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남북당국회담이 보류됐다고 말했고, 우리 정부는 무산이라고 못박았다. 북한은 여지를 남긴 반면, 정부는 이런 식이라면 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내보였다. 무엇이 정부를 격하게 만든 걸까. 정부의 강경한 태도는 회담 무산 이유를 밝히면서 사용한 단어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장관급 VS 차관급, 이게 “굴종과 굴욕”?
청와대는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상대에게 굴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행태로 하는 것은 남북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격(格) 얘기를 했다. 정부가 기대했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북측 수석대표로 내보내지 않은 게 발단이 된 셈이다. 북한이 김양건보다 직급이 아래인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제시하면서,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남측 수석대표로 임명한 정부의 조치에 반발해 회담을 무산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차관급이라서 류길재 장관이 아닌 김 차관을 남측 수석대표로 내세웠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관례에 따라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통일부장관의 파트너로 내보내려 했던 것이다. 장관급 회담을 제안한 건 박근혜 정부다.
차관급을 수석대표로 내보내면서 남측에는 장관급이 나와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이 “굴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행태”란다.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과거 남북회담 모두 북한으로부터 ‘굴종과 굴욕’을 강요당한 채 진행돼 왔다는 얘기가 된다. 표현이 지나치고 독선적이다. 과거 정부의 노력을 이렇게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전 정부에게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역대 정부 노력 폄하하고 모욕한 박근혜 정부
정말 북한이 격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한 걸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차관급일까, 아니면 장관급일까. 이게 문제다. 차관급이 맞다면 정부의 주장이 그나마 설득력을 얻을 테고, 장관급일 수도 있다면 정부가 ‘정답’을 ‘오답’으로 처리한 게 된다.
1998년 6월과 2005년 5월에 열린 남북차관급 회담에서는 이번 북측이 수석대표로 내세운 조평통 서기국 국장보다 한 직급 아래인 서기국 부국장이 통일부 차관을 상대한 바 있다. 2004년부터 남북회담이 중단(2007년)되기 까지 남측에서는 통일부장관이 북측에서는 조평통 서기국장이 수석대표로 참가했다.
정부의 판단대로 조평통 서기국장이 차관급에 해당한다고 보는 북한전문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장관급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많다. 남북회담에 직접 참석했거나 북한을 다녀온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지나치게 형식과 격을 따진 나머지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평통 서기국장은 장관급일 수 있다”
북한은 우리와 체제가 크게 다르다. 직급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정확하게 견주어 볼 방법이 마땅하지 않을 정도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조평통 서기국장의 위상이 정부의 판단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코리아연구원 김창수 연구실장은 “조평통의 수많은 부위원장보다 서기국장이 알짜배이고 강지영 이전 서기국장이었던 안경호는 장관급 이상이었다”며 이번 북측이 내세운 수석대표 또한 장관급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고 밝혔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의 주장도 그렇다. 언론 인터뷰에서 2007년 방북 당시를 소회하며 이렇게 말했다. “2007년 평양에 가보니까 내각책임참사(장관급)가 당시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에게 보고를 하는데 매우 조심스러워하더라.” 북한내 위상으로 치면 조평통 서기국장이 장관급보다 높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전례를 보면 남측 통일부장관 파트너였던 북한의 내각책임참사가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아닌 부국장을 데리고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내각책임참사가 장관급이니 서기국 부국장은 차관급 쯤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서기국 국장은 차관급보다 높다는 얘기가 된다. 장관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격 타령’으로 국내외 여론 불리해지자 입단속 나선 청와대
통일부는 조평통을 남한의 민주평통에 해당하는 곳이며, 조평통 서기국은 민주평통의 사무처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통일부의 이런 견해에 반박하는 북한전문가들이 많다. 북한 체제의 특수성으로 인해 조평통의 권위와 위상이 민주평통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고 말한다. 김기남 당 비서나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 거물급들도 조평통의 위원장이 아닌 부위원장을 맡는데 그칠 정도다.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위원장을 맡아 왔다.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북한이 차관급을 내세우면서 남측에는 장관급이 나와야 한다는 억지도 모자라 회담까지 무산시켰다며 북측을 성토했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박 대통령의 말을 빌어 수석대표의 ‘격’이 맞지 않으면 회담의 진정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며 ‘격 타령’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산가족과 개성공단 기업인 뿐 아니라 시민단체와 많은 국민들까지 정부의 ‘격 타령’에 실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주장해온 신뢰프로세스의 첫 페이지가 고작 ‘격’으로 시작되는 거냐는 비난도 있다. 어쨌든 남북회담이 무산된 데에는 정부의 책임도 작지 않다.
<남북 실무자 접촉. '격 타령' 하다가 기회를 놓쳐버렸다>
신뢰프로세스인가 ‘격 프로세스’인가?
여론이 안 좋게 돌아가자 청와대가 긴장한 모양이다. 남북회담 무산을 놓고 “북한과 남한 모두를 비난하는 ‘양비론’은 결국 북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며 야당과 시민단체에 경고를 보냈다. 그런다고 정부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정부의 판단에 연습이란 건 없다. 정부의 정책은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조평통 서기국 국장이 차관급일까, 장관급일까? 둘 다 정답이다. 장관급일 수 있고 차관급으로 볼 수도 있다. 북한은 장관급으로 본 반면, 남한은 차관급이라고 판단한 것 뿐이다. 애당초 정부가 북측 파트너로 나오라고 했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최소 부총리급에 해당한다. 급하게 장관급 회담을 제안하면서 정부가 짚어야 할 부분을 간과한 게 아닌가 싶다.
이토록 ‘격’을 따지려 했다면 정부의 이번 장관급 회담 제안은 잘못된 것이다. 너무 시일이 촉박했다. 6일 북한이 회담을 제안하자 12일 장관급 회담을 열자고 응답했다. 그리고 9일 실무자 접촉이 있었다. 5년 동안 중단됐던 남북회담을 복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북측에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라서 '격'을 꼼꼼히 따질 테니 협조해 달라’라는 얘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왜 이렇게 조급증을 낸 걸까.
<남북 연락 전화 다시 불통. '격'이 먼저일까 '소통'이 우선일까?>
장관급? 차관급? 모두 정답, 정답을 오답 처리한 정부
북측에게 수석대표의 격과 관련한 정부의 견해와 주장을 설명하고 북측을 설득할 시간을 먼저 가졌어야 했다. 과거 관례를 몽땅 무시하고 대뜸 ‘격 타령’을 들고 나온 건 성숙하지 못한 처신이다.
기대했던 남북회담이 수포로 돌아갔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는 그렇다고 쳐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꿈에 부풀어 있는 이산가족들의 실망과 눈물은 어찌할 텐가.
조평통 서기국장을 장관급 혹은 차관급이라고 봐도 다 맞는 얘기다. 정답이 둘인데도 하나만 정답이라고 판단한 정부의 편협함이 아쉬울 뿐이다. 때로는 정답이 둘일 수도 있다는 유연성이 박근혜 정부에게 없다면 앞으로 남북관계는 험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자자손손 작성시간 13.06.13 신뢰는 믿는다는 말 아닌가요. 못믿었니 그냥프로세서
-
작성자dmsgkgh 작성시간 13.06.13 친일 매국노의 딸 애비 장물로 호의 호식하며 살아온 닭대가리 칠푼이의 한계다
-
작성자만정 작성시간 13.06.13 근혜왈 김정은 비서는 비서라는 직위가 낮아서 남북 정상회담 못한다고 할 것이다
-
작성자정겨울 작성시간 13.06.14 대통령의 감투를 박근혜에게 씌운 것은 국정원과 선관위가 백성인민들에게
훔쳐온 장물이 아니던가 그런 장물들이 믿음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