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26일 저녁 7시 반경, 경남 의령군 궁유면 의령경찰서 궁유지서 소속 우범곤 순경이 궁유지서 무기고에서 카빈총 두 자루와 실탄 144발을, 또 부근 예비군 무기고에서 수류탄 8발을 각각 탈취하였다.
그는 탈취한 무기를 들고 궁유면 토곡리 시장통과 궁유우체국 및 인근 4개 마을의 민가로 뛰어다니며 무차별 난사, 주민과 우체국 교환수, 집배원 등을 살해하였다. 먼저 그는 지서 앞 시장에서 수류탄 1발을 던졌다. 그리고는 근처 궁유우체국에 들어가 근무 중인 교환수 등을 향해 카빈총을 난사하여 세 사람을 숨지게 하였다. 밖으로 나온 우범곤은 수류탄 폭음소리에 놀라 집 밖으로 달려 나온 주민들을 향해 다시 카빈총을 난사하였다. 그 자리에서 34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숨을 거두었다. 그 뒤 그는 마을 뒷산으로 달아났다가 저녁 9시 30분 경 그가 살던 압곡리 마을에 나타났다. 우범곤은 이 마을의 전00(56세) 집에 들이닥쳤다. 전00는 벌써 잠자리에 들어 있었고, 옆방에는 우범곤의 동거녀인 전00과 그녀의 어머니 최00 등 마을주민 5명이 놀러와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다. 이 때 우범곤은 입에 담배를 물고 양손에 각각 카빈총을 1정씩 든 채 안쪽을 향하여 “여기 전 양 있나?" 하고 물었다. 그 소리에 방 안에 있던 전00과 그의 어머니 최00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우범곤은 “다 죽여 버린다"며 카빈총을 그대로 난사, 현장에서 4명이 즉사하고 전00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다. 인기척 소리가 그치자 우범곤은 뒤이어 마당에 수류탄 1발을 까서 던져 놓고는 인근 평촌리 마을로 내달렸다. 자정 무렵 이 마을 서00는 이웃 초상집에 문상 갔다가 오는 길에 우범곤과 마주쳤다. 우범곤의 범행을 전혀 모르고 있던 서00는 수류탄과 카빈총으로 무장한 그를 보고 “밤중에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간첩이 나타나 비상이 걸려 나왔다. 밖에 박 순경이 있다"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 때 함께 있던 주민 박00(45세, 피살)가 “수고 많다. 술상을 가져오겠다."며 술상을 차렸다. 우범곤은 “쥐꼬리만 한 봉급에 총각 신세라 순사 짓 못해 먹겠다."며 신세 타령을 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한00(53세, 피살)가 “실탄도 없는 것 같은데 무슨 비상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우범곤은 곧바로 한00와 박00에게 총을 쏘아 숨지게 했다. 우범곤은 다시 이웃 평촌리로 건너가 서00 집에 들이닥쳤다. 그는 다짜고짜 서00 일가족에 총기를 난사, 그의 부인과 아들을 죽였다. 자신은 27일 새벽 5시 30분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사건후 관들을 옮기는 모습
유족들의 오열
사건 후 정부합동조사반은 이 사건이 상부에 보고도 늦고 출동도 늦은데다 진압마저 미온적이어서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며 00경찰서장 최00 경정을 구속하는 한편, 관계자 수 명을 직위 해제시켰다. 아울러 치안총수인 내무장관이 인책 사임하였다. 국회 내무위에서 야당 의원들은 이 사건이 단순한 치안문제가 아니라, 보고 체계와 무기 관리 등 당국의 치안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며 내각 총사퇴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춘구 당시 내무차관을 단장으로, 이강종 총경 등 경찰관 13명으로 기획단을 구성하여 치안행정의 미비점을 점검하고 이를 토대로 경찰행정의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경찰행정 개선방안’을 발표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경찰의 사기진작과 기강 쇄신을 통한 경찰조직의 활성화를 꾀한다는데 그 초점을 두었다. 이 개선방안에는 지파출소 운영비 및 대민 활동비를 대폭 인상하는 등 지파출소직원에 대한 수당을 현실화시킨 점이 두드러진다. 이 시점을 배경으로 「경찰공무원법」이 대대적으로 수정되어 「국가공무원법」의 특례를 규정하는 단일법으로 개정되었다. 그리고 1983년 4월 경찰공무원 임용령을 개정하여 경찰채용시험에 고졸이상이라는 학력제한 규정을 두었으며, 종합적성검사를 추가하여 인성검사 및 정밀신원조사를 통한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규정을 추가하였다. 또한 경과를 일반특기와 전문특기로 분류하여 전문특기자에게 계급정년 연장 등 혜택을 부여하였다. 그 외에도 승진제도를 개선하였고, 신임순경 교육을 8주에서 24주로 연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