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협정으로 휴전이 되었다고 하나 남베트남 국민들은 이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온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오직 남베트남만이 패배자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지역과 주민장악 쟁탈전이 계속되어 곳곳에서 도로가 차단되며 각지의 송전선이 절단되는 등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사회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남베트남 경제를 지탱하던 달러가 없어졌다. 그렇게 풍성하게 지원되었던 물자도 끊어졌다. 미군이 철수하자 미군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실직되었다. 오일쇼크로 유가가 4배나 뛰었다. 어민들은 고기를 잡아봐도 배의 기름값도 안 되었고 미국이 준 경운기, 트랙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물가가 65%나 뛰었다.
그래도 북베트남보다 물자는 풍성하였고 생활은 윤택하였다. 남베트남 군인들은 군복, 군화와 양말, 철모를 착용하였지만 베트콩들은 폐타이어를 잘라 손으로 만든 샌달을 신었고, 군복 같은 것은 없었다. 도시의 남베트남 여성들은 대개 몇 벌의 아오자이(베트남의 전통의상)를 가지고 있었고 남자들은 양복도 있었지만, 하노이 시민들은 검은 옷, 카키색 바지가 고작이었다. 아오자이는 고급관리들의 딸이나 가지고 있었다. 남쪽 사람들은 고기도 많이 먹었으나 북쪽사람들의 부식은 소금이 고작이었고, TV, 냉장고 따위는 생각도 못할 처지였다.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문명의 이기는 인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명의 이기는 이에 상응하는 정신문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그 풍성과 편리함에 젖어들면 더욱 더 그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것을 잃었을 때는 쉽게 좌절해 버린다. 누구나 이 풍성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온갖 부조리가 생겨나고 추구한 것을 성취하지 못한 자는 불만과 원망이 쌓여 사회는 분열하게 되는 것이 개발도상국들의 통례이고 남베트남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분할통치 시에 더욱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더욱 극치를 이루었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와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남베트남 사람들은 가난에 눈을 뜨게 되었고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되든 나 혼자만 잘 살면 된다는 변질된 개인주의까지 사회에 풍미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 많이 가지려는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남베트남 사회의 부정부패는 모든 사회계층에 만연되어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남베트남 항공사 사장 구엔 탄 트룽(Nguyen Tan Trung)은 티우(Thieu) 대통령의 친구였고 티우의 딸이 그의 며느리였다. 도쿄,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꼬냑, 담배, 가전제품 등의 사치품을 가득 실은 남베트남 항공사 항공기가 비엔 호아(Bien Hoa)의 공군기지에 먼저 착륙하여 승객들이 창문으로 보고 있는 가운데 짐을 하역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으로 날아갔다.
이와 같은 많은 물품을 구매하는데 소요되는 달러를 국내에서 모두 바꿀 수는 없었다. 홍콩에는 남베트남 피아스타를 다른 은행보다 좋은 조건으로 달러로 환전해 주는 은행이 있었다. 이 은행은 중국이 운영하였고 이 피아스타는 북베트남을 거쳐 남베트남 내 베트콩들에게 들어갔다. 그들은 암시장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였고 기업을 인수하여 이익을 남겨 다시 베트콩 자금으로 쓸 수 있었다.
전장에서 소총부터 포병화기의 탄피, 파괴된 탱크, 항공기, 트럭 등의 고철은 굉장한 이권이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국제 철강가격은 계속 오름세에 있었다. 미국도 이 고철은 통제하여 본국으로 수송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헬기가 이를 즉각 후송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남베트남군이 수집하는 고철은 군용차로 항구로 운반되어 공해상에서 거래되었다. 이 이권에는 리롱탄(Ly Long Than)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리롱탄은 사이공 실업계의 거물이며 그의 부인은 티우의 부인과 의자매였으며 남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려면 필히 알아야 할 인물로 통하였고,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에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30만 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하여 호화생활을 하였다.
구엔 반 티우의 아내
고위관리도 예외일 수 없다. 예를 들어 경제장관 팜킴곡(Pham Kim Ngoc)은 대만에 8백만 달러의 현금통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민담당 부서의 뇌물은 유명하여 1966년도에 10,000달러면 병역을 면제받고 해외유학을 갈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이든 어떤 직위에 있든 뇌물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경찰의 묵인 하에 약국이나 바, 기타 유흥업소에서 미군과 남베트남인에게 마약밀매가 공공연하게 성행하였다.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가장 고가의 직책은 사이공 촐론(Cholon) 지구 경찰서장으로 1970년도에 1300만 피아스타, 미화로 13만 달러였다고 한다. 성장(省長) 중에 가장 고가는 메콩 델타 지역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차우 둑(Chau Duc) 성장으로 8만 달러였다고 한다. 당시 남베트남에는 소가 부족하여 캄보디아에서 들여오고 있었는데 그곳을 통과하는 소에 두당 얼마씩 상납받으면 두 달이면 본전을 뽑고 나머지 기간 동안 거두어들이는 것은 순이익이었다는 것이다.
생명을 걸고 전투를 하여야 하는 적과 장비와 물자를 거래하는 한심한 일도 일어났다. 1973년에 티우는 구엔 빈 기(Nguyen Vinh Nghi)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제4군단장에 보직시켰다. 제4군단 지역에서 베트콩에게 계속 밀리자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에서 원인을 조사한 결과 25,000정의 소총과 8,000대의 무전기가 기가 재직하는 동안 베트콩들과 거래된 사실이 드러났다.
구엔 빈 기 중장
제3군단 예하 5사단, 25사단에서는 쌀, 장비가 부정 유출되어 조사 후 사단장이 해임되었다. 조사과정에서 유령군인, 꽃군인이라는, 지금까지 은닉되었던 사례가 드러났다. 유령군인이란 가공인물을 날조하여 병력에 포함시키거나 병적만 올려놓고 본인은 부대를 떠나 자기집에 있는 군인을 말하며, 꽃군인이란 고급장교의 사택에서 일을 보거나, 부업장소에서 일하거나, 군 예술대 등의 일을 하는 군인을 말한다.
부정과 부패는 남베트남인들의 생활방식이 됐을 뿐만 아니라 생존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은 불평과 불만, 상호불신을 초래하게 되고 빈부의 차와 연계되어 베트콩들의 선전이 그럴듯하게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유언비어가 계속 난무하였다. “티우 정권은 붕괴되고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나 다른 중도파가 나와 협상을 할 것이다.”, “키신저(Kissinger)와 레둑토(Le Duc Tho)가 퀴논(Qui Nonh) 남부를 기점으로 남베트남 분할에 합의하였다.”, “키(Ky)나 민 장군이 쿠데타를 한다”는 유언비어에 남베트남 사람들은 전전긍긍하였다.
엄청난 미군의 화력지원, 물량지원,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참전하였어도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이제는 남베트남 혼자서 해내야 하였다. 대동단결이 필요한 때였다.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전 국민의 힘을 결집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필요성이 논의도 됐었다. 그러나 교섭을 맡은 인사는 요구조건이 있었다. 특정직위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것이면 진작 이루어졌을 것이다.
카톨릭 신부 트란 후 탄(Tran Huu Thanh)은 동료신부들과 1974년 9월 “부정추방 국민운동”을 제창하고 7개항에 걸친 티우(Thieu) 대통령의 부정고발장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국이 들끓었다. 연일 데모가 계속되었다. 북베트남에서는 총공세 논의가 한창이어서 조기공세를 주장하는 강경파에게는 남베트남의 내부혼란이 더없는 호재였다.
트란 후 탄 신부. 남베트남 패망 후 북베트남에 의해 투옥된다.
1974년 10월 하순에 티우 대통령은 부정의 혐의가 있는 4명의 각료를 경질하고, 제4군단장 구엔 빈 기를 해임, 구엔 코아 남(Nguyen Khoa Nam) 중장으로 교체하였다. 또한 400여 명의 영관급 장교의 보직해임을 단행하였다.
구엔 코아 남 중장. 남베트남 패망시 4군단장으로 자결한다.
1974년 12월 말 푸옥 롱(Phuoc Long) 성 전투가 한창이고 북베트남에서는 최초 공세 지역과 공세 시기가 한창 논의될 때 탄 신부는 티우 대통령이 파리 협상의 대가로 7억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고 고발 제2탄을 내놓았다.
1975년 2월 3일 탄 신부는 고발 제3탄을 내놓았다. 군사적 상황이 점점 더 긴박해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티우도 가만있지 않았다. 탄 신부는 종교적 이유와 대내외 여론으로 어쩔 수 없었고 이를 보도한 5개 일간지를 정간시키고 18명의 언론인들을 체포하였다. 전국이 또 한번 들끓었다. 이미 총공세를 위한 북베트남군의 부대이동은 개시되었고 북베트남군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총참모장은 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하여 하노이를 떠나고 있었다.
반 티엔 둥
티우 대통령은 푸옥 롱 성 전투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두 쿠옥 동(Du Quoc Dong) 중장의 후임으로 제3군단장에 구엔 반 토안(Nguyen Van Toan) 중장을 임명하였다. 토안 중장은 티우가 신임하는 측근으로 제2군단장으로 있다가 1974년 12월에 부패장군이라는 여론의 압력으로 팜반푸(Pham Van Phu) 소장에게 인계하고 기갑사령관으로 있었다. 미국의 판단도 토안 중장은 남베트남군에서는 보기 드문 우수한 야전사령관이라는 것이었다.
두 쿠옥 동 중장. 공수부대 출신으로 남베트남의 숱한 쿠데타에 주역으로 참여했다.
구엔 반 토안 중장
팜 반 푸 소장. 남베트남 패망시 2군단장으로 자결한다.
이 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북베트남의 대공세가 있기 전 4개월여 동안에 4명의 군단장 중에서 3명이 교체되고 수백 명의 영관급 장교의 인사이동까지 겹쳐 남베트남군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는 가운데 귀중한 시간은 허송되었다. 대통령도, 관리도, 사회도, 군대도 모두 부패하였다는 체념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에다 미국의 원조는 격감되어 장비, 탄약, 유류는 줄어들고 북베트남군의 공세는 점점 더 가열되어 병사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전 국민은 불안에 떨면서 패배의식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