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에 있는 저 동네가 당시 대접전이 있었던 만주리市입니다.>
흔히 중소국경분쟁이라고 한다면 60년대에 있었던 소련과 중공간의 분쟁을 연상하게 됩니다만, 장학량이 만주를 통치하던 1929년에도 대접전이 있었습니다.
결과부터 말한다면 소련의 일방적 공세에 장학량의 동북군의 대참패로 끝났고 소련군 800여명 사상자(전사 150명)에 비해 동북군은 전사자만 1700명에(사상자 4천) 7천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괴멸적 타격은 만주사변에서 일본군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중대한 원인중의 하나가 됩니다.
발단인 이른바 "중동로사건"은 당시 소련이 운영하던 북만주의 중동철도를 1929년 7월 10일 장학량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소련 영사관 폐쇄, 외교관 추방에서 비롯됩니다.
중동철도는 1896년에 청-러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흑룡강성 만주리(만저우리)까지 이어지는 철도입니다. 남만주의 장춘과 대련까지 이어지는 지선도 있지만 이는 일본 관동군이 관리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참패를 당한후 러시아와 비밀 동맹을 맺었고 유사시 러시아 극동군의 수송을 위해 양국은 我亞은행을 설립한후 철도부설권을 주고 중동철도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후 소련의 외무장관 카라한은 이른바 "카라한선언"을 합니다.(1919년 7월 15일)
이는 구 차르정권에서 치외법권 등 중국에 대해 획득한 모든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일종의 우호 제스쳐였습니다. 이에 따라 장작림은 소련이 혁명으로 세력이 약화된 것을 이용해 중동로 회수를 추진합니다. 그러나 소련 혁명이 끝나고 안정되자 소련정부는 다시 만주에서의 이권을 요구했고 중동로에 대한 권리를 회수합니다. 이런 상황은 지속적으로 봉천정부와 소련간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장학량이 동북역치를 선언하고 중국이 통일되자, 중국 곳곳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고 이전에 군벌들이 외국에 멋대로 나누어 주었던 이권과 주권 회복 운동이 일어납니다. 장학량도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소련에 대해 강경하게 나갑니다.
그런데 장학량의 움직임은 모순적이었는데 소련에 대해서는 강경 입장이었지만, 오히려 만주에서 훨씬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해서는 저자세에 친일적이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권 자체가 전적으로 일본의 지원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중동로에 대해 강경하게 나간 것도 사실은 친일 반민족주의자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모험이었습니다.
그리고 7월 7일 북경회담에서 장개석의 승인과 지지를 받은후 10일에 전격적으로 중동철도를 접수하고 소련인 간부, 직원들을 추방합니다. 장학량은 상황을 낙관했고 소련이 외교적 항의는 하겠지만 군사적 행동까지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북정부-소련간 교섭이 결렬되자 8월 6일 소련은 이른바 바실리 블류헤르장군휘하 "특별원동군"을 조직했고 만주 국경일대에서 대규모 무력시위를 합니다. 그리고 당초 3만명정도의 병력은 급속도로 증강되어 개전당시에는 8만명 규모로 확장되며 전차부대와 해공군까지 포함됩니다. 이에 비해 장학량의 동북군은 병력에서는 약 30만에 달했으나 제대로 무장을 갖춘 부대는 일부에 불과했고 또한 상당한 병력을 남만주에도 배치하고 치안유지에서 사용해야 하는등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만주리에서 양측의 전력 대비는 다음과 같습니다.
소련군 : 병력 8만, 야포 200문(중포 십수문), 중기관총 294정, 경기관총 268정, 항공기 35기, 포함 5척, 무장상선 4척, 숫자미상의 전차(T-18)
동북군 : 병력 10만, 야포 135문(모두 75mm이하 경포), 중기관총 99정, 항공기 5기, 르노-17 경전차 수대, 경장갑차, 강방함대(포함 2척, 무장상선 4척)
소련군 경폭기기 편대(폴리카포프 R-1)
소련군의 T-18 경전차
보시다시피 병력은 비슷했으나 화력은 소련이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소련은 7월 20일부터 무력시위를 시작하는데 포격과 상선 나포, 국경 침입 등의 도발을 빈번하게 시행합니다. 중국도 장개석이 결사항전을 지시하고 전국에서 반소시위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구하면서도 물자, 자금 지원만으로 한정하고 병력 지원은 거부합니다. 중앙군이 동북으로 들어올 경우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죠. 이것이 당시 중국의 정치적 딜레마였죠.
9월 19일 드디어 소련은 국경을 돌파하여 전면적으로 침공을 개시합니다. 이는 통일중국이 외국과 벌이는 첫번째 전쟁이었으나 양쪽 모두 선전포고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10월 12일 소련 아무로 소함대는 항공기의 엄호하에 흑룡강-송화강 합류지점 삼강로에서 동북군 강방함대를 공격해 섬멸합니다.(삼강로 전투) 동북군은 포함 1척, 무장상선 3척이 침몰되고 전사 250명, 포로 150명의 피해를 입습니다. 동시에 소련 상륙전 부대의 공격으로 라하스스 요새도 함락됩니다. 소련은 단지 전사 5명, 부상 24명에 불과했습니다. 10월 30일에 강방함대의 잔존전력도 모두 전멸합니다. 10월 31일에는 제2방어선인 부금이 함락되어 하얼빈마저 위협받게 됩니다.
11월 17일에는 중소 국경에 있는 만주리방면에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합니다. 동북군 제 17 여단 7천명은 전차, 항공기를 동원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에 하루밤낮 전투끝에 완전히 괴멸되어 여단장 한광제도 전사합니다. 또 15여단도 포위되었고 여단장이 도주하자 항복합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1500명이 전사했지만 소련군은 123명이 전사했을뿐입니다. 이후에는 북만주의 동북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저항을 포기한채 퇴각합니다. 11월 20일 만주리와 흥안령을 점령한후 소련도 더이상의 공격은 멈춥니다.
만주리 점령후 소련군이 획득한 제15여단 독전대의 깃발
이런 상황에서 장학량은 10월 22일부터 비공식적으로 소련에 교섭을 타진하고 있었고, 12월 1일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합의합니다. 장학량으로서는 더이상 싸울 능력도 없었고, 사태가 더 확대되는 것도 원치 않았으며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탄지경이 됩니다.
동북군의 패배원인은 양측의 압도적 전력 차이도 있었지만, 동북군 내부에서도 장학량과 구파간의 심각한 갈등, 장학량 스스로의 모순 등이 있었습니다. 중앙의 지원없이 소련과 대결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임에도 장학량은 중앙군의 개입을 거부했습니다. 또 설령 요청했다해도 당시 남경정부의 상황으로는 염석산, 풍옥상등 군벌들의 반장전쟁으로 대소전 개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막상 전투가 벌어졌을때 장학량은 직계군은 투입하지 않고 방계군인 흑룡강군과 길림군만 싸웁니다. 이로 인해 흑룡강군과 길림군은 완전히 괴멸됩니다. 또 장학량과 대립관계였던 길림성장 장작상은 만주리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던 한제광, 양충갑의 구원요청을 무시합니다.
어쨌든, 장학량의 라이벌이던 구파의 흑룡강, 길림세력은 완전히 와해되고 장학량은 동북에서 확고한 세력을 갖추게 됩니다.
중국 전체로 본다면 참담한 패전이었지만 장학량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죠. 이후 장학량은 중원대전을 이용해 화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에게 뒷통수를 맞고 기반을 통째로 잃은채 서안으로 쫓겨간후 서안사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소련측 총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최초 소련연방 원수였지만 나중에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고문당한후 처형되죠.
현재의 만주리. 러시아인들이 많아 러시아 도시같다는 느낌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