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평화협정은 교전 당사자 간의 모든 군대가 전 전투지역에서 적대행위를 정지하는 한국 휴전협정과 같은 순수한 군사적 성격의 일반휴전 범주를 벗어나 교전 당사자간의 정치적인 해결안까지 포함되어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평화 상태를 회복하는, 국제법 이론상으로는 전쟁종료 방식의 보편적인 형태의 평화협정으로서의 형식은 갖추었다.
평화협정의 서명 당사자는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PRG)의 4개국이었으나 협정상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되어 협정을 준수하고 그 규정을 이행하는 협정의 당사자는 남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였다.
미국과 북베트남은 상호 적대행위를 하였던 군사문제 당사자로서 적대행위를 종식시키는 협정의 조항을 이행한 후에는 정치, 군사 등의 제반문제는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양 당사자간에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대한 미국의 의무는 많다. 북베트남에 대한 여하한 군사행동도 중지하여야 하며 부설된 기뢰는 제거해주어야 되고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나 국내문제에 간섭을 계속 하지 아니하며 협정조인 60일 이내에(이 기간 내에 쌍방 포로는 석방) 미군 및 연합군의 군대, 고문관, 무기, 장비, 물자, 준 군사기관 고문관 등은 베트남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은 억류된 포로에 대해서 협정조인 당일로 상호 명단을 교환하고 60일 이내에 송환만 시키면 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군의 철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정치적인 해결을 위하여 양 당사자(남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는 국민들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정치활동과 신앙의 자유, 이동, 거주, 노동의 자유와 재산 소유권, 자유 기업권 등의 민주적 제 자유를 보장하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그리고 중도파의 3파간에 전원일치제로 운영되는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를 협정 발효 후 90일 이내에 구성하여 이 협의회가 남베트남의 정치적 장래가 달려있는 총선거의 절차, 방법 등을 결정하도록 하며 이를 위하여 양 당사자는 최선을 다하도록 규정되었다.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 구성을 남베트남측이 받아들일 리도 없고 설사 구성이 된다 하여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협정조항에 이를 둔 것은 협의회 구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현 티우(Thieu) 정부를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방해하는 정부로 규정하여 국내적으로 그들의 지지 세력을 강화하고, 국제적으로도 티우 정부를 고립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협정문서는 갖추어야 할 요건을 구비하기 위하여 미국과 북베트남은 협정조인 30일 이내에 전쟁종결을 보장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하여 국제회의를 소집하는데 합의하고 이 국제회의에 평화협정 서명 당사국 외에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과 국제 관리감시위원회 4개국 등의 12개국과 UN 사무총장이 참가하도록 제의하였다. 이러한 국제회의가 베트남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이 조항은 제의로서 그치고 말았다.
협정서명 당사국은 적대행위의 정지, 외국군의 철수, 포로송환 등의 문제를 협의하고 해결하기 위하여 4자 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60일 동안 활동하고 이후는 남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PRG) 간에 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평화협정에 관한 군사규정 이행문제를 협의하도록 하였다.
협정이행에 대한 국제 감시기구로 인도, 캐나다, 폴란드, 헝가리 4개국 대표로 구성되는 국제 관리감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기구는 협정 위반사항에 대하여 공동으로 조사하여 전원일치제의 운영 원칙에 따라 당사국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었다.
파리 평화협정은 남베트남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표범무늬 형태의 현상동결 휴전 상태에서는 적대행위가 정지될 수 없는 것이며 북베트남군은 철수하지도 않고 잔류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도 북베트남의 위장단체인 임시혁명정부와 공동으로 구성하는 것도 남베트남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인데 중도파라는 반정부 인사들까지 정부와 동격으로 이 협의회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상호 지킬 의사가 없고 이의 이행을 강제할 수단이 없는 국가 간의 협정이라는 것은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이고 모든 것은 힘의 논리에 따라 해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협정에 대하여 남베트남 국민들은 분개하였지만 자력으로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남베트남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굴욕이었다. 이 협정에 대하여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지금까지 우리는 야수를 사냥하기 위하여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을 품에 안고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고 비유하였고 트란 반 돈(Tran Van Don)은 “총기를 휴대한 강도가 가게를 털려고 하는 현장에 경찰이 출동하였다가 그 강도는 그대로 놓아둔 채 경찰만 철수한 격”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제 남베트남은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었다. 북베트남의 지압(Giap)이 1972년 춘계공세를 한창 준비하고 있었고 미국은 전쟁의 베트남화를 계속 추진하고 있었던 1971년 가을, 달라트(Da Lat)에 있는 남베트남 육군사관학교에서 미국의 한 역사학자가 생도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어떤 생도가 “우리는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고 배웠는데 지금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할 말이 있는가?”하고 가시돋친 질문을 던졌다.
달라트 육사 생도
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이 전쟁의 초기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의 무력통일을 기도하였고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 시점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승리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3가지 과업을 수행하렬고 하였다. 첫째는 1965년도 북베트남의 침략을 격퇴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후 계속해서 남베트남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남베트남을 물질적으로 지원하여 내부위협과 외부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는 강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위의 두 가지 과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세 번째 과업에 대한 시험은 앞으로 있을 것이다. 10년 후가 될는지 더 이후가 될는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라. 여러분의 국가가 북베트남에게 정복되지 않는다면 미국은 승리하는 것이고, 정복된다면 미국이 패배하는 최초의 전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