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도로 저격범 무하마드와 말보
2002년 가을 3주 동안, 워싱턴 DC 시민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은 1년전에 발생한 9.11테러의 악몽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공포에 떨어야 했다. 공포의 대상은 총격을 가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저격범 때문이었다. 일상에 종사하는 남녀와 아이들이 무차별하게 죽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 갑작스럽게 죽을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살인 행각이 이어지는 동안, 저격범은 자신을 쫓는 경찰을 자극하는 조롱의 메시지를 남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매일, 24시간 방송되는 뉴스 보도는 비극적인 사건을 소름끼치는 리얼리티 쇼로 바꾸어놓았다. 방송은 교활하고 무자비한 사이코 킬러에 대항해서 연방과 지역 경찰들이 총동원되는 사실적인 경찰 통속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격범의 최초의 일격은 가까스로 표적을 빗나갔다. 10월 2일 수요일 오후 5시 20분, 메릴렌드 주 아스펜 힐의 황량한 상점가 가게에서 총알은 진열장의 창문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계산대 점원인 앤 칩먼의 머리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32분 뒤 저격범이 공격을 또 감행했다. 이번에는 목표물과의 거리가 더 가까웠다. 대상은 제임스 마틴이라는 55세의 가장이었다. 그는 남북전쟁 열광자이며, 미국 해양대기국의 정책 분석가였다. 저녁 6시 4분 경 슈퍼마켓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던 그는 223구경 산탄총을 등에 맞아 죽었고 저격범의 첫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경찰은 다음날인 10월 3일 목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본격적인 위험과 마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약 2시간 동안 메릴랜드 주 교외의 각기 다른 지역에서 저격범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네 명이나 되었다. 39세의 정원사 제임스 부캐넌은 오전 7시 41분에 록빌에 위치한 자동차 대리점 바깥에서 잔디를 깎다가 죽었다. 54세의 인도 이민자 프렘쿠마르 왈레카는 8시 12분에 총에 맞았다. 그는 아스펜 힐의 주유소에서 택시에 기름을 넣던 중이었다. 가정 청소부인 34세의 사라 라모스는 8시 37분에 실버스프링의 노인주택지구에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했다. 끝으로 25세의 가정부 로리 앤 루이스리베라는 9시 58분 경 켄싱턴에 위치한 주유소에서 진공청소기로 자신의 자동차를 청소하다가 죽음을 맞았다. 희생자들은 모두 주요 도로 가까이에서 살해되었고, 정체불명의 저격범은 총알 한 발씩을 써서 살인을 저지른 뒤 아침 교통의 흐름 속으로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날 밤 범인은 또다시 나타났다.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는 아내를 돌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72세의 파스칼 샬럿은 밤 9시 15분경 워싱턴 DC 북서쪽의 자기 집 근처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까지는 범행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결국 버지니아 주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또 다시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수공예 가게 앞에서 자동차에 짐을 싣고 있던, 두 아이를 둔 43세의 어머니를 공격했다. 총알은 그녀의 등을 꿰뚫고 왼쪽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이 여성은 운 좋게 살아남은 소수에 해당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역들은 삽시간에 공포에 빠져들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거나, 차량에 가스를 채운다든지, 잔디를 깎는 등의 단순한 일상조차 아주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대규모의 범인 수색 작업을 조율하고, 경찰서 바깥에 진을 친 언론들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역할까지 맡은 것은 몽고메리 카운티의 경찰서장 찰스 무스였다. 무스 서장은 메릴랜드 주의 학부모들에게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안심을 시켰다. 무스는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이번 사건이 학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어떠한 첩보도 없습니다. 희생자들은 모두 성인입니다. 범행 현장은 학교와도 떨어진 거리인데다……학생들은 안전하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그러나 무스 서장의 침착한 발언에 앙심이라도 품은 듯, 10월 7일 월요일 오전 8시 9분에 우등생인 13세 소년 아이런 브라운이 메릴랜드 주 보위의 중학교 앞에서 총에 맞았다. 혹시라도 저격범이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불쌍한 인물이어서 극악한 범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했다면, 경찰이 학교 운동장에서 찾아낸 단서는 그러한 의심을 여지없이 몰아냈다. 경찰은 죽음을 묘사하는 타로 카드 한 장을 발견했는데, 카드 뒷면에는 손글씨로 ‘나는 신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 후 2주 동안, 경찰은 ‘타로 카드 살인범’으로 별명이 붙은 사악한 저격범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범인은 여전히 아무 일 없이 총격을 벌였다. 살인범은 거의 불가사의한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힘과 우월성에 대한 과대망상적인 그의 확신은 더욱 부풀어 오른 것이 분명했다.
10월 9일에서 10월 22일 사이에 총에 맞은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로 디자인 엔지니어인 53세의 딘 해럴드 마이어는 버지니아 주 매나사스의 베틀필드 수노코 가스 충전소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자녀가 여섯인 53세의 케네스 브리지스는 버지니아 주 프레데릭스버그의 주유소에서 죽었다. FBI분석가로 두 아이의 엄마인 린다 프랭클린은 버지니아 주 폴스 교외에 있는 할인점 주차장에서 죽었다. 플로리다 출신의 37세 제프리 호퍼는 버지니아 주 애쉬랜드의 스테이크 식당 바깥에서 부상을 당했다. 35세의 버스 운전수 콘래드 존슨은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 근처에서 빈 버스에 올라탄 채 서 있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이 기간 동안 저격범은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는 식으로 경찰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남겼고, 또 은행 계좌에 천만 달러를 입금하라며 공갈을 치기도 했다. 만약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체 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조언과 함께 ‘당신네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든 위협을 받을 수 있다.’라는 소름끼치는 경고까지 덧붙였다.
한동안 방송에는 권위자, 프로파일러, 자칭 전문가들이 잔뜩 몰려나와서 살인범의 특징에 관해 대단한 억측을 늘어놓았다. 그 대부분은 상당히 부정확했다. 저격범이 사악한 10대 게임광으로 사격 게임으로 실력을 연마한 뒤 실제 살아 있는 표적을 노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별 수사대 저격수 출신이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범인이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일 가능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격범을 정확히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도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가학적인 욕망에 이끌리고, 남을 죽이는 것에서 순수한 쾌락을 느끼는 조디악 같은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면 막다른 지경에 이르러 끝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것이 분명한 만행을 개시한 (베르사체의 살인범)앤드루 커내넌 같은 경우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범인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저격범은 FBI프로파일러가 예측했던 ‘주도면밀한 백인 남성’이 아니었다. 범인은 41세의 존 앨런 무하마드와 그를 도운 17세 소년 존 리 말보, 흑인 두 명이었다. 이들은 수사관들이 애초부터 찾아다닌 흰색 트럭이나 밴이 아니라, 파란색의 오랜된 시보레 카프리스를 몰고 다녔다.
빈털터리인 이들 두 사람은 차에서 생활을 했으며, 차 트렁크에 작은 구멍을 내서 저격범의 이동기지로 사용했다.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3주 동안 저격범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을 당시 이 파란색 카프리스는 대개는 경미한 교통위반으로 여러 차례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경찰은 적어도 10번이 넘게 이들의 차량 번호를 경찰 전산자료에 조회했지만, 수상한 점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보내 주었다. 결국 경찰은 범인을 수색하던 동안에도 다 잡은 살인범들을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다는 이유 때문에 거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어쨌거나 사건을 해결한 것은 자칭 저격범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두 사람이 너무 우쭐댄 덕분도 있었지만, 경찰의 엄밀한 수사도 한몫 한 것이 사실이다. 저격범들은 과거 자신들의 범행 전력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냈다. 그들은 경찰서의 무스 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예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술 가게에서 벌어진 강도 살인 역시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자랑했다. 버지니아 주 애쉬랜드에서 이 전화를 두 번째 받게 되자, FBI는 앨라배마 경찰에 연락을 취했고, 그곳의 경찰들은 당시 범죄 현장에서 나온 증거품들을 다시 뒤졌다. 증거품 중에는 술 가게 근처에서 범인들이 떨어뜨린 총기 잡지가 있었는데, 이 잡지에서 나온 지문은 리 말보의 것이었고 그는 무하마드와 친한 사이였다.
수사관들은 이들 두 사람의 기묘한 관계를 조사했고, 두 사람을 즉시 긴급 용의자 명단에 올렸다. 또한 이들이 몰고 다니는 차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사건은 10월 24일 새벽 3시에 종결되었다. 메릴랜드 주 프레데릭의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에서 시보레 카프리스를 발견한 것이다. 지역 경찰 특수기동대, FBI 인질구조팀, 그 밖에도 주,연방 예비 방위군 등 소규모의 경찰 팀이 차량을 급습했고, 차 안에서 졸고 있는 용의자를 발견했다. 무하마드와 말보는 너무 쉽게 항복했고, 한 경찰관은 “그들은 호송되는 동안 내내 졸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사결과 나이 든 저격범 용의자는 전형적인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임이 드러났다. 존 윌리엄스가 본명인 무하마드는 세 살 때 암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그는 난폭한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주기적으로 매질했다. 무하마드는 변덕스러운 기질과 대단히 불손한 경향을 지닌 독불장군으로 성장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루이지애나 주방위군에 복무하면서 두 차례나 군사법원에 회부된 경력이 있었다. 한 번은 명령 불복종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하사관을 폭행한 것이 이유였다.
그는 상습적인 바람둥이여서 이 여자, 저 여자를 번갈아가면서 만났다. 여자친구를 임신시켜 아들을 낳은 뒤 다른 여성과 결혼을 했고, 1982년에 또 아들을 낳았다. 3년 뒤 부부는 갈라섰고, 그는 군에 들어갔으며, 이슬람 교로 개종해 무하마드라는 성을 얻게 됐다. 그는 9년 동안 군 생활을 했으며, 제1차 걸프 전쟁에 참전했고, 수류탄 투척병이면서 M16 전문 사격수의 자격도 얻었다.
이후 군에서 나온 뒤로는 하나도 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사업 계획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고, 두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199년 말, 실패를 거듭하던 무하마드는 갈수록 불안하고 난폭해지자 아내는 이혼 소송을 냈고, 남편에 대해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아냈다. 그 후 얼마 뒤 그는 자식을 셋을 데리고 카리브 해의 앤티가 섬으로 떠나 버렸다.
무하마드는 1년이 조금 넘게 그곳에서 위조한 미국 여권을 파는 등 수상한 방식으로 생활을 꾸리며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리 말보와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리 말보는 미혼모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서 강한 아버지 상의 인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무하마드는 더는 자식들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데리고 2001년 5월 미국으로 돌아왔고, 말보 역시 그와 동행했다.
무하마드가 미국에 도착한 지 석 달이 지났을 때 그는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내야 했다. 아이들은 보호 감찰을 받게 되었으며, 그해 9월, 아내가 아이들의 양육을 온전히 도맡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당장 워싱턴 DC의 교외로 이사를 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하마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삶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비정상적으로 오만한 사내는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는 자신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회에 대해 적개심을 품었다. 한편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삶을 조롱하는 듯한 잘난 중산층을 증오했으며, 기꺼이 군에서 익힌 기술을 써서 복수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 그를 존경한 조수가 그를 부추겨서 두 사람이 같이 병적인 증상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감응성 정신병’의 전형적인 사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