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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살인마]세계의 살인마 - 93. 프리츠 하르만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1.04.01|조회수3,640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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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끝내주시죠. 크리스마스 때는 천국에서 어머니랑 같이 있어야 하니깐."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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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10월 25일, 프리츠 하르만은 6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서로 사이가 안 좋았았다고 한다. 하르만의 아버지는 늘 술집에서 살았고,  성미가 까다로운데다 툭하면 사람들과 싸웠다고 한다. 그의 아내 요한나는 남편보다 7살 연상이었다. 결혼할 때 몇개의 집을 가지고 와서 경제가 급속도로 팽창하던 그 때에 남편을 부유한 시민으로 만들어주었다. 허나 요한나는 소박하고 약간은 둔한면도 있어서 남편의 계속되는 술과 외도에도 무시하는 걸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여섯번째 자식을 낳았을 때는 병에 걸려 12년동안 침대에 누워있었다 한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같은 이름인 아버지 프리츠는 권위주의적인 교육 스타일로 하르만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반대로 다정하게 키웠다고 한다. 모친은 그를 상당히 귀여워하여, 여자아이처럼 예절을 가르치고 인형을 가지고 놀도록 해서 남자아이와는 달리 나긋나긋하고 여성스러웠다고 한다. 덕분에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또 마마보이였던 하르만은 술꾼인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싫어하며 살아 온 것이다.


첫째 아들 알프레드는 속물적인 모습이 있는 중하위층 공장의 감독이 되었다. 둘째 아들 빌헬름은 아동성폭행으로 오랫동안 징역을 살았다. 3명의 누나는 결혼한 지 얼마 안되 이혼을 했고, 모두 매춘부로 전락하였다. 세 자매 모두 심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하르만은 아마 긴 시간에 걸쳐 둘째형에게 성적학대를  받아왔던 것 같다.)


하르만은 기계공 견습생의 수업을 마친 1895년 후부터 사관학교에 통학하게 되었다. 그는 운동도 잘하고 군인으로서 자질을 갖추었지만 지속적인 정신적 자아일탈, 또는 간질 등으로 결국 퇴학하게 된다.(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걸로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한다. 하나는 학창시절 내내 전시회에 참여한 것과 밤의 죽음이라는 창문에 손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늑대인간과 귀신을 불러내는 놀이를 누나와 했다는 것)


직장도 없고 아버지때문에 들어간 담배공장 일에도 열의가 없던 하르만은 근처 아이들의 성적학대에 열중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형사재판 도중 '교정할 수 없는 의지박약'이라는 인증을 받아 힐데스하임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직접적인 심적 외상이 되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하르만은 몇 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해 결국 스위스를 거쳐 1899년에 독일로 돌아온다.


1900년, 25살에는에는 군대에 징집되어 코르말에 배치된다. 거기서 그는 실신 발작을 일으켜 4개월간 감염전문 병원에 입원한다. 그는 해체성 정신분열증(정동변화가 두드러짐, 망상과 환각이 순간적임. 행위가 무책임하고 예측불가. 감정이 천박하고 부적절. 언어에는 논리가 없음.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이 있음. 청소년에서 청년사이에서만 진단됨.)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결국 28살 제대를 한다. 하노버에 돌아오자 양육비 문제로 아버지를 고소, 두 사람은 주먹다짐을 하고 만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자금을 빌려 바로 파산하게 될 생선집을 열게 된다.

 

가운데 중앙이 하르만


1905년에 하르만은 성적전파질환에 걸리며 이걸 계기로 주로 역에서 모여 사는 유랑자나 가출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성애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악당으로서의 하르만 범죄역사가 시작되어 17건 의 유죄판결에 이른 횡령, 절도, 불법침입, 장물아비를 행하였다. 그는 동시에 경찰 끄나풀이기도 했다.


제 1차세계대전 중에는 형무소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도둑질, 사기를 자주 쳐서였다. 최종적으로는 구시가지 환락가의 한 구석인 로테 라이에 거리의 다락방에 정착하였다.


1919년, 하르만은 동성애 관계를 통해 한스 그란스를 알게 되었다. 그란스는 20살이 채 되지 않는 소악당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앞으로 수년간 이어지게 된다. 

 

"나는 절대 일부러 그 젊은이들을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 내가 알았다면 난 울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소년들 위로 나를 던져 놓았고  목젖을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목을 졸랐다."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1919년부터 1924년에 걸쳐 하르만은 적어도 24명을 살해했던 것 같다. 하르만의 희생자는 하노버 중앙역에서 죽치고 있는 젊은 유랑자나 남창이었다. 하르만은 그들을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하여 남색행위중, 희생자의 목을 물어뜯어 살해하였다. 프리츠는 경찰에게 이런 행위를 '게임'이라며, 어떻게 소년들을 잡는지, 잠들게 하기 위해 많은 음식을 먹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이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프리츠는 피를 맛볼 때에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소문에서는 하르만이 희생자의 고기를 통조림에 담아 암시장에서 팔았다고 하지만 이걸 뒷받쳐주는 증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근처 여성이 레스토랑을 소유했고, 하르만으로부터 고기를 사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희생자 수는 앞서 24명이라고 나와 있지만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TruTV Crime Library에서는 24명이 아니라 27명으로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일본 잡지 마키 이쓰마에서는 재판기록상 28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하르만 자신은 적어도 48명은 죽였다고 호언했다.

 

"그는 나의 전부였다. 그러나 한스는 날 자주 비웃었고, 그럼 난 화나서 그를 밖으로 내보내곤 했다. 그러나 난 늘 다시 그에게로 뛰어가 데려오곤 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난 한스에게 푹 빠져있다'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하르만의 공범자이자 섹스 파트너였던 한스 그란스는 자선단체에 희생자들의 옷가지를 기부하거나 싸게 파는 모습을 보였다.(하르만은 중고 의복 판매상이기도 했다.) 체포 후,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중고 의복모두가 압수되어 전국 행방불명 십대 청소년 가족들에게 확인하기 위해 하노버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란스가 입고 있던 옷 또한 희생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만은 그란스가 잘생긴 소년을 죽이라고 꼬드기긴 했지만 그 이외에 살인에 관여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하르만은 '한스가 나에게 팔꿈치로 툭 밀면서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면 안하고는 못배겼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한스는 하르만의 '거칠고 역겨운 요구'를 들어주곤 했는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한스는 하르만을 자신의 지배 아래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한스는 고기가 부족하면 직접 부랑아를 데리러 나가는 등의 모습도 보였다.

 

"배를 두갈래로 가릅니다. 그리고 장을 물통에 넣지요. 그런다음 피를 다 뽑아내고 어깨 뼈가 부서질 때까지 뼈를 두드립니다. 그럼 이제 심장을 꺼낼 수 있지요. 폐, 신장을 꺼내고 잘라서 물통에 넣습니다. 뼈를 발라낸 살을 가방에 넣습니다. 대여섯번으로 일이 끝나는데 이것들을 화장실이나 인근 강에다 버리지요. 전 늘 이게 싫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제 욕정은 자르고 베는 그 공포보다  더 강했으니까요."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1918년 12월 23일, 하르만은 잘생긴 12세의 유랑아를 집으로 데려와 4일동안 동성애를 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침실에서 그 미소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소년에게는 어머니가 있어, 그녀의 탄원으로 행불자를 찾는 조사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목격자가 나타나고, 정육점의 하르만이라는 사람이 소년을 데려갔다는 게 판명된다. 형사는 하르만의 집으로 급습하여 하르만이 한 소년과 서로 동성애를 하는 장면을 잡게 된다. 하지만 그건 실종소년이 아니라 14세 정도의 미소년이었다. 결국 하르만은 핑계도 대지 못하고 외설죄 현행범으로 9개월 징역을 살게 된다.


하지만 경찰은 집 안을 수색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귀찮았는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미소년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경찰은 하르만이 다른 소년을 죽이고 그 잘린 머리는 스토브 뒤에 신문지로 싸여져 있다는 건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체 일부를 태우던 하르만의 가스 오븐


1919년 9월에 출소한 하르만은 자신의 집 가까운 곳에 새로운 상점을 열었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전쟁으로 집을 잃은 소년들이 차례대로 사라지게 된다. 하르만의 수법은 갈 곳 없어 역에서 자는 소년을 경찰인척 잠을 깨우게 하여 미모를 살펴본다. 그러다 마음에 든 소년이 있으면 밥을 먹여주겠다. 침대를 제공해주겠다. 하며 집으로 데려오는 식이었다.


그는 50여명을 살해했다하지만 세계대전인 상황에서 어떻게 확인할 방법도 없고 자신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숫자는 요원하다. 하지만 그는 10살부터 24살까지 잘생겼다하면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살인행각이 계속해서 숨겨져 왔던 것은 아니다. 그는 경찰의 끄나풀덕분에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한번은 그의 가게에 았던 손님이 카운터 아래에 있는 통을 보게 된다. 그 통에는 고기덩어리가 있었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털이 난 인간의 엉덩이였다. 놀란 손님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조사도 하지 않고 돼지고기라며 일축해버렸다.


결국 1924년 5월에 잡히게 되는데, 체포가 된 계기는 하르만이 라인 강에서 버렸던 4개의 두개골이 하류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로 조사하던 조사관은 미소년을 미끼로 하여 하르만이 걸려들게 한다. 미소년을 막 덮치려하던 찰나, 경찰이 들어닥치고 외설죄 현행범으로 체포. 하르만 집을 수색하게 된다. 경찰은 실종자들의 옷가지, 유품, 핏자국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는 다시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강 하류에는 계속해서 사체 뼈들이 쌓이게 된다. 총 23명 분이었다.
 

하르만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다락방


"한스 그란스는 부정의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경찰의 실수와 나의 복수심때문에.. 당신들이 한번 그란스의 입장이 되어보시죠. 그는 하나님의 실존성과 정의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겁니다. 나 때문에... 한스 그란스가 나와 나의 복수심 그리고 인간성을 용서해주길"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그의 재판은 구경거리가 되어 독일 주요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첫 사건 중 하나였다. 당시는 연쇄살인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아서, 대중과 보도기관은 이 사건을 표현할 말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늑대인간' 또는 '흡혈귀'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동시에 '성적 사이코패스'라고도 불리워졌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진 하르만의 잔혹성과는 별도로 독일사회를 뒤흔든 불편한 진실은 경찰의 수사방법이었다. 하르만은 다른 범죄자를 조사관에 넘긴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다. 하르만이 구속될 때까지 경찰은 찾고 있던 연쇄살인범이 그 들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던, 넘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던 인물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노버에서 열린 하르만의 재판

 

"가끔, 사람을 죽인 후에. 전 미친 곳은 아니었지만 사관학교에 집어넣은 걸 탄원합니다. 만약 그란스가 정말 날 사랑했다면 날 구해줄 수 있었을 겁니다. 날 믿으세요. 난 아프지 않아요. 단지 가끔 웃기게 변할 뿐이죠. 나중에 제 머리를 잘라주십쇼. 그러면 한순간에 끝나고 전 안식을 찾겠지요."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하르만은 1924년 12월 19일 유죄판결을 받는다. 다음은 하르만의 재판에서 있었던 일화이다. 하르만은 경찰의 끄나풀이어선지 여러 비밀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판사는 하르만을 호되게 몰아붙이진 않았다고 한다. 하르만은 방약무인에다가 고귀한 체 했지만 방청인들에게는 이상하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르만은 처음 재판에서 '왜 이렇게 법정에 여자가 많이 들어왔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판사는 사과하듯이 '아니, 어떻게 여자만 들어오는 걸 막겠나' 하였다 한다. 또 다른 건 하르만에게 '이 소년도 행방불명인데 기억이 있느냐'며 사진을 보여주자, 흘끔 쳐다보고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그딴 더러운 남자를 누가 먹겠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오만한 모습이었지만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재미있었나 보다.

 

"너희들은 날 죽이지 못해. 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래, 난 너희들 안에서 영원히 거할 거야. 그리고 이제 너희들은 직접 너희들을 죽이겠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해. 한스 그란스는 결백하다고! 그래? 그럼 너희의 양심은 어떤데?"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재판 후 프리츠 하르만의 모습


결국 그는 1925년 4월 14일 이른 아침에 하노버 지방 재판소의 형무소에서 길로틴 형에 처해졌다. 들리는 설에 의하면 사형직전 긴 고백문을 적었지만 그건 후회나 회개가 아닌 살인이 얼마나 즐겁고 쾌락적인 것에 대한 것이었다 한다. 그리고. 길로틴의 칼날이 떨어지기 전에 '이건 나의 결혼식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란스는 24건의 살인 중 하나를 교사했다는 죄목으로 같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란스의 무죄를 증명하는 하르만의 수첩을 열람 하게 되어 2심에서는 12년의 금고형이 처해졌다. 그란스는 형기를 다 마친 후 1975년에 죽기까지 하노버의 릭링겐에서 살았다.


처형 후 하르만의 머리는 뇌 구조를 조사하기 위해 과학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하르만의 머리는 현재 괴팅겐의 의과대학에 보존되어 있다. 또 뇌에서 잘라낸 4개의 단편이 뮌헨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건은 독일에서 사형,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자에 대한 처벌, 경찰의 수사방법, 동생애등 여러 의견을 일으켰다.

 

"난 장바닥에서 죽길 원한다.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야 할 것이다. '여기 학살자 하르만 잠들다."
-법정에서, 프리츠 하르만 

하르만 희생자들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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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임용관 | 작성시간 11.04.02 살인마치곤 굉장히 오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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