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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노구교사변당시 장개석의 대일방어전략에 대한 고찰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03|조회수363 목록 댓글 0

1937년 7월 8일 북경 광안문 서남쪽 26km 떨어진 곳에 있는 노구교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중국군 진지에 대해 일본군이 사격을 개시함으로서 8년간의 중일전쟁이 막을 엽니다. 여기에다 한달후인 8월 13일 오전 상해에서도 일본 해군 육전대가 중국군 진지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함으로서 전쟁은 화북에서 화동으로 확대되죠. 이는 상호간의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화북과 화동에서의 중국군의 전략적 상황은 매우 불리한 상태였습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만주 전역을 장악한 일본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열하를 점령하고 장성을 돌파하여 내몽고와 차하르, 직예성, 수원성 등 화북 전역에 국지적 도발을 지속적으로 감행합니다. 그리고 탕구협정과 하메협정(하응흠-우메즈), 진덕순-도히하라협정 등으로 중국군은 직예성(현재의 하북성) 북부지역과 차하르성에서 철수하고 이 지역을 비무장화하는 굴욕적인 협정을 맺음으로서 화북에서 대일 전략에 큰 장애가 됩니다.

 

당시 중국과 장개석 정권이 갈수록 강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채 양보를 거듭한 것에 대해 "장개석의 소극적 자세와 친일매국주의"라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실상 중국의 정치, 군사적 상황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20년대말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외형상 북벌에 성공하여 중국을 통일했으나 실상 군벌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서가 아니라 단지 타협의 산물에 불과했습니다. 국민정부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곳은 남경과 상해를 비롯한 양자강 하류지역 일부에 불과했고 화북은 기존의 동북계(우학충), 서북계(송철원, 손연중), 염계(염석산, 부작의) 등의 봉건적인 군벌들이 난립한채 형식상으로만 중앙정부에 복종할뿐 실제로는 자신들의 왕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공산군 토벌에 집중하고 있던 장개석은 송철원, 우학충, 부작의 등 이들 비직계 화북군벌들에게 일본의 도발에 대해 서로 협력하여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협력은 고사하고 눈앞의 이해관계때문에 서로 대립하였고 화북의 친일분자들은 오히려 기밀정보를 일본에 넘기는등 훼방을 놓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장개석의 남경정권의 군대(중앙군)가 일본의 침략을 빌미로 자기 세력권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지 않을까 불신하였습니다. 즉, 화북군벌들은 일본의 침략보다 자기 이익이 우선이었습니다.

 

또한 반장성향의 광동, 광서군벌들이든, 중국 공산당이든 입으로는 "내전중지"와 "항일"을 부르짖었지만 실상 일본군과 싸울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단지 모든 책임을 장개석에게 돌리고 그의 하야를 주장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이 할 수 있는 전략은 최소한의 양보로 일본군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일단 위기부터 넘기며 시간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협정을 지키지 않고 1935년 10월 수원성을 침공하자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을 일단 멈춘후 탕은백의 제13군을 비롯해 중앙군 20만명을 북상시켜 부작의(수원성장, 제59군 군장)와 연합해 이들을 격파하죠. 또 마데 재팬 물품에 대해 관세를 대폭 올려 경제적인 타격을 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갑니다.(일본 역시 본국과 만주국에 수입되는 중국산 제품에 대해 막대한 관세를 물립니다.)

 

서안사변에서 장학량, 양호성이 장개석에게 "내전중지, 항일"을 주장한 것은 실상 명분에 불과한 것이며 이들의 실제 속셈은 자신의 무력기반을 공산군과 전투로 무익하게 소모하고 이를 빌미로 중앙군이 자기 영역에 들어와 지반을 빼앗기고 개털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에게 이런 불신을 장개석 본인이 심어준 것도 어쨌든 사실이지만요.

 

당시 언론과 국민 여론은 같은 중국인들끼리의 내전보다 일본의 침략에 강경대응하여 주권을 지키자, 라는 것이었으나 실상 국민당내의 가장 강경한 반장측 인사들조차도 공공연히 "일본한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노구교사변직전 북경은 실상 동서북 3면이 일본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고 남쪽의 노구교만이 중국측(송철원의 제29군)이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노구교는 북경과 내륙을 연결하는 평한철도가 통과하고 있었고 이곳을 사수해야만 유사시 병력을 북경으로 증원할 수 있었죠.

 

일본군의 도발로 양자는 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당초 전투는 중대단위의 소규모 국지전에 불과했는데 휴가중 보고를 받은 송철원은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전면전으로 비화된 것은 아니니 가급적 충돌을 피하고 필요하다면 적당히 양보하여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라고 매우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따라서 다음날인 9일에 양자는 일단 전투를 중지한채 "모든 책임은 중국측이 진다"는 것으로 타협을 합니다. 송철원 역시 더이상 일본이 도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계엄령 해제와 전투 태세 완화, 철도의 정상 운행을 지시하죠. 이것이 얼마나 안이한 착각인지는 곧 깨닫게 되죠.

 

한편, 강서성 노산에서 군사훈련을 참관중이었던 장개석은 사건 당일 노구교사변에 대한 보고를 받고 매우 신속하게 자신의 직계인 유치와 서영창에게 중앙군 1개사단을 화북으로 즉시 파병하고 개봉, 정주에 주둔한 2개사단에 대해서도 출동 준비를 명령합니다. 다음날에도 추가로 화북에 주둔한 손연중의 제26군 2개사단과 제40군 등을 북상시켜 송철원의 제29군을 지원토록 합니다. 또한 전면전 확대에 대비해 군의 재편성 및 선전포고를 준비토록 하죠.

 

7월 17일 각 당파와 단체의 대표, 유명인사들 150명이 참여한 여산회의(단 공산당측 대표로 주은래가 여산에 왔으나 직접 참석하지는 않음.. 뭐하러 왔는지.)에서 장개석은 다음과 같이 연설합니다.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고비에 이르렀다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희생만이 있을뿐이며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단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응전이지 싸움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육군중앙부는 강경노선으로 선회하여 추가 파병과 전쟁의 확대를 결정합니다. 당초 노구교사건은 철저하게 준비된 전쟁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지부대 몇몇 참모들과 지휘관의 독단으로 일어난 국지적 충돌에 불과했기에 육군중앙부에서는 참모총장의 명의로 관동군 참모부에 "즉각 확전 중지와 무력행사를 피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럼에도 7월 11일 수상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강경노선으로 바뀌어 병력을 추가 파병키로 결정함으로서 사실상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죠.

 

그럼에도 현지 책임자인 송철원은 사태의 확대를 막고 일본군을 자극하지 않도록 19일 북경성내의 방어물들을 철거하고 성문을 열어놓도록 지시합니다. 또한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북상중인 중국군을 보정 이남에서 정지시키겠다고 일본측에게 서약합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7월 22일 송철원에게 "대단히 위험한 짓"임을 경고하고 즉각 방어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하지만 송철원은 이것을 묵살합니다. 이런 양보에도 불구하고 7월 25일날 북경과 천진 주변과 북경 성문인 광안문에서 양군이 재차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일본측은 송철원에게 북경에서 당장 철수하라고 최후 통첩을 날립니다. 이것은 송철원보고 손털고 항복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죠. 그제서야 송철원은 더이상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7월 27일 방어태세를 갖출 것을 예하부대에 내리지만 이미 일본군은 본국과 조선, 만주에서 병력을 증원하여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침 북경과 천진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2일만에 북경, 천진일대는 일본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노구교사변직후 장개석은 일본의 화북 침공에 대응해 방어전략을 신중하게 검토합니다. 그 내용은 창현-보정방면의 병력을 북경으로 북상시켜 증원토록 하고 유치의 제2집단군은 창현-보정방면에 전개하여 이들을 지원토록 합니다. 또한 찰합이성으로 15개사단 및 9개 여단을 보내어 남하하는 관동군의 측면을 위협하고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평수철도를 방어토록 합니다.

 

당초 일본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단숨에 화북 전역을 석권할 계획이었으나 장개석의 신속한 대응으로 예상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중국군에서도 최정예중 하나인 탕은백의 제13군이 찰합이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북경 서북쪽에 있는 남구로 진격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합니다. 일본군은 제5사단과 혼성11여단을 동원해 탕은백군을 공격하지만 곧 교착상태에 빠집니다. 장개석은 이를 이용해 유치의 제2집단군을 북경방면으로 진격시키고 염석산의 산서군 및 송철원의 제1집단군, 탕은백의 제20집단군과 함께 남북에서 협공하여 북경 탈환을 꾀합니다. 또한 위립황의 직계군을 증원군으로 파견합니다.

 

그러나 화력과 제공권의 압도적인 열세로 8월 16일 남구가 함락되고 탕은백군은 고립됩니다. 결국 26일 탕은백은 막대한 희생만 치룬채 후퇴하죠. 이로 인해 중국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부작의, 유여명 등 수원군은 싸우지도 않고 철수합니다.

 

북경과 남구가 함락되자 장개석은 화북 방어계획을 수정하고 보정-창현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고 안양-제남선을 제2선, 낙양-정주-개봉-서주-진음을 제3선으로 하여 축차방어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정작 송철원, 한복구, 손연중 등 지방군벌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함으로서 방어작전은 무너지고 일본군은 손쉽게 석가장을 점령하고 평한철도를 장악하죠.

 

노구교사변이래 장개석의 지휘는 이전과 달리 매우 적극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피아간의 화력과 장비의 차이도 있지만 화북군벌들이 자기 전력을 유지하려고 중앙의 명령을 무시한채 제멋대로 퇴각함으로서 방어선을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철수를 상급부대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채 무단으로 철수하여 우군의 측면을 일본군에게 노출시켜 패배를 초래합니다. 격분한 장개석은 이에 대해 본보기로서 산동주석 한복구를 비롯해 40여명의 여단장, 사단장을 총살시키죠.

 

중국군은 전쟁기간동안 광범위한 공간을 활용한 종심방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는데 이는 중앙군, 지방군간의 격차가 큰데다 서로간의 협조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상황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전쟁전 단 한번도 통합된 야전 훈련을 해본 경험조차 없었죠. 따라서 각 방어선은 전략적 관점이 아닌 국지적, 전술적 관점에서만 운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중국군을 조기에 포위섬멸하는데 실패했고(큰 피해를 주기는 했으나) 주력을 보존한 중국군은 내지로 후퇴하여 지속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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