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베트남화 정책이란 남베트남의 자위능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켜 남베트남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고 미군은 철수시킨다는 1969년 이후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정책이다.
이 베트남화 정책은 1969년 이후에 처음으로 시도한 정책은 아니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부터 미국은 원조를 계속하면서 군사 고문단을 보내어 남베트남군을 지도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지도하였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위협에 직면하여 남베트남이 공산화될 지경에 이르자 북폭, 지상군 개입의 단계를 거치게 된 것이다.
구정공세 이후 군사적 승리를 포기한 미국은 전쟁의 베트남화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1968년의 베트남화 방향은 전투는 남베트남군에게 인계하고 미국은 군사고문단과 군수지원 부대를 잔류시켜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방식이었으나 닉슨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미군의 전면 철수 전제하에 베트남화가 추진되게 된 것이다.
베트남화는 남베트남군의 전투능력 향상이라는 군사적인 요소와 남베트남의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되어 국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정치적 요소의 두 가지 요소가 다 충족되어야 하는 어렵고도 장기간이 소요되는 과업이다. 따라서 문제는 시간이었다. 1~2년 내에 성취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적 요소는 미국으로서도 지원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원범위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의 안정, 경제건설, 국론통일, 부정척결, 생활수준 향상, 국민단합 등 제 문제는 독립국가인 남베트남이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분야이고 미국으로서는 현재 효율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평정계획과 정치, 경제, 사회개혁에 대한 조언 이외에 별다른 묘수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국의 베트남화 정책은 자연히 군사적 요소에 우선을 두고 여기에 치중하여 추진되었고 베트남화란 1965년부터 미군이 전장의 주역을 담당하였던 것을 남베트남군에게 전쟁의 주역을 담당하게 하는 “전쟁의 베트남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전쟁의 베트남화를 위해서는 먼저 남베트남군의 전투능력이 향상되어 남베트남군이 전투를 인계받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의 베트남화 수행과정은 역순이었다. 1969년 4월에 닉슨은 주베트남 미군 사령부에게 단계적인 철군 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주베트남 미 대사나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이 아직은 남베트남군의 능력이 부족하여 철군할 시기가 아니라고 반대하였지만 6월 8일에 제1차 철군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이후의 철군도 마찬가지로서 미군의 철군은 닉슨의 선거공약과 여론의 압력에 따라 우선 불 끄는 식으로 철군을 먼저 시키고 무리하게 그 공백을 메우려고 노력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미군의 남베트남군 증강중점은 지방군(RF)과 민병대(PF), 미 그린베레들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부대와 남베트남 경찰의 전투력을 증강시켜 지역경계를 전담시키고 남베트남 정규군의 전력을 강화하여 미군이 수행하던 원거리 지역이나 국경지대 작전을 담당토록 함으로써 현상을 유지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정규군의 병력은 1965년도 250,000명에서 1968년에는 427,000명으로 증가되어 10개의 정규 보병사단과 공수, 해병여단, 레인저 대대 등의 주요 전투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1968년까지 남베트남군 보병사단(3개 연대, 1개 연대는 4개 대대)은 화력지원부대가 박격포 1개 대대로 미약하였으나, 105㎜ 곡사포 2개 대대로 증강되었고, 경전차와 APC를 장비한 장갑수색대대가 편성되었으며 기타 공병, 통신, 군수지원 부대 등이 증편되었다.
남베트남군 공수부대 병사들
남베트남군의 4개 군단도 1968년까지 군단 직할부대로서 155㎜ 곡사포 2~4개 대대, 20여개의 레인저 대대, 공병단, 통신단과 전투근무지원 부대가 증강되어 정규군단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남베트남 총참모부 예하 중앙 예비전력인 공수여단과 해병여단도 1968년까지는 각각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남베트남군 레인저는 철모에 표범 그림이 그려져 있고, 어깨에도 있다.
1969년도 이후에는 보병 1개 사단이 추가로 창설되었고, 사단포병은 3개 105㎜ 곡사포 대대와 1개 155㎜ 대대로 증편되었다. 또한 18개 헬기 대대(헬기 500여대)도 창설되었다. 기타 공병, 통신, 병기, 의무부대도 증강되었으며 해, 공군 장비도 단계적으로 증강되었다.
지방군과 민병대도 1965년 264,000명에서 1968년 393,000명으로 증가되었고 총 동원법이 제정된 이후에 1972년 말까지 550,000명으로 늘어나 1,679개 지방군 중대(지역에 따라 900~1,800명을 대대로 편성), 8,356개 민병대 소대가 편성되었다. 숫적으로는 엄청난 부대이며 이들이 전투력만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지역경계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화기도 M16 소총, M79 유탄발사기, M60 경기관총으로 교체되었다. 소수민족 부대도 대대급 부대에는 105㎜ 곡사포 4문이 할당되었다.
훈련을 받는 남베트남 민병대
1970년에 미 국방부는 남베트남군의 전력증강 및 현대화 종합계획을 승인하였고 이 계획에 따라 베트남화를 추진하였다. 복잡한 정밀장비의 운용 및 정비 등 기술 이전에 장기간이 소요되는 부문에는 미군철수에 대비하여 미 민간인 기술자들을 고용하기도 하였다.
1972년 10월 이후 휴전협정 내용에 반대하는 남베트남 정부를 설득하고 남베트남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려는 두 가지 목적으로 추가 증강계획의 일환으로 미국은 F-5, A-37, C-130, 헬기, M-48전차, 175㎜ 평사포 등을 긴급히 보급하였다. 이 긴급보급은 기본 베트남화 계획 이외에 추가로 더 보급하는 것으로 남베트남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는 휴전협정 내용을 남베트남이 수락하도록 하는 일종의 보상성격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군 고문관과 기종훈련을 받는 남베트남인 조종사의 모습
휴전 전까지 미군은 M16 100만 정, M60 경기관총 12,000정, M79 유탄발사기 4만 정, 박격포, 야포 2,000여 문 등을 제공하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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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이코 투투★ 작성시간 13.05.12 전력 증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철수부터 이루어졌었군요....
미군이 있어도 고만고만했은텐데,.. 베트남의 운명은 정해진게 아니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5.12 그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의 다른 점이죠. 한국전쟁에서는 확실하게 휴전이 맺어진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미군이 주둔해 있었지만 베트남은 일단 철수부터 하고 휴전이 맺어지는 상화이라 나중에 다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강건너 불 보듯 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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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옥괭이 작성시간 13.05.12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인적자원의 공급능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설사 아무리 강력한 전력증강이 이루어 져도 본질적으로 남배트남은 전쟁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업국가로 산업의 발전수준이나 국민의 교육수준 자체가 낮은 이상, 그걸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