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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중일전쟁 종전후 중국의 친일부역자(한간) 처벌은 어떻게 진행되었나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15|조회수643 댓글 0

중국에서 흔히 매국노는 "한간(漢奸)"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한간이란 청조시절 한족이면서 지배층인 만주족에게 빌붙어 같은 한족을 밀고하는 사람을 일컬는 말에 나온 것인데 민국시대이후 민족과는 상관없이 외세에 빌붙어 모든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자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말이 되었죠.  

 

우리가 매국노라면 바로 이완용이나 을사5적을 떠올리듯, 중국에서 한간이라고 하면 왕정위를 의미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중일전쟁기간 왕정위의 남경괴뢰정권(정식명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이지만 장개석정권과 구분하기 위해 남경괴뢰정권 또는 왕정위정권이라고 부름)에 가담한 모든 친일부역자들을 통칭하는 것이죠. 

 

남한의 경우, 해방이후 정치적 혼란과 이승만의 독재, 한국전쟁을 거치며 친일부역자에 대한 처벌 자체가 흐지부지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친일파출신들이 정재계와 군부, 관료계층 등 사회 전반의 핵심으로 포진함으로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90년대말에 와서야 친일파 청산문제가 새삼 거론되었으나 이미 해방이래 50년간 기득권계층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높은 국민적 열망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친일파 청산 문제는 갈길이 결코 순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제 식민지였던 시기 일본의 침략에 시달렸다가 2차대전의 승리로 승전국의 대열에 오른 중국의 친일파 청산, 즉 한간 처벌 문제는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사실 중국 학계의 한간 재판에 대한 연구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민감한 주제이며 우리만큼이나 연구가 미진한 실정입니다. 따라서 한간으로 얼마나 체포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얼마나, 어떻게 처벌되었는지 그 정확한 통계조차 없으며 자료 역시 매우 불충분합니다. 비록 불충분한 자료지만, 그래도 당시 상황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도록 언급해 볼까 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한다면 국민정부이건, 중공측이건 한간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국민적인 열망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국공내전에 있습니다. 종전직후부터 시작된 국공의 정치적, 군사적 충돌로 인하여 한간 처벌은 한낱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쌍방은 경쟁적으로 피점령지의 회복에 나섰고 한간의 체포와 처벌 역시 뒷전이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이들을 신속하게 체포하고 처벌하기 위한 행정, 사법체계의 미비입니다. 일본의 항복은 당초 중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갑작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원래부터 장개석정권은 일종의 과도기적인 의미가 강했고 중국의 거대한 국토의 대부분은 여전히 청조시절의 반봉건적인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근대적인 행정, 사법체계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이었죠. 게다가 일본의 오랜 침략으로 국가 체제와 기반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재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간 재판은 완전히 혼란과 문제점 그 자체였으며 국공양측 모두 과거사 청산에 목적을 두기보다는 정권의 정치적, 정략적인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국민정부의 한간의 처벌에 대한 법률은 1937년 8월 23일 "징치한간조례(懲治漢奸條例)"가 처음 제정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제5조에서는 한간에 대한 정의와 함께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하였고 이와 함게 한간에 대한 은닉자와 자수자, 재판 절차 및 한간의 재산 압류와 몰수에 대한 것도 명시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중일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한간은 사법이 아닌 군법에 의해 처벌되었으며 한간으로 체포된 자의 대부분도 간첩행위자였습니다. 44년 11월 "특종형사안건소송조례"가 제정되어 군인을 제외한 한간은 사법기관이 맡는 것으로 바뀌었으나 한간의 범주와 체포, 처벌에 대한 관련 법률은 여전히 미비한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자 친일괴뢰정권에 가담했던 한간들에 대한 체포는 군사위원회 산하 조사통계국("군통국" 또는 흔히 "남의사"라고 불리는 조직으로 사실상 장개석 직속의 비밀경찰)이 맡았습니다. 대립이 지휘한 군통국은 장개석의 승인을 받아 한간을 체포하기 시작했으나 종전 3개월까지는 매우 지지부진하였고 오히려 한간들이 피점령지에서 그대로 행정, 사법, 치안의 임무를 맡은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왕정위정권에서 행정원 부원장이자 재정부장이었던 주불해는 국민정부군이 진입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상해 치안 총지휘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군통국은 9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한간 체포에 들어가 10월 3일까지 체포된 한간만도 4,692명이었습니다.

 

이어서 11월에 "처리한간안건조례(處理漢奸案件條例)"가 제정되었고 12월 6일에는 "징치한건조례"을 개정합니다. 여기서 괴뢰정부, 단체, 조직에 직접 가담하거나 직접 가담하지 않았지만 일본에 직, 간접적으로 협조한 행위를 한 자가 한간으로서 처벌의 대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형량에 대해서도 규정되어 있었는데 친일정권의 최고수장과 성장급은 사형, 부장(우리의 장관에 해당)은 무기징역, 차장(우리의 차관에 해당)은 7~15년, 국장은 3~5년, 그 이하는 2년 6개월의 유기징역이었습니다.  

 

한간처벌의 90%이상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또한 형량과는 상관없이 가족의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자금을 제외한 전재산이 몰수되고 종신 또는 일정기간 공민권이 박탈되었습니다. 국민당원과 현직 관리는 본형의 1/3을 가중처벌하였습니다. 이 규정에 의해 과거 국민당원이었던 왕정위정권 주석 진공박, 광동성장 저민의, 진벽군(왕정위의 와이프) 등은 가중처벌되었습니다. 덧붙여 괴뢰정권에서 복무한 군인은 이와 별도로 군법에 의해 처벌되었으며 괴뢰군의 수뇌부는 군사법정을 거쳐 모두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한간에 대한 공소권은 검찰에 있었고 법원은 검찰에 의해 기소된 자에 한해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민 또는 단체에 의한 한간 고발은 46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한다"라고 훈령을 발표하여 소송의 지나친 확대를 억제하였습니다.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일제히 한간이 고발,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47년 말까지 한간죄로 기소된 자는 30,828명, 불기소 처분이 20,718명, 무죄로 선고된 자는 6,152명, 형을 선고받은 자는 15,391명이었습니다.(여기에 군인으로 기소된 자는 제외) 또한 해외로 도피한 자는 외교채널을 통해 해당국 정부에 체포 및 송환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주는 단지 11건만 기소되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인 상황상 만주에서는 국민정부의 통치권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주국 황제 푸이만 해도 소련군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어 소련 하베로스크에 억류된후 국공내전이 끝난후인 50년 8월에야 중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당시 국민정부의 사법제도는 3심제였으나 한간 재판은 2심제로 진행되었습니다. 각지에서 체포된 거물급 한간의 재판을 위해 수도 남경에는 "수도고등법원"이 설치되었습니다. 증거주의를 통한 심문과 기소, 사법기관을 통한 공개재판이 원칙이었고 피고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와 재판결과에 불복해 재심을 신청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일뿐 제대로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 주불해와 같은 고위인사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경우 비공개로 진행되는 예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1심에서 사형을 판결받은후 피고의 불복여부와 관계없이 바로 다음주에 사형이 집행된 예도 많이 있으며 재심신청은 대부분 기각되었습니다. 44년 11월~47년 2월까지 재심청구 521건중 422건이 기각되었고 83건만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변호사의 선임권도 실제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재판 역시 형식적으로 진행된 반면, 국민 정부내 고위 정치가나 관료의 변호는 종종 재판에서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관련 법률의 미비함과 사법기관의 부패함으로 인해 거물급이 아닌 일반 한간의 경우 뇌물에 따라 임의로 죄를 감형하거나 무죄로 석방되는 예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게다가 국공내전이 격화되고 국민정부군이 남쪽으로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한간 재판과 처벌은 점점 흐지부지되었고 장개석이 하야한후 대리총통이 된 이종인은 49년 6월 무기징역 이하의 모든 형사범과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명령하여 많은 한간들이 고작 2년도 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선고받은 거물급은 모두 형이 신속하게 집행되어 진공박과 저민의를 비롯해 선전부장 임백생, 내정부장 매사평, 북경 유신정부 수장 양홍지 등은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주불해는 당초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장개석은 그가 자수하고 비밀리에 중경정부에 협력한 공이 있다며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지만 48년 4월 감옥에서 병사하였습니다. 

 

한편, 정식 사법제도에 의한 재판을 고수했던 국민정부와 달리 중공은 공개된 공공집회장소에서 군중에 의한 일종의 인민재판을 실시하였습니다. 당시 "국가안의 국가"였던 중공의 사법기관은 국민정부와는 철저하게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자체적인 법제도가 미비한 탓에 국민정부의 형법을 그대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는 변호권이 없었고 재판관은 일반인들중에서 선임되었습니다.  

 

국민정부가 행정, 사법제도의 미비함과 부정부패한 모습을 보였다면 중공은 지도부 스스로 "아량"을 베풀었습니다. 공산당 중앙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득이하게 한간이 된 자는 제외하라"라는 식으로 아주 애매하고 소극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인민재판은 정치적인 "쇼"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제외되었습니다. 남경 괴뢰군은 물론이고 만주로 진입한 공산군은 만주국의 관료들과 군경 30만명을 자군으로 편입시킴으로서 이들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국민정부의 치하에서 복역중이다 공산군에게 장악된 지역에서도 많은 한간들이 풀려났습니다. 중공에 의해 기소되어 형을 받은 사람에 대한 정확한 통계나 국민정부에 의해 처벌되거나 방면된 자들이 향후 중공치하에서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습니다.(많은 이들이 같은 방식의 재판을 거쳐 처벌된 것은 틀림없습니다만 필요에 따라 면죄되거나 사면된 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진벽군의 경우 모택동이 손문의 미망인인 송경령을 통해 사면을 제안했으나 스스로 거부하여 옥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국공이 공통적인 것은 같은 중국인에 대해서는 "한간"이라며 비교적 혹독하게 처벌한 반면, 일본인 전범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거의 처벌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본인의 의지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국공내전기간 수만명의 일본군인들이 국공 양측에 고용되어 싸웠습니다. 일본에 대한 공식적인 보상 역시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국공내전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중국에서 한간들에 대한 처벌은 철저하지 못한채 사실상 흐지부지되었습니다. 국공내전이 끝난후에도 쌍방은 더 중요한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남북한과 월남, 필리핀 등 다른 아시아국가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처벌이 유야무야된 것과 상관없이 한간들이 복권되어 권력층에 재진입한 사례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한간들에 대한 처벌은 철저하지 못했다고 해도 일본과 한간들에 의해 장악되었던 정치, 경제, 사회 권력구조는 청산될 수 있었습니다. 정치인과 군인들에 대한 처벌은 혹독했던 반면, 경제인과 문화인에 대한 처벌은 상대적으로 관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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