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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중일전쟁당시 중국군 전구에 대해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01|조회수686 목록 댓글 3

37년 7월 7일 노구교사변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 20일 장개석 군사위원장 주재로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최일선에 해당되는 동부 중국에 대해 아래와 같이 5개 전구를 구성합니다.

 

제1전구 : 사령관 장개석(이후 정잠, 위립황, 호종남 순으로) 관할구역 하북성, 산동성 북부

              관할부대 : 제1집단군(송철원), 제2집단군(유치), 제14집단군(위립황)

              총 25개사단, 2개 보병여단, 2개 기병사단 등

 

제2전구 : 사령관 염석산,  관할구역  산서성, 찰합이성, 수원성

              관할부대 : 제6집단군(양애원), 제7집단군(부작의), 제18집단군(모택동, 주덕)

              총 27개사단, 3개여단, 3개기병사단 등

 

제3전구 : 사령관 풍옥상(이후 장개석)  관할구역 남경, 상해, 강소성 및 절강성

              관할부대 : 제8집단군(장발규), 제9집단군(장치중), 제10집단군(류건서), 제15집단군(진성),

                             제19집단군(설악), 독립 신4군(엽정, 공산계열)

              총 24개사단, 6개여단, 기타 편제에 속하지 않는 공산유격부대 등등

 

제4전구 : 사령관 하응흠(이후 장발규)  관할구역 복건성, 광동성

              관할부대 : 제4집단군(장정문), 제12집단군(여한모)

              총 9개사단, 2개여단, 해남도내 요새수비부대 등

 

제5전구 : 사령관 장개석(이후 이종인)   관할구역 산동성 남부, 강소성 일부

              관할부대 : 제3집단군(한복구), 제5집단군(고축동)

              총 27개사단, 3개여단 등

 

 

또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후방의 사천, 운남, 귀주 등 서남지구에 대해서는 별도로 4개의 예비군으로 지정하여 이들은 필요시마다 병력을 전국의 각 전선에 파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쪽 동네 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 가족과 떨어져 수천km나 먼 곳으로 행군해야 했으니 그 고생은 말할 것도 없었죠. 더욱이 대부분의 주요 철도가 일본측에게 함락되고 병참이 어려워지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적인 행정제도와 징병제도가 없었던 중국군은 한번 입대하면 제대는 고사하고 휴가라는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근대적인 의료제도가 없는데다 부상병을 후송하거나 돌봐준다는 개념자체가 없어서 죽거나 중상을 입으면 매정하게도 아무데나 버려질 뿐이었죠.

 

 

독일식 35년형 철모를 쓴 중국군을 표지 모델로 한 라이프지.

※ 사진출처 :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119741

 

이후 전황이 악화되고 전선이 확장되면서 이 전구는 관할구역과 주둔부대를 포함해 여러차례 조정되는데, 37년 9월에  제6전구가 신설되었고, 다시 10월에 제7전구가 신설되었다가 다음해 38년 2월에는 제6, 7전구가 폐지되는 대신 제8전구가 신설되었고 38년 6월에는 제9전구가 추가됩니다. 전쟁 마지막까지 총 12개의 전구가 신설됩니다.

 

위키백과에서 찾은거라 정확도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주시길...ㅋㅋ 중일전쟁기간 중국군에 대한 자료를 찾아도 워낙 자료가 드물어서리....

 

※ 자료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E6%8A%97%E6%97%A5%E6%88%A6%E4%BA%89%E6%88%A6%E5%8C%BA

 

ps.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중국의 戰區라는 것이 전국을 골고루 나눈 것이 아니라 주로 북중국과 동해안지구입니다. 내륙은 포함되어 있지 않죠. 장개석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그전에도 여러번 있었지만 국력의 한계와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적당히 먹고 떨어지지, 중국 자체를 통째로 먹으려고 들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장개석은 이번에도 북경과 상해를 먹은후 타협을 제안하리라고 생각하지 수도인 남경까지 진격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는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본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지 관동군의 독주에 휘둘려 급작스레 개전하여 병참과 전쟁수행을 뒷받침할 수가 없었습니다. 뭐, 일본정부가 그정도로 허수아비인줄은 몰랐겠지만 어쨌든 그 오판에 대한 결과는 본인이 책임져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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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10.02 저 그림에 나오는 전구는 싹 다 털린 셈이군요 ㄷㄷ
  • 작성자이 지옥같은 행성 | 작성시간 13.10.02 만약에 만약에 일본이 북경과 상해먹고 평화협정 제안했으면 중국에서 응했을까요? 관동군도 평화협정에 만족해서 조용하다는 가정하에...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02 실제로 노구교 사변 이후에 일본은 재중독일 대사 트라우만을 통해 중국에 이와 비슷한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에 응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일본 스스로 그 제안을 철회해버리죠. 이미 만주사변부터해서 일본은 중국에게 '여기까지만이다'라는 식으로 사기를 쳤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본의 제안을 진실된 것이라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협상을 벌이기는 했겠지만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결실을 맺긴 어려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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