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은 처칠과 루즈벨트에게 전후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군정 실시에 중국의 참여와 대일배상문제를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국공내전의 발발과 양안의 분단으로 그 어느 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후 미국은 주중대사인 헐리를 통해 중국정부에 “연합군의 일본점령과 무장해제, 치안유지를 위해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장개석은 이를 승락합니다.
당초 파병 규모는 5천명규모의 1개 여단이었으나 미국은 적어도 1개 정규사단의 파병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최종적으로 결정된 부대는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제67사단이었습니다. 이 부대는 원래 장개석 직계부대인 제2사단을 재편한 것으로, 장비와 인원, 훈련도에서도 비교적 양호했으며 병력은 약 1만4500명정도(3개 보병연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되었으며 사단직속으로 전차대대, 공병대대, 통신대대가 있었음)였습니다.
일본으로 출발하기전 상해에서 훈련중인 제67사단 사전파견대 대원들
양국의 합의에 따라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중국군의 주둔관할을 동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 중부지방의 아이치현을 중심으로 시즈오카현, 미에현 3곳으로, 그리고 사령부는 아이치현의 현정부가 있는 나고야에 두기로 결정합니다. 나고야는 동경, 오사카와 함께 일본 3대 대도시중 하나로 대규모 공업지대가 있었습니다.
1946년 5월 27일, 연합국 일본관제위원회 중국대표인 주세명중장을 비롯한 대표단과 제67사단장 대견소장이 이끄는 점령군 사전파견대가 B-24 폭격기를 타고 상해에서 일본 카나가와현의 아츠키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점령군으로서 완전 무장한채 일본땅을 밟음으로서 전승국의 위엄을 보였습니다. 5년전 일본에게 온갖 굴욕을 당하던 그 시절과는 입장이 완전히 바뀐 것이죠. 중국역사상 중국군이 처음으로 일본땅을 밟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중국군의 관할지역으로 정해진 3개현
연합국들간에 대일배상청구에 대한 협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현지에서의 강제징발이나 약탈은 금지되었고 주둔비용은 각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동경에서 맥아더를 만난 대견은 중국군의 점령비용을 미국이 부담해 줄 것과 병력과 장비를 수용하기 위한 차량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 맥아더는 일단 미국이 비용을 부담한후 나중에 양국정부가 정산하는 방식으로 정하고 또한 수송차량에 대해서도 미군의 잉여물자에서 양여키로 합니다. 그리고 제67사단의 수송에 대해서도 합의를 끝냅니다.
나고야에 도착한 대견 소장과 중국군 사전파견대
그러나 이 계획은 돌연 취소되었고 오히려 빨리 귀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바로 국공간의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죠. 이미 주일점령군의 파견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고 제67사단은 46년 7월 산동전선에 투입되었으나 공산군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괴멸되고 맙니다.
한편, 당초 일본에 대해 전범국가로서 매우 가혹한 처우와 아예 “농업국가”로 전락시킬 계획이었던 미국은 소련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국공내전,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아시아와 일본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수정합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가 지연되면서 일본이 항복한지 6년후인 51년 9월 8일에야 비로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강화조약에 서명하는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주도한 미, 영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의 조기 부흥이 필요하며 일본경제에 가중한 부담을 주는 배상은 안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당초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무배상방침”을 주장했으나 다른 연합국들의 강력한 반대로 “배상의무는 있되, 지불능력이 없으므로 현물, 침몰선의 인양, 재외자산의 몰수 등으로 대체하고 연합국은 배상청구권과 점령비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조약안을 수정합니다.
샌프란시스코강회회의에는 총 51개국이 참여했으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강화조약안에 다른 연합국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소련, 폴란드, 체코는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여 48개국이 조인하였습니다. 게다가 인도처럼 불참한 나라도 있었고 한국과 태국, 몽골 등은 아예 회의에 초청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배상금을 받은 나라는 버마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남베트남 4개국뿐이었고 나머지 국가들은 배상이 아닌 차관과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합니다.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중국은 “전승국”의 일원임에도 강화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49년말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개석정권은 대만으로 쫓겨났고 중국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장개석의 중화민국이라는 2개의 정부로 쪼개졌습니다.
미국과 프랑스는 중화민국을 중국의 정통정권으로, 소련과 영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함으로서 어느 쪽이 중국을 대표하는지 서로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따라서 이 문제는 중일양국이 “자율의지”로 알아서 해결할 문제로 남겨둡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이하 “대만”)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협상에 들어가는데 저자세인 것은 오히려 전승국인 대만이었고 큰소리치는 쪽은 패전국인 일본이었죠.
장개석으로서는 대륙을 장악한 모택동정권에 대해 자신들이 “중국의 정통정권”임을 인정받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서둘려야 했습니다. 당시 일본 전권대사였던 카와다 이사오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국민은 중국과의 강화조약에 모두가 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조약내용은 가능한 일본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형식으로 했으면 합니다.”라고 고압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중국이 배상청구를 포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대만은 전승국의 입장이면서도 당시 처한 정치적인 상황상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일본이 중공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섭내내 일본에 질질 끌려다닐수 밖에 없었고 결국 장개석은 “중국의 관대한 도량”을 내세워 “대일배상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라고 선언합니다.
1971년 7월 헨리 키신저의 극비 방문으로 미중간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중국의 정통성은 대만에서 중공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 역시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1972년 9월 27일 다나카 수상이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하면서 중일 양국은 국교정상화에 합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은래는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합니다.
주은래와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
이것은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으면 중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대대수 중국 인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는데, 주은래는 “장개석은 우리보다 먼저 배상을 포기했다. 공산당의 도량이 그들보다 넓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또한 일본인들이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긴 시간에 걸쳐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중일 양국민의 우호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과 상반되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당시 중공은 소련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미, 일 등 서방 자본주의 세계와의 관계 개선이 시급했습니다. 따라서 모택동과 주은래는 일본과의 신속한 국교정상화를 위해 가장 껄끄러운 문제인 배상금청구의 포기를 결정한 것이었죠. 주은래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철저한 대중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할 것을 지시합니다.
국공내전으로 중국은 둘로 쪼개졌고, “두개의 중국” 모두 정치적인 필요로 일본앞에서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마저 스스로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공이건, 대만이건 그 과정에서 국민들과의 합의나 설득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었습니다. 단지 소수 권력층의 일방적인 결정과 대중에 대한 “사후교육”만이 있었을 뿐이죠. 그 시절의 고통을 직접 겪어야 했던 대다수 국민들은 완전히 배제된채 여기에 어떤 불만이나 반대도 할 수 없었고 그 결정을 뒤엎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출처] [중일전쟁] 중국의 대일전후처리와 배상문제, 어떻게 처리했을까.|작성자 욱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