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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99. 라오스 회랑 침공작전(3)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5.21|조회수811 목록 댓글 4

작전이 종료된 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서로의 승리를 주장하였다. 남베트남은 적 사살 13,636명, 항공 및 포병 화력에 의한 추정 사살 4,800명, 포로 69명, 적 장비 파괴는 포 76문, 전차 106대, 트럭 405대, 개인화기 5,066정, 공용화기 1,934정, 쌀 10,650톤을 노획하였고 피해는 사상자 6,000여 명으로 완전히 승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군의 손실이 16,400명으로 대승리를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발표된 남베트남군의 손실은 전사 1,483명, 부상 5,420명, 실종 691명, 전차 파괴 또는 피탈 75대, 공용화기 파괴 또는 피탈 198정, 개인화기 파손 또는 피탈 3,000여 정이었다.

미군의 손실도 컸다. 인명 피해는 전사 176명, 부상 1,942명, 실종 42명이었고 장비는 항공기 격추 7대, 헬기는 무려 108대가 격추되고 600여대가 부분적으로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한 상황 하에서 일방적인 공중공격이 가능하였는데도 대공화기에 취약한 헬기의 진면목이 들어난 것이다. 최초 600여대의 헬기가 지원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참가한 헬기 대수 이상으로 격추되거나 부분적인 파손을 입었던 것이다.

파괴된 미군 헬기..1971년 램슨719 작전 당시 북베트남군의 대공포 공격으로 격추되었다.

 

미군의 항공지원은 헬기 5,550 쇼티, 보급품 공수 5,260톤, 고정익 항공기 945쇼티, 고정익 항공기 폭탄 투하 2,334톤, 근접 항공지원 8,000여 쇼티, B-52 1,358쇼티로 17,750톤의 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엄청난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남베트남군은 작전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것이다.

서덜랜드(Sutherland) 중장과 그의 참모들은 남베트남군이 10,550명의 북베트남군을 사살했다고 판단하고 미군의 항공지원이나 포격에 의한 사살은, 남베트남군 판단의 배에 가까운 8,900여명이라고 추정하였다. 모두다 판단은 아전인수격으로 하기 마련이다. 적의 보급로는 일주일 만에 차량이 다시 자유 왕래하였고 1971년도에 북베트남군의 대공세는 없었다.

이 작전은 피아 50% 이상의 손실을 입은 비긴 전투이다. 그러나 미군의 항공지원 없이 남베트남군이 라오스에서 그렇게 오래 지탱이 가능하였으며 50% 정도의 손실을 입고 철수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남베트남군은 많은 반성을 하고 결점을 보완하여 베트남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노출된 것이다.

남베트남군의 과오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적의 기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적을 경시하였다. 캄보디아 월경 작전 시와 같이 적은 도주할 것이고, 그렇다면 작전지역 일대에서 많은 화기, 보급물자를 노획하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대로 사살자를 덧붙여 대승리를 하였다고 발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 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적을 경시한 결과 작전계획이 적의 정규사단과 접전하는 작전계획이 아니라 지금까지 남베트남 영내에서 보잘 것 없는 게릴라들을 상대로 하여 전투하는 방식대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는 것이다. 적의 정규사단이 3개 사단이나 있는 데도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화력지원기지 구축 따위의 발상으로 1개 대대와 포병이 적중에 스스로 뛰어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남베트남군은 당연히 정규전 방식대로 전선을 형성하여 적을 공격하고 노출된 측면을 방어하는 대책을 강구하면서 공격했어야 했다. 이 작전의 성격은 게릴라 소탕 작전이 아니라 적진에 뛰어드는 파쇄공격인 것이다.

라오스 월경작전에서 포로가 된 남베트남군

 

• 공수사단과 레인저부대를 제일 취약한 9번 도로 북쪽에 운용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이 부대들은 대 게릴라전에서 효과적으로 작전할 수 있도록 편성되고 장비된 경보병부대로서 적의 보병, 전차, 포병 합동공격에는 취약한 부대이고 이러한 전투경험도 없었다. 정규전 능력이야 별 차이가 없겠지만 그래도 제1사단이 북쪽에서 운용되었다면 더 효과적으로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람(Lam) 군단장도 3월 초에야 이 사실을 인지하였으나 그때는 어떤 조치가 불가능하였다.

• 남베트남군은 자기 능력대로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했어야 했다. 공중기동작전 같은 것은 미군에게나 가용한 작전이고 미군 항공화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작전은 지양하여 남베트남군의 능력대로 적과 대적하여 전투를 했더라면 비록 패배하였다 하더라도 좋은 경험을 얻어 베트남화에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군의 항공지원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그들이 제1차 베트남전쟁 시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던 방식대로 험준한 지형과 악천후를 이용하여 효과적인 재래식 전술을 구사하였다. 미군이 폭격을 하거나 근접항공지원을 실시할 때 남베트남군 기지에 접근하여 이를 회피하는 방식은 케산(Khe Sanh) 전투에서 습득한 방법이었고, 헬기 격추를 위한 대공사격 방법은 진일보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피해가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북베트남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인명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남베트남군과의 1:1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혼전이 된 상황을 보여주는 작전지도

 

반면에 남베트남군 지휘부의 심리적 타격은 컸다. 미군이 베트남화의 표본부대라고 하는 공수사단, 해병사단, 제1사단이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허겁지겁 작전지역에서 철수하게 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 미군항공력의 반 이상이 총동원되어 지원한 결과이다. 남베트남군 병사들도 그 엄청난 항공화력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공격을 가하는 북베트남군에게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 작전 후 남베트남내의 1971년도 전투는 소강상태로 환원되고 미군 철수는 가속화되었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는 전쟁터가 아닌 미 국내와 사이공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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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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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리야스필 | 작성시간 13.05.21 손실이 반절이라니..ㅎㄷㄷ 하네요.
    그나저나 군보급품에서 쌀이 보급으로 안나오는것은 언제부터인가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1 지금도 쌀은 중요한 군보급품 아닌가요? 동양권 군대에서 쌀은 앞으로도 중요한 보급품이 될겁니다. 쌀이 보급품에서 빠진다는 얘기는 쌀을 대체할 가공식이 나와야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손실이 반절이라 해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및 미군의 손실은 내용이 다릅니다. 북베트남은 주로 인력의 손실이 많다면 남베트남과 미군은 주로 장비의 손실이었습니다. 그건 양쪽의 작전 교리가 다르기 때문이겠죠.
  • 답댓글 작성자이리야스필 | 작성시간 13.05.21 아. 질문이 잘못됬네요. 이때까지 취사방식이 일본군처럼 솥에다 밥짓는 방식이었나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21 네, 간혹 미리 쪄서 물만 부어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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