을 선종의 과정으로 끌어들여 융합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는 불교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는 삼교일원론의 기원을 마련했다. 그의 법통을 받은 사명대사는 불교에 안주하지 않고 평소에 유학자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했다. 참혹한 전쟁은 사명대사에게 불법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게기가 되었다. 그것은 하화중생에 중심을 둔 보살도의 실천으로 나타났다.
용호상박(龍虎相搏)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용기요, 미리 대비하는 것은 지혜이다. 전국시대 최고의 모략가 장의(張儀)가 초에서 진으로 갔다. 당시 진에서는 진진(陳軫)이 명성을 날렸다. 친구 소진(蘇秦)에게는 의리를 지킨 장의지만 진진에게는 달랐다. 진진도 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장의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전신(田莘)에게 혜왕을 만나 이렇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진헌공(晋獻公)은 주지교(舟之僑)의 위명 때문에 괵(虢)을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헌공은 순식(荀息)의 계책대로 미녀와 악사를 괵으로 보내자 괵의 정치가 문란해졌습니다. 주지교는 군주가 말을 듣지 않자 괵을 떠났습니다. 헌공은 괵을 멸망시켰습니다. 또 궁지기(宮之奇)라는 인재 때문에 우(虞)를 침략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색(男色)을 밝히던 우의 군주에게 미남자를 보냈습니다. 미남자의 활약으로 위신이 추락한 궁지기는 우를 떠났습니다. 헌공은 손쉽게 우를 멸망시켰습니다. 강적 초는 횡문군(橫門君)의 군사적 능력과 진진의 지혜 때문에 장의를 보내 두 사람을 제거하려고 합니다.”혜왕은 장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고심하던 장의가 다시 혜왕을 설득했다.“초는 진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지만, 진진은 매우 존중하고 있습니다. 진진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진진은 초로 가려고 합니다. 왜 그 이유를 묻지 않습니까?”혜왕이 진진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진진이 대답했다.“장의뿐만 아니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오자서(伍子胥)는 충성심 때문에 다투어 그를 신하로 삼으려고 했으며, 증삼(曾參)은 지극한 효자였기 때문에 모두 아들로 삼고 싶었습니다. 종이나 첩을 팔려고 내놓으면 충직하고 정숙한 순서대로 팔립니다. 소박맞았어도 같은 동네로 시집가면 좋은 여자입니다. 신이 대왕께 충성하지 않는다면 초가 저를 받아주겠습니까? 충성을 다해도 신을 버리려고 하시니, 초가 아니라 어디라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혜왕은 진진을 더욱 신뢰했다. 천하의 모략가 장의도 진진을 당하지 못했다. 1년 후 진왕이 장의를 승상으로 삼자 진진은 초로 도망쳤다. 초왕이 그를 진에 파견했다. 진진은 양(梁)을 지나다가 공손연(公孫衍)을 만났다. 그도 장의와 앙숙이었다. 진진이 말했다.“위의 전수(田需)는 합종을 모색하고 있지만 초왕은 믿지 못합니다. 위왕에게 연과 조를 방문하겠다고 요청하십시오. 허락하면 연과 조로 갈 것처럼 하십시오.”연과 조의 간첩들이 그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초왕은 전수가 약속을 저버렸다고 화를 내며 전수의 육국합종책을 믿지 않았다. 제가 서둘러 서수를 초대하여 중용했다. 진진이 서수를 도운 것은 장의와의 4번째 대결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진진이 도착하자 혜왕은 초에서도 과인이 생각나더냐고 물었다. 진진이 대답했다.“초의 집규(執珪) 장석(莊舃)이 병에 걸리자 초왕은 월의 비천한 사람이었던 장석이 월을 생각할까 아닐까 궁금했습니다. 시종이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리면 고향을 하니 어느 나라 노래를 부르느냐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초왕이 사람을 시켜 들어보니 과연 장석은 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신이 버림을 받아 초로 갔지만, 어찌 진의 노래를 부르지 않겠습니까?”진왕은 위와 초가 1년 동안 싸우자 파병 여부를 고민했다. 진진에게 대책을 물었다.“변장자(卞莊子)가 호랑이를 찌르려고 하니 심부름 하던 아이가 말렸습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먹으려고 합니다. 맛이 좋으면 반드시 서로 다투겠지요. 강한 놈은 부상을 입을 것이고, 약한 놈은 죽겠지요. 부상당한 호랑이는 쉽게 잡습니다. 대인은 호랑이 두 마리를 다 잡을 수 있습니다. 신의 계책이라야 별 것이겠습니까?”진진은 다시 혜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장의의 호적수다운 사람이었다.
육불총리(六不總理)
단기서(段祺瑞)는 안휘성 출신의 군벌로 북양의 호랑이라 불렸다. 1881년, 은덩어리 하나를 들고 2천리를 걸어서 산동성 위해로 아저씨 단종덕(段從德)을 찾아갔다가 이홍장(李鴻章)이 세운 북양무비학당 포병과에 들어가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889년, 관비로 베를린군사학교 포병과에 유학했다. 2년 후 귀국해 무비학당 교관이 됐다. 1895년, 원세개의 신식육군건설에 참여해 의화단을 진압하면서 북양군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왕사진(王士珍-용), 풍국장(馮國璋-표범)과 함께 북양의 호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24년 3월, 북경대학 25주년을 기념하는 여론조사에서 단기서는 손문, 진독수(陳獨秀), 채원배(蔡元培)보다 앞서 청년의 우상인 호적(胡適)와 나란히 선정됐다. 1926년, 하야를 발표하고 천진으로 물러났다. 일본의 관동군 특무대장이 제휴를 제안했지만 깨끗이 거절했다. 1933년 초, 장개석의 요청으로 일본인의 세력범위인 천진을 떠났다. 단기서의 제자였던 장개석은 군복을 입고 직접 역까지 나와 스승의 예로 맞이했다. 1936년 11월 2일, 위장병 발작으로 72세에 서거했다.단기서는 군벌이었지만, 인격은 고상했다. 불추(不抽), 불갈(不喝), 불표(不嫖), 불도(不賭), 불탐(不貪), 불점(不佔)을 추구해 ‘육불총리’라는 평가를 들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채식을 즐겼으며, 실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박한 생활을 하며 물처럼 청렴했다. 모은 재산이 없었지만 돈을 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재물을 탐하던 시대에 그는 확실한 별종이었다. 청황제의 퇴위, 원세개의 홍헌제 저지, 장훈의 복벽 토벌 등 국가체제 결정에서 핵심역할을 해 ‘삼조공화(三造共和)’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적 권모술수와 무력에 대한 맹신은 오점으로 남았다. 양계초는 그에게 허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한 책임감은 누구도 비할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 집정이었을 때, 군경이 천안문광장에서 애국시위를 펼친 학생들을 살상한 318참사가 발생했다.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애도의 뜻으로 소식을 하겠다고 약속한 후 죽을 때까지 약속을 지켰다. 당시 고관들은 3명의 처와 6명의 첩을 둘 수 있었다. 단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미모와 기예를 갖춘 4번째 첩을 총애했다. 그녀에게는 이전부터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단기서는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성대하게 두 연인을 맺어주었다. 단기서는 평생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았다. 원세개의 양녀와 재혼하면서 부인 장씨 명의로 집 한 채를 얻었다. 원세개가 노름으로 딴 것을 준 것이다. 원세개가 죽은 후 집주인의 아들이 찾아와 돌려달라고 하자 깨끗하게 돌려주었다. 단기서는 평생 셋집에 살았다. 최고 권력자였을 때는 선물도 받지 않았다. 강소독군 제섭원(齊燮元)이 각종 보물로 부채를 상감한 병풍을 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대로 돌려보냈다. 장작림이 동북의 특산품을 보냈으나, 죽어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장작림의 부관이 물러나지 않자 물고기 두 꾸러미만 받았다. 유일하게 받은 것은 풍옥상이 보낸 커다란 호박이었다. 1926년, 여원홍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법정에 서기까지 했으니 치부를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자녀 가운데 6명이 요절했다. 장성한 자녀들은 아버지와 달리 평범했다. 조카 단굉강(段宏剛)이 주로 단기서를 측근에서 도왔다. 차녀 단굉빈(段宏彬)은 일찍이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100세에 죽었다. 삼녀가 부친을 모시고 관사에서 살았다. 단가의 가규는 매우 엄격했다. 단기서는 가족들이 공무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했다. 어떤 첩이 친척의 일로 청탁을 하자 단기서는 코를 실룩거리며 화를 냈다. 단기서는 화가 나면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실룩거렸다고 한다. 장남 단굉업은 어려서 친척의 집에 맡겼다가 10살이 돼서 데려왔기 때문에 교육이 부족했다. 사람들이 정부에 일자리를 주라고 권했지만, 단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녀들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기를 원했다. 동생 단기보가 관직을 달라고 하자, 약간의 돈을 주어 장사나 하라고 돌려보냈다. 하야한 후 생활비는 장개석이 전적으로 부담했다. 총리가 하야한 후 또 총리를 골라야 하는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인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