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글]][특집]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이용해온 혐오스러운 동맹 - 우크라이나에 있는 미국의 네오나치 동료들은 가장 큰 실수의 연속이다
작성자미네르바작성시간22.12.10조회수258 목록 댓글 0[특집]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이용해온 혐오스러운 동맹 - 우크라이나에 있는 미국의 네오나치 동료들은 가장 큰 실수의 연속이다
통일시대는 러시아투데이(RT)에 실린 토니 콕스 기자의 기사를 번역게재합니다. 기자는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유지해 온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세력과의 동맹관계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네오나치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미국의 민낯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자: 토니 콕스(Tony Cox). 블룸버그와 몇몇 주요 일간지를 위해 글을 쓰고 편집하는 미국 기자.
역자: 이승규.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 기자명:토니 콕스(Tony Cox)
- 입력 2022.11.29 08:31
[특집]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이용해온 혐오스러운 동맹 - 우크라이나에 있는 미국의 네오나치 동료들은 가장 큰 실수의 연속이다
-집단학살을 부추기는 사람부터 히틀러주의자, 급진 이슬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 세기 이상 혐오스러운 동업자들과 협력해왔다.
원문보기:https://www.rt.com/news/566262-americas-nazi-collaborators/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3월 소위 2차 세계대전의 동맹인 미국이 소련의 뒤에서 독일 나치와 협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분노했다. 실제로 일부 역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미국의 스파이이자 미래의 CIA 국장인 앨런 덜레스는 히틀러정권이 붕괴될 무렵 나치 무장친위대(Waffen SS) 장군 칼 볼프와 비밀회담을 가졌으며, 이때부터 본질적으로 냉전을 시작했다.
스탈린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는 히틀러정권의 흉악한 범죄 때문에 나치의 무조건적인 항복만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었다. 덜레스-볼프 회담이 알려지자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독일과 협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계속해서 거짓으로 말했다. 조지아 출신 장군인 이시모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서방 동맹국들이 소련을 봉쇄하고 붉은군대로 넘어갈 수 있는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공작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소련은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덜레스를 포함한 미국의 일부 인사들은 두 나라가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협력하는 동안에도 소련을 미국의 가장 큰 장기적 위협으로 보았다.
나치를 구하라
반세기 이상이 지난 후 마침내 기밀해제된 문서에서 확인되었듯이, 미국 정보기관들은 곧 1,000명 이상의 나치를 냉전 스파이로 고용할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은 이미 꼴사나운 동맹국들과 함께 러시아를 상대로 공동의 명분을 찾으려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이 잘 기억하고 있듯이, 미국은 1918년 볼셰비키 정부의 전복을 돕기 위해 (실패한 시도였지만) 러시아를 침공했다. 당시 미국은 백군의 반혁명분자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집단학살과 다른 살인적인 잔학행위와 같은 불쾌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세계 지도자들에게 자결과 외부침략에 반대하는 (앞으로의 세대에서 미국의 사리사욕에 따라서만 적용될 원칙인)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러시아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미군을 파견했다. 미국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 현재의 우크라이나사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선례를 만들 예정이었다. 행태가 분명했다. 즉, 러시아를 해치려는 미국의 불타는 열망을 공유하는 한, 미국은 (그들의 행동과 견해가 아무리 혐오스러울지라도) 누구와도 협력하면서 자유에 대한 도덕적 옹호자로 연기演技하는 것이다.
1945년 덜레스는 이전에 (SS와 게슈타포를 지휘했고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최고 책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오른팔이었던 볼프와 함께 협력했다. 볼프 장군과 그의 친위대 장교들은 흑기사단이라고 불렸는데, 북부 이탈리아를 연합군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이 거래는 독일의 완전한 항복을 불과 6일 앞두고 나온 것이라 미국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소련과 다른 동맹국들에게 불신의 씨앗을 뿌렸다.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검사들은 볼프의 편을 들고, 그를 주요 전범들의 명단에서 불가사의하게 삭제하고 그를 가해자가 아닌 나치 만행에 대한 "증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볼프는 교수형을 면했다. 덜레스는 볼프의 별장이 이탈리아 빨치산들에게 포위되자 볼프를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미 정보기관, 국방부, FBI는 전후 채용하고자 했던 나치전력자의 기록을 백지화해 주었다. 다른 경우에는, 악명 높은 전범들이 미국의 동맹국에 숨겨졌다. 그러한 미국에 유용한 악당 중 한 명은 클라우스 바르비였는데, 그는 비시정권 프랑스에서 게슈타포 장교로 있으면서 유대인과 저항군 전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여 "리옹의 도살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미국을 위해 점령된 독일에서 스파이로 일했고, 프랑스가 전범으로 재판에 세우기 위해 그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자 미국은 1951년 그를 볼리비아로 급히 데려갔다.
1983년 마침내 미국의 조사에서 밝혀졌듯이, 미국인들은 동맹국 프랑스에 바르비의 행방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미 육군은 파시스트 크로아티아 신부 크루노슬라프 드라가노비치가 운영하는 '랫라인(rat line)'*을 통해 바르비와 다른 반공요원들을 유럽에서 대피시키는 대가를 지불했다. 앨런 라이언 주니어 미국 수사관은 "미국정부가 형사고발로 수배 중인 사람을 보호하고 그의 탈법을 주선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일명 쥐구멍 라인은 바티칸 교황청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전범을 남미, 아르헨티나 등으로 피신시킨 작전을 말한다.
CIA는 많은 나치들을 직접 고용하는 것 외에도 전에 히틀러의 동부전선 최고 정보책임자였던 라인하르트 겔렌이 운영하는 대규모 첩보망을 도청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 독일장군은 전쟁범죄 혐의에서 기소면제를 받았고 그의 나치 동료들 중 일부가 체포를 피해 유럽으로 도망치는 것을 도왔다.
미국정부는 스파이활동 이상의 목적으로 나치를 고용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포함한 1,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그들의 전문적 기술로 냉전을 이기는데 돕게 하기 위해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으로 데려왔다. 예를 들어, 미 국방부는 로켓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을 그의 새로운 아내, 그의 부모, 그리고 그의 형제와 함께 미국으로 데려왔다. 독일에서 노예노동을 이용해 히틀러를 위해 V-2 로켓을 만든 폰 브라운은 미국 우주프로그램의 영웅이 됐고 디즈니 영화와 타임지 커버스토리의 소재가 됐다.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은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작전이다. 1945년 ~ 1946년까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한 나치 독일의 과학자 총 64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서 그 당시 독일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연구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모든 나치 이식이 잘 된 것은 아니다. 항공의학에 대한 경험 때문에 텍사스 군기지로 끌려간 콘라드 셰퍼 박사는 미군 관계자들이 그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해 독일로 재송환됐다. 작가 에릭 리히트블라우가 2014년 저서 '옆집의 나치(The Nazis Next Door)'에서 썼듯이, 미국인들은 셰퍼가 나치의 의학적 만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뉘른베르크 검사들의 주장을 기꺼이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의 '과학적 통찰력' 부족에 대해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 대 유대인
또한 나치들이 전후에 제3제국 하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던 바로 그 수용소들 중 일부를 운영했다는 일이 밝혀졌다. 조지 패튼 미 육군대장은 유대인 생존자들이 "해방" 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강제로 구금되었던 다하우와 베르겐-벨젠과 같은 미국 점령지역의 난민수용소를 책임졌다.
히틀러의 ‘죽음의 수용소’를 감독한 동일한 경비원들과 의학적 만행을 저지른 동일한 나치의사들 중 일부가 난민시설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수용소에서 소량의 식사를 먹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더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 암거래로 눈을 돌리자, 독일경찰이 슈투트가르트와 란츠베르크의 난민시설을 단속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이 보낸 수사관 얼 해리슨은 다음을 발견했다.
"우리가 유대인들을 말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나치가 그들을 대했던 것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
패튼은 2014년 11월 NPR과의 인터뷰에서 비판적인 보고서에 "분노했다"고 리히트블라우는 말했다. "해리슨과 그의 동료들은 그 난민들이 인간이라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라고 미국의 전쟁영웅은 그의 일기에 썼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동물보다 하찮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
페이퍼클립 작전의 과학자들처럼, CIA의 많은 나치 스파이들이 미국으로 옮겨졌다. 이 새로 만들어진 미국인들 중에는 북 코카서스의 총통이라는 별명을 가진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역 출신 체르케스인 체림 숩조코프와 독일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치정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아돌프 아이히만의 수석보좌관 오토 폰 볼슈잉과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리흐트블라우는 CIA 장교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소련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사람이든, 그의 나치 전력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를 선택할 것이다"고 썼다.
전쟁 중 유대인과 폴란드인의 대량학살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우크라이나 나치협력자 니콜라이 레베드는 1949년 미국으로 끌려왔다. 그의 배경은 이상하지 않았다. 미 육군은 그를 "유명한 가학주의자"라고 불렀고, CIA는 그를 "악마"라고 코드명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반소련 공작원으로서 아주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CIA는 몇 년 후 미국 이민당국이 레베드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자 그의 추방을 막았다. 레베드는 미국의 보호 아래 살다가 89세의 나이로 피츠버그에서 사망했다.
유용하고 그렇게 적이 아니다
J. 에드거 후버가 이끄는 FBI는 또한 나치 스파이와 정보원의 네트워크에 의존했고 기소와 추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라즐로 아그는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강제추방한 파시스트 단체인 헝가리의 화살 십자당*에 자신이 가담했다고 FBI 요원에게 인정했다. 아그는 많은 희생자들을 고문했고, 일부는 자신의 배설물을 먹게 하거나 그것을 부분적으로 묻힌 총검에 뛰어들도록 강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은 후버가 아그를 반공 정보원으로 영입했고, 이민관리들이 마침내 비자사기로 이 나치협력자를 기소하고 추방하려고 하자, 이 FBI 국장은 이 헝가리인의 자백에 대한 그의 요원의 증언을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화살십자당(Arrow Cross Party) 또는 화살십자당-헝가리주의 운동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헝가리의 정당으로 나치즘과 파시즘, 반유대주의를 주장했다.
'유용한 적들'의 저자인 역사학자 리처드 라쉬케는 "낮은 도덕적 기반을 취하기로 선택하면서 후버와 FBI는 살아있는 미국인들과 죽은 미국인들의 신뢰를 배신했다"고 썼다. 전범을 보호하는 기관의 "침묵의 음모"*는 미국인들을 "세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위선자들"로 만들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그 같은 살인자들 중 일부를 미국으로 환영하고 국가안보란 이름으로 처벌을 면하도록 도운 선출되지 않은 권력간부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침묵의 음모(conspiracy of silence) 또는 침묵의 문화는 무언의 합의에 의해 언급하거나 논의하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그룹이나 직업 또는 동료그룹같이 작은 규모의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한다.
후버는 또한 루마니아의 파시스트 철위대*를 이끌었고 후에 미국의 루마니아 정교회의 주교가 된 비오렐 트리파를 옹호했다. 트리파는 한때 미 의회에서 기도를 이끌었고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을 개인적으로 만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인연이 깊어졌다. 루마니아로 돌아온 트리파는 전쟁범죄 혐의로 궐석사형을 선고받았다. 후버는 트리파를 "냉전 풍경에 매우 바람직한 부분"으로 여겼던 닉슨을 설득하여 1955년 이 주교를 고발한 사람 중 한 명과의 만남을 취소시켰다.
*철위대(Iron Guard) 또는 철위단은 루마니아에서 1927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초까지 존재했던 극우정치운동과 정당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미국의 나치 이주민들은 미국 활동가들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한 1970년대까지 대부분 대중노출에 대한 감시를 받았다. 1979년, 미국 법무부는 비밀 전범들의 국외추방을 조사하고 기소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구성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측근들과 거래하던 연방정부의 이 부서는 국방부의 계획에 방해가 되었다.
숩조코프가 1979년 무장친위대 장교시절 전력을 거짓말했다는 의혹을 근거로 비자사기 혐의로 기소되자, CIA는 갑자기 이 북 카프카스 총통의 나치 과거를 폭로하는 내용의 문서사본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정보기관이 숩조코프를 해고한 것은 그의 전시 잔학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조수들에게 충분히 정직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CIA는 그가 암살단을 이끌고 반항자들을 처형했다고 인정하도록 했지만, 그를 인터뷰한 담당자는 이 체르케스인 스파이가 여전히 그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숨기고 있다고 믿었다.
작가 하워드 블룸은 숩조코프가 동부전선에서 14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데 참여한 살인 기동부대의 중위였다고 썼다. 그러나 이 전 친위대 장교는 공개적으로 나치와의 연관성을 부인했고, 블룸과 뉴욕타임스가 소유한 출판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숩조코프가 CIA의 도움을 받아 기소를 면한 후 목격자들이 동요하자 타임스는 50만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숩조코프가 사망한 지 20여 년이 지난 2006년에야 CIA가 전쟁범죄와 관련된 27,000쪽 분량의 문서를 기밀해제했을 때 진실이 드러났다.
미국의 모든 수입 나치가 정부에 의해 반입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슨한 이민시스템을 통해 난민으로 몰래 들어갔으며, 일부는 팔에 SS 문신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홀츠먼 미국 하원의원은 전범을 뿌리 뽑기 위해 "허술하고 천박한" 이민관리들을 비난했다.
예컨대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우스타샤 정부의 고위 관료였던 안드리자 아르투코비치는 가짜신분을 만들어 1948년 관광비자로 미국에 입국했다. 아르투코비치는 간단히 비자를 초과해서 체류를 했고 그의 형이 소유한 캘리포니아의 회사에서 일했다. 유고슬라비아는 1951년 전쟁범죄 혐의로 그의 인도를 요청했고, 미국관리들은 이 불법체류 외국인의 송환을 거부하며 7년 동안 망설였다. 1986년 새로운 요청으로 그는 마침내 송환되었지만 86세였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대량학살로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자연사할 수 있었다.
*우스타샤(Ustasha) 또는 우스타샤-크로아티아 혁명운동은 크로아티아의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운동 조직이자 파시스트 조직으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70여만 명의 세르비아인과 정교도인들을 학살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나치협력자 제이콥 라이머는 폴란드 트라우니키의 강제수용소에서 SS 고위간부로 일했으며 유대인 거주지역인 게토 청산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2년 미국 비자를 취득하여 2005년까지 추방명령을 피할 수 있었지만, 미국에서 추방되기 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전시작전 수행과 관련해 법정에 섰을 때 "다 잊혔다. 모든 것이 끝난 일이다"고 말했다.
나치에서 이슬람주의자로
소련에 대항하여 악랄한 동맹들과 협력하면서 나머지 세계에는 도덕적 이상을 옹호하는 미국의 행태가 1979년에 다시 나타났다. 소련군이 카불의 공산주의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도 전에 CIA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반군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 그 때였다.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허용된 국제행동규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지하디스트들을 열심히 그리고 비밀리에 무장시켰다. 로널드 레이건은 1980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후에도 이 정책을 계속했다.
1987년 6억 3천만 달러로 정점을 찍고 구식 소총에서 스팅어 대공미사일에 이르기까지 정교함이 고조된 이 원조는 주로 소련의 침공 이전에 정부와 싸워온 덜 이념적인 반군보다는 파키스탄이 선호하는 급진적인 전사들에게 흘러갔다.
무자헤딘 전사들과 미국정부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목표만을 공유했다. 즉, 러시아인들을 죽이는 것.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마치자 미국의 동맹들은 적이 되었다. 이후 일부 반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을 결성해 민간인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2001년 9월 11일에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알려진 알카에다 이슬람주의자들을 숨겨주었다.
알카에다(Al-Qaeda) 또한 아프가니스탄 분쟁에서 태어났다. 이 그룹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많은 전사들은 이전에 미국이 제공한 무기로 소련과 싸웠다. 이 그룹의 아이러니한 기원은 '알 CIA에다(Al-CIAeda)'라는 별명을 낳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결과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다면, 분명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정권을 축출하려다 실패하자 이슬람 반군을 다시 지원했다. 미국 관리들은 "온건한" 반군만을 지원한다고 주장했지만, 의도적이든 아니든 미국무기는 알누스라 전선과 아라르 알샴*과 같은 지하디스트 집단의 손에 넘어갔다. 유엔에 따르면 시리아 내전으로 민간인 3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시리아인들을 난민으로 만들어 유럽 이주위기를 초래했다.
*하라카트 아라르 알샴 알이슬라미야, 줄여서 아라르 알샴 또는 레반트 자유이슬람운동은 바샤르 알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정부와 맞서 싸우기 위해 창설된 이슬람주의 및 살라프파 파벌의 동맹이다.
미국의 최신 반러시아 프로젝트
2014년 미국이 시리아 반군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을 때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 행정부는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선출정부를 전복시킬 기회를 찾고 있었다. 비록 야누코비치는 결국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서방에게는 아주 친러시아적으로 보였다.
신나치 민병대의 폭력적인 유로마이단 전복에 대해 미국이 압력을 가하며 도왔다는 사실(그리고 그 여파로 반쿠데타 시위자들을 진압했다)은 누가 보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미국의 부역이었다. 극우 성향의 스보보다당* 의원들이 새 정부에서 여러 지도부 자리를 차지하자, 미국관리들은 키예프 독립광장(마이단)에서 스보보다 당대표 올레흐 탸흐니보크와 무대를 함께 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섰다.”
*한국 언론에서는 자유당으로도 번역하는 전우크라이나연합 "자유" 또는 스보보다는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정당이며 2014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5대 정당이다. '스보보다'는 우크라이나어로 "자유"를 뜻한다.
오바마 행정부는 오데사에서 반EU 시위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최소 48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을 때 비난을 하지 않았다. 희생자 대부분은 극우폭도들에 의해 시 노조회관으로 피신하려다 불에 타 숨졌다. 다른 사람들은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려다 총에 맞거나 구타당해 숨졌다.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 우파단체는 그 학살을 "우리 조국역사의 또 다른 밝은 페이지"라고 칭송하며 반응했다. 미국 언론 데일리 비스트로부터 반야누코비치 야당의 '떠오르는 스타'라는 찬사를 받았던 우크라이나 출신 레시아 오로베츠 하원의원도 오데사 사건을 친러 적들에 대한 '청산'이라고 칭하며 학살을 자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까지도, 대학살의 가해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유럽평의회는 2020년 11월 키예프정부가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조사하고 기소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우크라이나는 대중시위자들에게 존경받는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2차 세계대전 나치부역자들을 계속 끌어안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2년 후, 키예프의 주요 도로 중 하나는 스테판 반데라 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리비우도 스테판 반데라 거리를 자랑한다. 우크라이나의 신나치들이 보기에, 야누코비치의 죄 중 하나는 반데라를 공식적인 "우크라이나의 영웅"으로 기리는 이전 정부의 공표를 취소하기로 한 결정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데라는 레베드와 야로슬라프 슈테츠코를 포함한 다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기구(OUN)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선택한 CIA에게도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겨졌다. 슈테츠코의 글은 스보보다당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1945년 9월, CIA의 전신인 미국 전략사무국(OSS)은 반데라가 전쟁 중에 "테러통치"를 지휘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은 반데라를 전범으로 소련에 인도하는 것을 거부했다. 2006년 공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보당국자들은 그의 체포가 우크라이나와의 미국 작전의 미래에 빠르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인식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의 '영웅
일부 미국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현대 나치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예를 들어, 2018년 3월 의회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아조프 부대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투표를 했다. 당시 로 칸나 대표는 "백인우월주의와 신나치주의는 용납할 수 없고 우리세계에 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국회의원들은 국방부의 요청으로 2016년 이전의 금지령을 없앴다.
그 문제는 그 당시에 논란이 있었다. 주요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의 '나치 문제'에 대해 기사를 썼고, 2016년의 자금지원 금지가 폐지되자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의회를 맹비난했다. "나치 협력자들의 미화, 나치와 함께 싸운 사람들에 대한 재정적 이익의 부여, 이들 국가에 의한 공산주의와 나치 범죄의 동등성에 대한 조직적인 홍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사이먼 비젠탈 센터(Simon Wiesenthal Center)는 랍비 마빈 히어가 1977년에 설립한 유대인 인권단체이다. 이 센터는 홀로코스트 연구 및 추모, 나치전범 사냥, 반유대주의 퇴치, 관용 교육, 이스라엘 수호, 관용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미국 상원의원 40명은 2019년 아조프 부대를 비롯한 극우단체들에 대한 국무부의 테러조직 지정을 요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미국의 자유지상주의 싱크탱크인 카토연구소는 2021년 5월 우크라이나의 '권위주의로의 빠져듦'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썼다. 카토연구소 수석연구자인 테드 갈렌 카펜터는 "우크라이나를 전략적 근거로 미국의 동맹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민주적 연대라는 주장을 근거로 그렇게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모욕적"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가능한 한 빨리 점점 더 혐오스러운 종속국가를 버려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말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그런 우려는 쑤셔 박혀버렸다. 작년 12월,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나치즘, 신나치즘의 미화" 및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다른 관행과 싸우는 유엔총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국가였다. 우크라이나가 반대하는 결의안에는 독일 나치나 그들의 협력자들의 기념행사를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이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지금 서방언론은 물론 미국과 동맹국들이 우크라이나를 더욱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바이든은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야당을 금지하고, 비판적인 방송사를 폐쇄하고, 반대자들을 체포하는 데도 이 갈등을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뒤집어씌웠다.
페이스북은 러시아의 군사공세가 시작된 2월 24일, 거의 30억 명의 사용자들이 아조프 부대를 칭찬할 수 있도록 규칙을 변경했다. 언론매체들은 이 민병대에 대한 묘사를 누그러뜨렸다. 예를 들어, 워싱턴포스트는 아조프 부대를 "민족주의자 그룹"이라고 불렀고, 이전에 이 그룹을 "공개적으로 신나치"라고 지칭했던 뉴욕타임스는 그것을 "유명한 그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나치그룹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이들의 나치와의 유대관계를 미화했다. 복수의 매체는 9월에 러시아에 의한 포로생활 중 가혹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아조프 전사들에 대해 동정적으로 글을 썼고,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치료비가 필요한 부대원을 위해 13만 달러 이상이 모금되었다고 언급했다.
카토연구소의 카펜터는 지난 5월 "우크라이나의 부패와 권위주의를 숨기려는 언론의 자발성은 러시아와의 전쟁 발발 이후 더욱 악화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보도는 언론의 진실성과 신뢰성에서 새로운 낮은 수준을 이룰 조짐이다. 기득권 언론이 노골적인 네오나치들의 행태를 미화하는 것은 무언가가 끔찍하게 잘못된 것이다."
사실 아조프의 이미지는 너무 변했는데, 공동설립자인 조르지 쿠파라슈빌리와 5명의 부대 대표들이 대표단의 미국 투어의 일환으로 9월 워싱턴에서 50명 이상의 의회의원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지난 달 디트로이트에 있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교회를 방문하여 볼프스 앙걸(번개모양의 나치상징) 로고가 있는 아조프 표식을 경매에 부쳤다.
또한 지난달에는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소련 원수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던 키예프의 한 거리가 아조프 대대의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월 26일 개명식에 참석한 고위 인사들 중에는 아조프의 설립자 안드레이 빌레츠키가 있었는데, 그는 신나치 동료들에게 "백인 지배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말리노프스키 원수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히틀러의 나치로부터 나라의 많은 부분을 해방시켰고 소련의 영웅으로 두 번이나 선정되었다.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 요소는 분명히 사회의 주변부나 군대의 주변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0월 6일 트위터 메시지에, 이 나라의 총사령관인 발레리 잘루즈니 장군은 나치 상징인 스와스티카가 새겨진 조각들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그는 나중에 그 팔찌가 이미지의 디지털 압축 때문에 스와스티카처럼 보이는 스칸디나비아의 이교 상징들을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젤렌스키가 올린 사진에는 자신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제3 SS기갑사단의 상징인 '토텐코프' 표식을 착용한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 게시물 등 나치 상징물도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S군이 착용한 해골과 십자가 뼈와 비슷한 표식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올린 또 다른 사진에서도 우크라이나 군인이 착용했다. 아조프 전사들이 공개적으로 사용하는 나치 상징 외에도, 우크라이나 정규군들도 SS 표식을 착용하고 차량에 스와스티카를 그리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그러한 상징들은 미국과 NATO 동맹국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바이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주장을 "비꼬며", "황당한"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다른 반러시아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그는 젤렌스키의 유대인 조상이 우크라이나에 나치성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나치성향을 "개인적으로 후원한다"고 반박했다.
한편, 미국관리들은 나치즘에 대한 상황에 따른 비난과 색안경을 쓰고 잠재적으로 자신에게 유용한 악당들을 바라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반러시아적 이해관계가 공유될 때 더욱 그렇다. 미래의 CIA 국장인 덜레스가 뉘른베르크 검사들이 히믈러의 "죽음의 관료"라고 묘사한 사람인 볼프를 평가했을 때가 그랬다. 이 스파이 지도자가 속한 OSS는 볼프가 "사람에 대한 대량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덜레스는 워싱턴으로 보내는 전보에서 이 친위대 거물을 "역동적이고 독특한 성격"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볼프를 "낭만주의가 혼합된 무장친위대에서 더 온건한 요소"를 대표하는 잘생기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로 보았다.
크리스토퍼 심슨과 다른 역사학자들이 인용한 인용문은 덜레스와 다른 미국 정보당국자들이 나치와 나치 협력자들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명백하게 편향된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뮌헨에서 CIA의 소련지부를 운영했던 해리 로시츠케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공주의자인 이상 어떤 나쁜 놈이라도 이용하는 것은 본능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