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미미지악(靡靡之樂)
진(晋)의 평공이 사기궁(虒祁宮)의 낙성식에 초대하자 제후들은 비웃으면서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영공(衛靈公)도 마지못해 길을 나섰다. 도중에 복수(濮水)의 역사에 묵을 때 멀리서 금(琴)을 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가늘었지만 청아했다. 음악애호가였던 영공은 계절에 따른 음악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사연(師涓)을 불러 익히게 했다. 영공을 만난 평공은 사연을 불러 연주를 부탁한다고 요청했다. 사연이 오자 평공은 사광(師曠)을 불렀다. 평공의 권유로 연주가 시작되자 평공은 감탄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사광은 금을 잡으며 은의 사연(師延)이 주왕(紂王)에게 들려주었던 청상(淸商)이라는 망국의 노래라고 만류했다. 평공은 한사코 끝까지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사광은 덕과 의를 겸비한 성군이 듣는 청징(淸徵)이라는 곡도 있다고 말하자 평공이 연주해보라고 명했다. 사광의 연주가 시작되자 8쌍의 학이 날아와 춤을 주었다. 평공이 그 이상의 곡은 없느냐고 물었다. 사광은 청각(淸角)이라는 곡이 있다고 말했다. 평공이 연주해보라고 하자 사광이 거절했다.“불가합니다. 옛날 황제(黃帝)가 세상의 모든 귀신들을 태산에 모아서 지은 곡입니다. 덕이 없어서 귀신들을 복종시키지 못하는 군주가 들으면 세상의 모든 귀신들이 달려옵니다.”평공이 간청하자 사광의 연주가 시작됐다. 한 번 연주하니 검은 구름이 일어나고, 두 번 연주하니 광풍이 천지를 흔들었다. 기왓장이 어지러이 날고 기둥이 흔들렸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물이 차올랐다. 놀란 평공은 방으로 들어가 엎드렸다. 놀란 평공은 심장병에 걸렸다. 꿈에 앞다리가 2개, 뒷다리가 1개인 자라가 다가왔다. 놀라서 일어났지만 생시에 일어난 일만 같았다. 아무도 해몽하지 못했다. 그동안 마침 정간공(鄭簡公)이 당대 최고로 박학다식한 자산(子産)과 함께 도착했다. 양설힐의 부탁을 받은 자산이 해몽했다.“다리가 셋 달린 자라는 능(能)입니다. 옛날 우(禹)의 부친 곤(鯀)이 황하의 치수에 실패하자 순(舜)이 동해의 우산(羽山)에 감금했다가 주살하고 다리 하나를 끊었습니다. 곤은 능으로 변해 우산의 연못에서 살았습니다. 아들 우가 제위에 오르자 능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삼대(三代)이래 제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근자에 주왕실의 힘이 쇠미해져서 천하는 현재 맹주가 다스리고 있습니다. 맹주이신 평공이 제사를 지냈는지요?”평공이 곤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자 병세가 잠시 진정되었다. 평공은 자산에게 거(莒)에서 보낸 솥을 하사하였다. 자산은 귀국하면서 양설힐에게 넌지시 말했다.“평공은 백성들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사치만 즐기니 민심이 떠나지 않겠소. 재발하게 되면 죽을 것이요. 전에 드린 말씀은 군주의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둘러댄 것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위유(魏楡)를 지날 때 진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가가 보니 사람은 없고 잡석 10여개만 있었다. 돌아가는데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잡석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문을 들은 평공이 사광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돌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귀신들이 돌을 빌려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귀신이란 백성들에게 붙어서 살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한이 모이면 불안해진 귀신들이 나타납니다. 주군이 화려한 궁실을 짓느라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자 귀신들이 돌에 붙어서 말한 것입니다.” 평공은 아무 말도 못했다. 사광이 물러가면서 양설힐을 보고 말했다. “귀신이 노하고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니 주군께서는 오래 사시지 못할 것입니다. 사치하는 마음은 실은 초나라로 인한 것이어서 초왕이 당할 화를 우리 주군이 당하게 되었습니다.”한 달 후 평공이 죽었다. 사기궁을 짓고 3년이 되지 못했다. 3년간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백성들만 못살게 굴었으니 가소로운 일이었다.
조아지신(爪牙之臣)
조아지신은 큰 공을 세웠지만 그저 심부름이나 하는 신하로 만족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권력을 노리는 자가 조아지신에 만족할 리는 없다. 남송 광종(光宗) 시기의 조여우(趙汝愚)는 외척 한탁주(韓侂冑)와 결탁해 고종황후 오(吳)씨에게 광종이 태상황을 핍박한다고 밀고해 조확(趙擴)을 영종으로 옹립했다. 송의 먼 종실이었던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불철주야 학문에 매진해 마침내 진사가 됐다. 관운도 좋아서 승진을 거듭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여유정(呂留正)과 함께 정권을 잡았지만, 곧바로 궁정의 정변에 휘말렸다. 한탁주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앞세워 고관이 되려고 하자 조여우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종친이고 그대는 외척이 아니오? 우리가 무슨 공로를 세웠다고 자부하겠소? 조아지신으로 다른 이들의 포상이나 추천하는 것이 어떻소?”모욕을 느낀 한탁주는 조여우에게 원한을 품었다. 남송 초기에 사대부들은 정이(程頤)의 이학(理學)을 중시하는 파와 왕안석(王安石)의 공리(功利)주의를 추구하는 파로 양분됐다. 견해가 달랐던 양 파는 끊임없이 논리적인 다툼을 벌이다가 마침내 당파로 변질돼 서로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효종과 광종이 제위에 있었을 때는 주희(朱熹)가 이학을 제창하며 명성을 날렸다. 조여우는 주희를 시강(侍講)으로 추천해 영종의 강학을 맡겼다. 주희는 대학자이기도 했지만, 시정(時政)에도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한탁주가 위세를 이용해 권력을 농간한다고 생각한 그는 강학을 이용해 영종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폐하께서 즉위해 10개월이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재상을 물리치시고 대간(臺諫)을 자주 교체하시며 모든 일을 독단하고 계십니다. 대신과의 상의는 고사하고 아예 의논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니, 이러한 폐단을 바꾸지 않으시면 신은 삼가 독단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세를 더욱 아래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주희의 의도는 한탁주의 권력농간에 대한 비판이었다. 한탁주는 주희를 방치할 수가 없어서 시강의 직책에서 내쫓았다. 조여우도 막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조여우는 한탁주를 아무 생각도 없는 욕심꾸러기로 여겼다. 그러나 한탁주가 먼저 대간들에게 손을 뻗어 언로를 장악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대간들은 조여우가 ‘종친으로서 사직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파면시키라고 주청을 올렸으며, ‘위학(僞學)’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여우를 지지하는 자들을 내몰았다. 한탁주의 권세는 더욱 튼튼해졌다. 조여우는 한탁주가 어떤 인간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가 역공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역사는 조여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위태로울 때에도 대계를 세웠으며, 밝은 인재들을 모아 영종의 새로운 정치를 보좌해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대를 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한탁주의 올가미에 얽혀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생각했다.”그러나 역사가들은 정치투쟁의 잔혹성을 알지 못했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게 생각했다고 했지만, 권력투쟁에서 조여우의 안일하고 무능함을 답답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조여우가 대계를 세운 올바른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권력투쟁에 한탁주라는 음모꾼의 꼼수에 밀린 것은 분명하다. 부패척결이라는 거창한 깃발을 내걸었던 총리가 한 기업가와의 관계를 부인하다가 부패한 정치가로 전락하며 자진사퇴했다. 옳고 그름만으로는 정치개혁을 이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투쟁에서는 대의도 중요하지만 치밀한 계략과 자기방어능력도 중요하다.
수불석권(手不釋卷)
왕맹(王猛, 325~375)은 지금의 산동성 웨이팡(濰坊) 출신으로 자를 경략(景略)이라 했다. 그가 출생했을 때 후조의 석륵(石勒)이 북방을 석권하고 남방으로 예봉을 돌려 회수에서 동진(東晋)과 대치했다. 석륵의 후계자 석호(石虎)는 살인을 놀이처럼 좋아한 폭군으로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다. 왕맹은 가족들을 따라 떠돌다가 하남과 하북의 접경인 위군에 정착했다. 어린 왕맹은 생계를 위해 소쿠리를 팔았다. 어느 날 낙양까지 갔다가 높은 가격으로 소쿠리를 사겠다는 사람을 만났다. 마침 가진 돈이 없으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왕맹이 따라가니 깊은 산속에 백발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맹이 절을 하니 노인은 대인이 될 사람에게 절을 받을 수 없다고 만류하고 소쿠리를 샀다. 산을 나와서야 그곳이 중악 숭산(嵩山)이라는 것을 알았다. 왕맹은 노인을 스승으로 삼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풍운의 변화를 관찰했다. 고달프게 살았지만 수불석권하며 각종 지식을 널리 습득했다. 작은 일에 개입하지 않았고, 하찮은 무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번잡한 예절에 구속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행동했다. 석호가 죽은 후 북방은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염민(冉閔)이 조를 무너뜨리고 위를 세우고, 선비족 모용씨가 염민을 무너뜨리고 전연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저족(氐族)이 두각을 나타냈다. 석호에게 강제로 업성으로 끌려갔던 저족은 부홍(苻洪), 부건(苻健)을 거치면서 관중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전진을 세웠다. 351년, 동진의 환온(桓溫)이 서안의 동쪽에 주둔하자, 왕맹은 소박한 차림으로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여러 명사들 앞에서 종횡무진 천하대사를 논하는 왕맹에게 관중의 호걸들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왕맹은 환온이 장안을 지척에 두고 공격하지 않는 속내가 전력을 아껴 동진 내부의 권력다툼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호걸들이 호응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환온은 반나절이나 침묵하다가 강동에서 이보다 나은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왕맹은 환온의 초빙요청을 거절하고 화산(華山)으로 돌아갔다. 사족이 기반을 다진 동진에서는 할 일이 없고, 환온이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도왔다가 이름을 더럽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진의 정권은 부건의 조카 부견(苻堅)에게 넘어갔다. 박학강기(博學强記)했던 부견은 경세제민과 통일천하라는 대지를 세웠다. 상서 여파루(呂婆樓)가 왕맹을 추천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부견은 유비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처럼 기뻐했다. 왕맹은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뛰어난 정책을 제시했다. 황태후의 동생 강덕(强德)이 포악한 짓을 자행하자 보고도 하지 않고 죽였다. 부견이 태후의 부탁을 받고 사면장을 보냈지만 강덕의 시신은 이미 거리에 널려 있었다. 왕맹은 어사중승 등강통(鄧羌通)과 함께 불법을 저지른 귀족 20여명을 죽였다. 비로소 세력가들의 불법행위가 사라졌다. 부견도 오늘에서야 천하에 법이 있고, 천자의 존귀함을 알았다고 감탄했다. 잘 자란 나무는 바람이 꺾고, 행실이 고상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한 왕맹은 평판에 연연하지 않고 유능한 인물을 등용했다. 부견은 내외의 군국사무를 모두 왕맹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조당에 단정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고 토로했다. 왕맹은 피로가 누적되어 중병에 걸렸다. 부견은 친히 명산대천을 찾아 쾌유를 빌었다. 왕맹의 병이 잠시 호전되자 대사면령을 내렸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3차례나 관을 잡고 하늘이 나에게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게 하려고 경략을 빼앗아갔다고 통곡했다. 시호를 무후로 정하여 제갈량과 같다고 규정했다. 부견은 자기와 왕맹을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보다 20살이나 많았지만, 부견은 왕맹보다 13살이나 어렸다. 왕맹이 51세에 죽었을 때 부견은 38세였다. 큰형님, 스승, 최고의 도우미를 잃은 부견은 너무 슬퍼하다가 반년 사이에 백발로 변했다. 반년 동안 부견은 왕맹의 당부에 따라 국사를 처리했다. 그러나 북방을 통일한 후 왕맹의 당부를 잊고 동진을 정벌하다가 비수에서 대패하고 멸망했다. 백양(栢楊)은 ‘왕맹 이전에는 제갈량, 이후에 왕안석이 있었다. 제갈량은 군사상 성취가 부족했고, 왕안석은 강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왕맹이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인재 부족은 없어서가 아니라 찾는 이의 안목과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불구문달(不求聞達)
제갈량(諸葛亮)은 융중(隆中)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던 시절을 ‘난세에 구차하게 성명을 보전하면서도, 제후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라고 토로했다. 진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후광으로 상류사회에 진입했기 때문에 원했다면 쉽게 출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군자이자 권력의지가 부족한 형주목 유표(劉表)를 섬기기는 싫었다. 제갈량은 하찮은 공명(功名)이나 녹봉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골마을 융중에 은거했지만, 세상사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조석지변인 천하대세를 주시하며, 정치의 중심 양양을 자주 찾아 정보를 수집하여 당대의 명망가들과 토론했다. 그러한 바탕이 없었다면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을 때 천하삼분이라는 대계를 제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불구문달’은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대상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였을 뿐이다.그는 늘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와 비교했다. 관중은 춘추시대 제의 유명한 정치가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대개혁을 단행하여 제(齊)를 당대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환공은 튼튼한 내치를 바탕으로 제후들을 규합해 천하를 호령하며 패자로 군림했다. 악의는 조(趙)의 무령왕(武靈王)을 섬겼으나 왕이 반란군에게 포위돼 아사하자, 위(魏)로 망명했다. 연소왕(燕昭王)은 제의 침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자 복수하려고 자세를 낮추어 인재를 거두려고 했다. 마침 위의 사신으로 연에 왔던 악의는 소왕의 신하가 됐다. 악의는 한(韓), 조, 위, 초(楚)와 연합해 제군을 대파하고 제의 수도 임치(臨淄)까지 함락했다. 악의는 6개월 동안 제의 70여개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소왕이 죽고 계위한 혜왕이 전단(田單)의 반간계에 속아 악의를 소환하고 기겁(騎劫)을 장수로 임명했다. 위협을 느낀 악의는 조로 망명했다. 악의가 없어지자 전단은 즉묵(卽墨)에서 연군을 대파하고 실지를 회복했다. 명장을 잃은 혜왕은 진심으로 악의에게 사과했다. 혜왕은 악의의 아들 악간(樂間)을 창국군(昌國君)으로 삼고 악의에게 연과 조를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했다. 이때 악의가 연왕에게 보낸 ‘보연혜왕서(報燕惠王書)’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명문이다. 제갈량이 관중과 악의를 목표로 삼은 것은 명재상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그대들은 나라의 한쪽 모서리에서 공업을 쌓을 수 있겠지만, 자신은 관중과 악의처럼 불세출의 공업을 쌓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는 명군을 도와 군벌의 난동을 평정하고 한왕실을 부흥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조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산골 유중의 청년 지식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제갈량을 허풍쟁이로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사실로 인정했다. 그들은 제갈량의 ‘불구문달’은 용의 겨울잠처럼 일시적인 휴식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와룡(臥龍)’이라 불렀다.제갈량은 조조를 필생의 원수로 여겼다. 조조가 잔혹한 살육을 저지르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 낭야는 조조의 공격으로 철저히 파괴됐고, 그 때문에 고향을 떠나 타지를 전전했던 처절한 경험은 한왕조 부흥이라는 집념으로 변했다. 벗 맹공위가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제갈량은 왜 인재가 넘치는 곳으로 가려느냐고 말렸다. 액면 그대로 보면 중원에서는 재능을 펼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지만, 사실은 조조에게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형주는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 유표가 한실의 종친이자 남양군은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의 고향이기 때문에 한왕조를 정통으로 여기는 관념이 강했다. 제갈량은 형주를 토대로 전한시대의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재현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배송지가 무너지는 권력을 되살리려는 것을 소임으로 생각한 것을 은근히 비판한 것처럼 제갈량의 한계는 대세의 변화를 무시한 점에 있다.
사신취의(舍身取義)
헝가리의 어떤 시인은 ‘생명은 귀하고, 사랑의 가치는 더 높다, 그러나 자유를 위한다면 두 가지 모두를 버려도 좋다’고 했다. 피끓는 젊은이들에게 진보와 자유를 추구하라는 뜨겁고도 냉정한 명언이다. 시인에게는 생명보다 자유가 귀했다. 약 2천여년 전, 묵자는 생명보다 천하의 공리(公利)를 위한 ‘의’가 귀하다고 선언했다.“사람들은 한마디의 말 때문에 죽기도 한다. ‘의’가 자기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묵자가 중시한 것은 바로 ‘한마디의 말’인데 이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상대를 죽이는 필부의 용기와는 다르다. 묵자의 ‘한마디 말’은 ‘의’와 천하의 공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이다. 유가에서도 ‘살신취의(殺身取義)’ 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이 있다. 이 점에서는 묵가와 유가의 사상적 맥락이 같다. ‘사생취의’ 즉 의를 지키기 위해 생명도 버린다는 말은 묵자의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묵가의 제자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자 교리였다. 묵가의 제자들은 천하의 이익을 위해 천하의 해악을 제거한다는 종지를 지키려고 기꺼이 몸을 던졌다. 불로 뛰어들고 칼날을 밟아서 죽더라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천하의 공리를 위한 묵가의 희생정신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했다.‘여씨춘추 상덕(上德)’에는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린 묵가의 비장한 이야기가 있다. 몇 글자밖에 되지는 않지만,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맹승(孟勝)은 금활리에 이어 묵가의 제3대 지도자인 거자(鉅子)가 됐다. 그는 초의 작은 제후였던 양성군(陽城君)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양성군은 다른 70여 가문과 함께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吳起)를 제거하기 전에 자기의 근거지를 맹승에게 잘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옥황(玉璜)을 잘라 부절로 삼고 반쪽이 맞는 경우만 별도의 행동을 한다고 결정했다. 양성군과 일당은 초의 도왕(悼王)이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던 오기를 공격해 부상을 입혔다. 왕의 시신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죄로 삼족이 멸하게 되자 자기 나라로 도망쳤다. 초군이 추격했다. 맹승은 ‘말은 지켜야 하고,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묵가의 교리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쌍방의 전력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성을 지킨다는 것은 죽겠다는 의미였다. 묵가의 제자 서약(徐弱)은 희생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맹승은 단호했다.“나는 양성군의 스승이자 친구이다. 지금 내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지 않으면, 엄격한 스승을 구하는 사람들이나 현명한 벗을 구하는 사람들도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구차하게 생명을 지킨다면 묵가의 진정한 정신은 사라진 셈이다. 묵가의 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서 죽어야 묵가의 대업이 이어진다. 나는 송(宋)의 전양자(田襄子)에게 후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다면 묵가의 맥이 끊어지지는 않는다.”“그렇다면 제가 먼저 죽어서 선생님께서 저승으로 오시는 길을 닦겠습니다.”서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먼저 죽었다. 맹승은 죽기 전에 제자 두 명을 전양자에게 보내 거자의 직분을 위임했다. 맹승이 죽자, 제자 180명도 따라서 죽었다. 전양자에게 갔던 두 제자도 양성으로 돌아가 죽으려고 했다. 전양자는 나를 거자로 임명하셨으니,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두 제자는 기어코 양성으로 돌아가 죽었다. 여씨춘추에서는 두 제자가 새로운 거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불찰(不察)’이라고 논평했다. 허유휼(許維遹)은 신임 거자의 만류를 듣지 않은 두 제자의 불찰이라고 했지만, 우성오(于省吾)는 두 사람을 만류한 전양자의 불찰이라고 주장했다. 묵가 180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벗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전통을 확인시켜준다. 의는 믿음에 대한 보답이다. 의가 사리진 세상은 삭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