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변명
저는 광해군 때에 강화부사를 지낸 정항(鄭沆)이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저를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방에 가두고 불을 때서 죽인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깃털에 불과합니다. 진정코 억울합니다. 몸통은 따로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창대군은 한 나라의 왕자이고 또 선조 임금의 아들 14명 중에서 유일하게 정비(正妃)의 소생입니다. 어머니는 인목대비입니다. 그러니 왕자를 살해한 일이 오로지 저 혼자의 힘과 판단으로 가능하겠어요.
일이 잘못되면 왕자를 죽인 역적으로 몰려 파면이 아닌 바로 사약을 받아야지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위험한 일입니다. 한보대출의혹과 관련된 신한국당의 홍인길 의원과 비교해 보세요. 94년 말부터 97년 초까지 2여년간에 한보(주)에 9천억원이란 거금을 대출해 주도록 직, 간접적으로 은행장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그 댓가로 정태수 씨로부터 10억원을 받았다고 검찰이 발표한 것을 알고 계시죠.
그러니 제가 아무리 당시 권력을 잡은 대북파의 실세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왕자를 죽이자는 결정은 할 수가 없어요. 행여나 영창대군의 형님되시는 광해군께서 노여워한다면 저는 그 날로 귀양을 갈 것이며, 곧 큰 사발로 사약을 받을게 아닙니까. 이제야 저는 역사 앞에서 당당히 그 사건을 일으킨 ‘몸통’을 밝힙니다. 바로 이이첨(李爾瞻) 입니다.
이이첨이 몸통이라는 저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영창대군이 처한 입장을 먼저 이야기하겠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민심의 수습, 의병 모집, 그리고 종묘 사직을 위하여 서둘러 공빈 김씨가 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어요. 비록 절차는 밟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정한 경선을 통해 차기 대권후보로 인정을 받은 셈이지요. 신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대비의 몸에서 영창대군이 태어난 거여요. 그러자 조정은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해야한다는 비주류파와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류파로 갈리어 박터지게 싸웠어요. 작금의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 문제와도 같은 맥락으로 보시면 틀림없습니다. 국민 경선을 통해 노무현씨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론 지지도에서 노 후보가 경쟁자에게 뒤지고 또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자, 당 내부에서 후보 교체론이 나와, 노 후보 지지자와 반 노후보 진영이 옥신각신하고 있잖아요. 당시에 임금의 마음도 오락가락했지요. 선조는 광해군 대신에 귀여운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마음이 있었고, 그러한 뜻은 당시 정권을 잡은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의 지지도 받았어요.
그런데 후보교체문제는 선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끝이나고, 광해군이 임금으로 등극했지요. 선조는 죽으면서 영창대군을 돌봐 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의 미움을 샀어요. 광해군은 임란으로 파괴된 통치질서를 다시 확립하고 또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키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했어요. 그런대도 계속해서 정통성 시비가 끊이질 않았어요.
광해군을 곁가지라도 놀리는 사람까지 있었어요. 후궁의 자식으로 열등감을 가진 광해군은 영창대군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어요. 그러자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죽일 가공할 음모를 꾸몄어요. 일차적으로 여주의 여강에서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던 서자 7명을 잡아왔어요. 그들은 재능은 있으나 벼슬이 없던 자들로 봉건사회에 대하여 불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지요. 이 사건이 광해군 5년(1613년)에 발생한 이른 바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사건입니다.
이이첨은 무조건 그들을 고문하기 시작했어요. 술에 취해 졸지에 잡혀 온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잘못을 빌며 울고불고 했지요. 으, 불쌍한 것들!
"네, 이놈들. 너희들이 벼슬 길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역모를 꾸몄다는 제보 가 있다. 몸통이 누구냐.”
“나리, 진정 모르는 일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여봐라 저 놈들을 인두로 지지거라.”
"지지직, 지지직, 으- 으 악!"
“나리,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네 이놈, 살고 싶으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김제남(金悌男: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와 반역을 도모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앉칠려고 역모를 꾀하였다는 것이 감찰에서 모두 밝혀냈다. 그래도 거짓말을 하느냐.”
"으윽, 진정 모르는 일입니다. 살려주세요.”
“그래, 만약 너희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자백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자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은 고문으로 몸이 망가지고 죽게 되자 억지로 있지도 않은 일을 자백했습니다.
“예, 저희는 역모를 단행해 영창대군을 왕으로 모시려 했고, 그 일에는 김제남이 관계되었습니다.”
살려고 역모를 거짓으로 자백하자, 영창대군은 역모의 주모자로 심판받아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고 김제남은 사약을 받아 죽었지요. 그리고 서자들도 증거 인멸을 위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계속이었어요.
몇 대신과 선비들이 영창대군은 임금의 동생이고, 이제 8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역모에 가담할 수 있느냐 목숨을 걸고 대들었어요. 어느 작자는 대군을 서인으로 떨어트려 유배시킨 일이 부당하다며 매일같이 임금을 괴롭혔어요. 처음에는 참았으나 지존과 대북파에 대하여 비난하자, 이이첨은 급기야 정권과 대북파의 안정을 위해 저에게 비밀지령을 내렸어요.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 지 알 것이다.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지?”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인간적으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역사의 큰 눈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영창대군을 방에 가두고는 계속해서 불을 때 쪄서 죽이기로 했어요. 방안의 공기가 급작스럽게 더워지자 숨을 쉬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뜨거운 방바닥에 발을 딛지도 못했을 겁니다. 방안에서는 한참동안 ‘어마마마, 어마마마’를 부르는 대군의 절규가 피를 토하듯 흘러나왔어요.
저는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얼굴을 돌렸어요. 곧 조용해지더군요. 제가 방문을 열었을 때였어요. 뜨거운 공기가 후끈하더니 방은 완전히 용광로였고, 어린 대군의 손톱을 살피보니 피가 나도록 방벽을 긁어 뭉개져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파발을 띄워 영창대군의 죽음을 조정에 보고했고, 그로써 임무를 끝마친 겁니다.
본 사건의 몸통인 이이첨은 그 뒤로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며 호의호식하며 살았는데, 그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게 된 뒤에는 가난한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김영삼 씨의 집사로 구진 일은 도맡아 처리하다 결국은 뇌물수수협의로 감옥에 간 장학로 씨를 기억하시죠. 하루는 이이첨이 안방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벽의 흙을 긁어서 먹고 있었어요. 이를 본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곤 그 때부터 부정한 길로 빠져든 것입니다. 그러나 1622년 여름이었어요, 귀가를 하는데 피투성이가 된 장님이 울며 지나가 자초지정을 물었어요.
“공의 자식이 나를 불러 앞날을 점쳐 달라기에 내가 ‘1623년에 반드시 나쁜 일이 있다.’ 했더니, 화를 내며 나를 이처럼 만들었소.”
이 말을 들은 이이첨은 장님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대접을 하고는 이윽고 자식을 꾸짖었어요.
“내가 영화가 넘치고 죄가 많아 화를 면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장님을 매질했는냐? 내가 너희 아비이니 이 일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죽음에 이르자, 그는 사람을 돌아보며 지난 일을 후회하며 말했어요.
“배가 고파도 좀 참으시오.”
[사진 :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 (출처 - copyright Doosan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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