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www.fmkorea.com/6862178682
김원용 교수는 한국 고고학의 거목이다.
그와 그의 제자들이 학설을 내 한국사학의 기초를 잡고,
그것을 발전시키거나 반박해 가며
학계가 발전해 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김원용 교수에게도 컴플렉스가 있었으니...
교수님 그래서 발굴운 좋음?
금붙이들 발굴해봄? ㅋㅋㅋㅋㅋㅋㅋㅋ
ㅂㄷㅂㄷ
물론 김원용 교수가 중요한 문화재를
단 하나도 발굴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결코 아니다.
감은사 터, 양주 수석리, 서울 암사동 등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 모두 그에 의해 발굴되었다.
다만 발굴한 유적들의 특성상
당연히 화려한 문화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능력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는 상당히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발굴복이 없는 듯...
후학들에게 피눈물 흘리게 하는 훌륭한 기만과 함께,
60년대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금은보화를 발굴하고 날뛰는 꿈을 자주 꿔...
꿈에서나마 운 없는 학자의 소원을 푸는 거야...
그렇게 금은보화 발굴은
꿈에서밖에 이루지 못한 김원용 교수는...
1971년, 무령왕릉을 발굴한다.
? 꿈인가
5232점의 유물,
6점의 금으로 만든 국보와 함께.
? 이왜진
그렇게 겸손과 기만을 일삼던 대학자는
마침내 소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기자들 때문에 개판으로 발굴한 건 비밀
-끝-
댓펌
금붙이 발굴에 성공해서 싱글벙글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가져갔더니, 순금인가 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접었다폈다했다는 일화도 있음
싱글벙글 발굴하려다가 1박2일만에 발굴마치고
팔찌로 헬스하는 대통령 때문에 화들짝 놀라고
무령왕릉 저주받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죄다 안풀린 김원용 교수
1952년 경주 노서동 쌍상총, 1959년 감은사지, 1961년 양주 수석리, 1963년 광주 신창동, 1967년 서울 암사동, 1969년 부산 동삼동, 1971년 공주 무령왕릉, 1972년 화순 대곡리, 1973년 여주 흔암리, 1973년 경주 천마총, 1974년 경주 황남대총, 1975년 부여 송국리, 1976년 경주 안압지, 1979년 연천 전곡리, 1981년 양양 오산리, 1983년 서울 석촌동 고분, 1984년 춘천 중도, 1985년 서울 몽촌토성
이걸 다 이분이 발굴하심? 국사 교과서 적어도 10페이지는 새로 쓰셨네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