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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Balancing Culture and Shadow 빛과 그림자의 균형

작성자山木|작성시간20.03.26|조회수135 목록 댓글 0

                            

Balancing Culture and Shadow

빛과 그림자의 균형


It is useful to think of the personality as a teeter-totter or seesaw.

Our acculturation consists of sorting out our God-given characteristics and putting the acceptable ones on the right side of the seesaw and the ones that do not conform on the left.

It is an inexorable law that no characteristic can be discarded; it can only be moved to a different point on the seesaw.

A cultured person is one who has the desired characteristics visible on the right (the righteous side) and the forbidden ones hidden on the left.

All our characteristics must appear somewhere in this inventory.

Nothing may be left out.

시소를 연상하면 심리의 기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신에게서 부여 받은 개별적인

특징 중 사회가 수용하는 면은 시소의 오른편에, 그렇지 않은 면은 시소의 왼편에 올려놓는다. 이 시소게임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부여한 온전한 특질은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오직 시소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만 가능하다.


소위 문명화된 사람이란 바른쪽이라고 부르는 우측에 원하는 특질을 가시화 하고,

왼편에는 금지된 부분을 숨겨두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가 지닌 특질은

모두 진열되어야 한다.

단 하나라도 뒤로 숨겨서는 안 된다.


A terrible law prevails that few people understand and that our culture chooses to ignore almost completely.

That is, the seesaw must be balanced if one is to remain in equilibrium.

If one indulges characteristics on the right side,

they must be balanced by an equal weight on the left side.

The reverse is equally true.

If this law is broken, then the seesaw flips and we lose our balance.

This is how people flip into the opposite of their usual behavior.

The alcoholic who suddenly becomes fanatical in his temperance, or the conservative who suddenly throws all caution to the wind, has made such a flip.

He has only substituted one side of his seesaw for the other and made no lasting gain.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한 가지 법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무시하고 있는 끔찍한 진리로서,

사람들이 평상심을 유지하려면 시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른쪽에 드러나는 특질을 선호한다면 그 반대쪽에도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뭔가로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역으로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 법칙이 깨어지면 시소가 뒤집혀 균형을 잃게 된다.

이 법칙은 사람들이 어떻게 180도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사람들은 늘 해오던 행동을 그만두고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해

반대 극에 있는 행위를 저지르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자가 어느 날 금주 맹신자로 변하고, 주류의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보수주의자가 어느 날 그 반대 극으로 돌아선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돌아서기만 했을 뿐

이 경우 내면에 쌓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The seesaw may also break at the fulcrum point if it is too heavily loaded.

This is psychosis or breakdown.

Slang terms are exact in describing these experiences.

One must keep the balance intact, though this often requires a very great expenditure of energy.

또 시소 위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아서 지렛대가 부러질 수도

있다

이 상태를 정신이상이나 신경쇠약이라 부를 수 있다.

무너져 내린다breakdown라는 표현이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 준다.

따라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좌우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The psyche keeps its equilibrium as accurately as the body balances its temperature, its acid-alkaline ratio, and the many other fine polarities.

We take these physical balances for granted but rarely do we recognize their psychological parallels.

우리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고, 산과 알칼리의 비율을 조절하고,

그 밖에 수많은 평형을 유지하듯이 심리도 이와 같은 균형을 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균형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심리적 균형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삶과 죽음의 나무 Tree of Life and Death

A medieval illuminated manuscript gives us this information in vivid form.

Here a stylized tree of knowledge, with its golden fruit, rises up from Adam’s naval.

Adam is looking a little sleepy as if he does not entirely comprehend what he has produced.

Two women stand beside the tree.

The Virgin Mary is on the left, clothed as a nun, picking fruit from the tree and handing it out to a long line of penitents for their salvation.

Eve, naked, stands on the right, picking fruit from the same tree, handing it out to a long line of people for their damnation.

Here is vivid commentary on a single tree giving out a dual product.

What a strange tree!

Whenever we pluck the fruit of creativity from the golden tree our other hand plucks the fruit of destruction.

Our resistance to this insight is very high!

We would love to have creativity without destruction, but that is not possible.

이런 면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중세 그림이 있다.

아담의 배꼽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황금과실이 달려 있는 지식의 나무이다.

아담은 자기가 기른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잠에 취한 표정이다.


나무 양쪽에는 여자 둘이 서 있다.

좌측에는 성모마리아가 수녀복을 입고 있다.

성모마리아는 지식의 나무에서 과일을 따서 길게 늘어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준다.


오른편에는 나체인 이브가 서 있다.

이브는 같은 나무의 과일을 따서

파멸의 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이는 한 나무에서 자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이 얼마나 이상한 나무인가!


황금의 나무에서 창조의 과실을 딸 때

다른 손으로는 파괴의 과실을 따다니.

우리는 이런 통찰에 대해 지나친 저항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파괴 없는 창조를 바라지만 그것은 가능한 바람이 아니다.


I regret the prevailing attitude at present that goodness or sainthood consists of living as much as possible on the right hand, the good side, of the seesaw.

Sainthood has been caricatured as an image of the all-right person, the person who has transferred everything to the perfect side of his personality.

Such a condition would be completely unstable and would flip immediately.

The balance would be disrupted and life would be impossible.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시소의 바른쪽에서만 가능한 한 많은 성인의 자질이나 선을 쌓으려 한다.

그리고 성인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마치 선만 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

이는 시소의 바른쪽으로 모든 걸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런 상태는 대단히 불안정하다.

한 순간에 다른 쪽 극으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은 이미 깨어져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


The fulcrum, or center point, is the whole [holy] place.

I agree that we must relate to the outer world with the refined product of the good side, but this can be done only by keeping the left side in balance with the right.

We must hide our dark side from society in general, or we will be a bloody bore; but we must never try to hide it from ourself.

True sainthood-or personal effectiveness-consists in standing at the center of the seesaw and producing only that which can be counterweighted with its opposite.

This is far from the sentimental view of goodness that has been set up as our ideal.

지렛대나 시소의 중앙은 온전하고 신성한 지점이다.

우리는 모두 외부세계와 관계할 때 잘 훈련된 선한 면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는 좌우측의 균형이 잘 유지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각자의 어두운 면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마구 드러낸다면 세상은 피로 굶주린 장소로 변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한테 자기의 어두운 면을 숨기려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진정 성인의 자질을 갖추려면 시소의 중앙에서 한쪽의 무게와 비슷한 무게를 반대쪽에도 쌓아야 한다. 이는 분명 우리가 이상적이라 공헌하는 감상주의적인 선과는 거리가 먼 견해다.


Of course we are going to have a shadow!

St. Augustine, in The City of God, thundered,

“To act is to sin.” To create is to destroy at the same moment.

We cannot make light without a corresponding darkness.

India balances Brahma, the god of creation, with Shiva, the god of destruction, and Vishun sits in the middle keeping the opposites together.

그래도 우리는 그림자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도시 The City of God >에서

“행동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창조를 한다는 것은 동시에 파괴를 한다는 뜻이다.

같은 정도의 어두움 없이는 빛을 밝힐 수 없다.

인도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와 창조의 신 시바Shiva 사이에 비슈누Vishun를 앉혀 두 대극이 균형을 이루어 공존할 수 있도록 한다.


No one can escape the dark side of life, but we can pay out that dark side of life, but we can pay out that dark side intelligently.

St. Anthony paid for his beatific vision by night horrors-visions of evil parading before him.

He bore the tension between these opposites and finally came to that superordinate insight that we can truly call sainthood.

우리는 삶의 어두운 측면에서 달아날 수 없지만 그것을 현명하게 다룰 수는 있다.

안토니오 성인은 천국을 보게 되는 대가로 눈앞에서 악마가 행진하는 밤의 공포를 견뎌내야 했다.

그는 두 대극 사이에서 초래되는 긴장감을 견뎌냈기에 마침내

비범한 통찰을 얻어 진정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


The balance of light and dark is ultimately possible-and bearable.

All nature lives in polarity-light and dark, creation and destruction, up and down, male and female.

It is not surprising that we find the same basic laws functioning in our psychological structure.

In German there is a term, doppelganger, meaning one’s mirror image, one’s opposite.

Goethe was profoundly affected when he approached of his home one evening and was met by a vision of his doppelganger, the other one who lived in his personality.

Few of us have so vivid an experience of our shadow, but whether we know it or not our psychic twin follows us like a mirror image.

궁극적으로 빛과 어두움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또 지속도 가능하다.

자연에는 빛과 어두움, 창조와 파괴, 위와 아래, 남성과 여성 등의 대극이 공존한다.

심리 구조를 이야기할 때도 기본적으로 같은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어의 도플갱어란 단어는 자신의 거울 이미지,

혹은 자신의 반대라는 뜻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어느 날 저녁 집 근방까지 왔을 때

자신의 도플갱어, 즉 내면에 살고 있는 또다른 자신과 맞닥뜨린다.

자신의 그림자를 이렇게 선명하게 체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심리적 쌍둥이인 그림자는

거울 이미지처럼 우리 곁을 항상 따라다닌다.


Most people presume that they are the sole master of their house.

To acknowledge and then own one’s shadow is to admit there are many more sides to us that the world generally does not see.

Dr. Jung tells how he first intuited the presence of “another” in his psyche.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라는 내면의 집에 자기 혼자만 거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소유한다는 말은 자기 안에

아주 다양한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융은 자신의 내면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맨 처음 어떻게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었는지를 다음 이야기로 설명한다.


I had a dream which both frightened and encouraged me.

It was night in some unknown place,

And I was making slow and painful headway against a mighty wind.

Dense fog was flying along everywhere.

I had my hands cupped around a tiny light which threatened to go out at any moment.

Everything depended on my keeping this little light alive.

Suddenly I had the feeling that something was coming up behind me.

I looked back, and saw a gigantic black figure following me.

But at the same moment I was conscious in spite of my terror, that I must keep my little light going through night and wind, regardless of all dangers.

When I awoke I realized at once that the figure was my own shadow on the swirling mists, brought into being by the little light I was carrying.

I knew too that this little light was my consciousness,

the only light was my consciousness, the only light I have.

Though infinitely small and fragile in comparison with the powers of darkness, it is still a light, my only light.

꿈을 꾸었다. 놀라웠지만 용기를 주는 꿈이었다.

어두운 밤, 나는 매우 낯선 곳에 있었다.

강한 바람에 맞서서 아주 천천히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나는 양손을 둥글게 모아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한 아주 작은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모든 것은 내가 이 작은 불을 꺼뜨리지 않는 데 달려 있다.

갑자기 등 뒤로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보니 거인 같은 검은 존재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밤새 이 작은 불빛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이 검은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것은 짙은 안개 속을 걸으며 감싸안은,

불빛으로 생긴 내 그림자였다.

그 작은 불빛은 나의 의식,

즉 내가 가진 유일한 빛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록 그것은 어두움에 비해 무한히 작고 미약하지만

여전히 빛을 발한다.

이것은 나의 유일한 빛이다.

- 융 <memories, Dreams, and Reflections,(New Yok; Pantheon, 1963)pp.87-88.


Jung had gone through a highly refined enculturating process, from his childhood in a rigid Swiss Protestant home to the severe discipline of his medical training.

Long hours of concentrated attention gave him a very focused personality.

But this was at the cost of ignoring the dark and primitive aspects that appeared in his dream.

The more refined our conscious personality, the more shadow we have built up on the other side.

어린 시절 융은 스위스의 엄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에 대한 엄격한 교육은 그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장 시간 신경을 집중해야 했던 탓에 융은 한 가지에 몰두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꿈에 등장했던 어두움과 원시성을 무시하여 얻은 특성이다.

우리 의식의 특질이 더 정교해질수록 반대편에는 더 큰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This is one of Jung’s greatest insights: that the ego and the shadow come from the same source and exactly balance each other.

To make light is to make light is to make shadow; one cannot exist without the other.

이것이 바로 융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통찰력 중 하나다.

자아와 그림자는 같은 원천에서 만들어지고 서로 정확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빛을 밝히는 것은 곧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 없이 서로 존재하지 못한다.


To own one’s own shadow is to reach a holy place-an inner center-not attainable in any other way.

To fail this is to fail one’s own sainthood and to miss the purpose of life.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한다는 말은 신성한 자리인 내면의 중심에

도달하는 것인데,

이 방법 외에는 어떻게든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길이 없다.

이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면 성숙해질 수 없고

또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다.


India has three terms describing this place of sainthood:

sat, chit, Ananda.

Sat is the existential stuff of life (mostly the left side of the balance);

chit is the ideal capacity [mostly the right side of the balance];

Ananda is the bliss, joy, ecstasy of enlightenment-the fulcrum of the seesaw.

When sat and chit are paired together, and sufficiently conscious, then ananda, the joy of life, is created.

This is won by owning one’s own shadow.

인도에는 성인의 특질을 규정하는 단어가 셋 있다.

사트, 치트, 아난다가 그것인데,

사트는 삶의 존재론적 측면을 의미한다.

[대개 시소에서 좌측에 위치하는 부분이다.]

치트는 이상적인 가능성으로 [대개 오른편에 위치한다.]

아난다는 지복, 기쁨,깨달음의 황홀경을 뜻하는데

바로 이것이 시소의 중심 축이다.

사트와 치트가 서로 짝을 이루고 이를 충분히 의식할 때

아난다라는 삶의 기쁨 또는 법열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소유함으로써 만 얻게 된다.


If we act from the extreme right, we will knowingly or unknowingly have to balance this with some act from the left side.

We do not even have to turn our head around to know that we have created an equally dark content.

This is way so many artists are often so difficult in their private lives.

만일 우리가 극단적으로 바른쪽에 치우친 행위를 했다면

왼편에 놓일 수 있는 행위로 시소의 균형을 맞추어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매 순간 고개를 돌려 같은 무게의 어두운 내용물이

반대편에 만들어졌는지 확인해볼 필요는 없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왜 사생활에서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There is, however, a broader kind of creativity that folds the darkness into the finished product and finds fulfillment in the shadow.

This is pure genius. Its attributes are wholeness, health, and holiness.

We are also talking about sainthood in the original meaning of the word-a full-blooded embracing of our own humanity, not a one-sided goodness that has no vitality or life.

그렇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최종 산물인 자신의 창작품에 어두움을 포함시켜서 그림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광의의 창의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것이 순수 천재성이다.

이런 예술작품의 특질을 전일성, 건강, 신성함으로 들 수 있다.

작품의 생명력은 생기가 없는 일방적인 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성의 다양한 측면을 다 포괄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본래 성인의 특질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A friend asked me recently why so many creative people have such a miserable time of it.

History abounds with stories of shocking or eccentric behavior among the great.

Narrow creativity always brings a narrow shadows with it,

While broader talents call up a greater portion of the dark.

Schumann, the composer, went med; the world knows about the very dark side of Picasso’s life; and everyone hears stories about local geniuses with their unusual habits.

While those with the largest talent seems to suffer most, we all must be aware of how we use our creativity-and of the dark work of art, to say something kind, to help others, to say something kind, to help others, to beautify the house, to protect the family-all these acts will have an equal weight on the opposite side of the scale and can lead us into sin.

We cannot refuse our creativity or stop expressing ourselves in this way; yet we can be aware of this dynamic and make some small but conscious gesture to compensate for it.

최근에 한 친구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창의성이 뛰어난 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가?

역사 속에는 충격적이거나 괴벽스런 행동을 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협의의 제한된 창의력은 그만큼의 협소한 그림자를 불러내지만,

광의의 창의력은 더 깊은 어두움을 불러낸다.

음악가 슈만은 정신이상으로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피카소의 어두운 측면 역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우리는 동시대 천재들의 괴이한 습관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걸출한 사람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에 관해 들으며 우리는 우리자신의 창의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또 우리의 선물에 반드시 수반되는 어두운 면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예술품을 창작하거나,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타인을 도와주거나, 집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가족을 보호하는 이 모든 행위는

시소의 반대쪽에 동등한 무게를 요구하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창의력을 거부하거나 일상생활에서의 선행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 동력을 깨달아 어떤 작은 선행을 보상할 수 있는 의식적인 몸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Dr. Marie-Louise von Franz and Barbara Hannah, who shared a household in Kusnacht, Switzerland, had the custom of requiring whoever had some especially good fortune to carry out the garbage for the week.

This is a simple but powerful act.

Symbolically speaking, they were playing out the shadow side of something positive.

Dr. Jung often greeted a friend by asking, “Had any terrible successes lately?” because he also was aware of the close proximity of light and darkness.

분석 심리학자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박사와 바버라 한나는 스위스 쿠스나흐트에서 한집에 살았는데, 둘 중 한 사람에게 행운이 생기면 그 사람이 한 주일 동안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맡았다.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행위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긍정적인 일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이 일에 수반되는 그림자적인 측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융은 종종 친구들에게 “최근에 끔직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이는 빛과 그림자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I remember a weekend when I put up with very difficult guests who stayed days beyond their invitation. I exercised herculean patience and courtesy and sighed in great relief when they left.

I thought I had earned something nice by my virtue so went to the nursery to buy something beautiful for my garden.

Before I knew what was happening. I picked a fight with the nurseryman and made a miserable spectacle of myself.

Since I did not pick up my shadow consciously, I landed it on this poor stranger.

Balance was served, but in a clumsy and stupid way.

내가 실제로 겪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아주 힘들게 했던 주말에 벌어진 일이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손님이 우리 집에 머물렀는데

이 손님은 초대했던 기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나는 이 기간 내내 불편한 상황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러자니 헤라클레스 같은 인내력이 필요했고,

심지어 내 예의의 한계를 시험 받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마침내 손님이 떠나자 나는 커다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큰일을 해낸 듯한 느낌이 들어 정원에 심을 예쁜 꽃을 사려고 화원에 갔다.

그러나 내 의식 속에서 미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꽃가게 점원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언쟁이 붙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내 그림자를 의식적으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애꿎은 낯선 점원에게 내 그림자를 내려놓은 탓이었다.

어쨌든 시소의 균형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서툴고 어리석었다.


Many a woman is burdened by playing out the dark side of a creative man;

many a man is drained by carrying the dark side of a woman that is the byproduct of her creativity.

Worst of all, children often have to carry the dark side of creative parents.

It is proverbial that the minister’s child will be difficult and the wealthy man’s child is in danger of leading a meaningless life.

창조적인 남성들의 그림자에 대한 대가는

그 곁에 머무르는 여성들이 치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또 창조적인 여성의 어두운 면,

곧 창조의 부산물 때문에 에너지가 고갈되는 남성들도 많이 있다.

최악의 경우는 창의적인 부모의 그림자가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경우다.

성직자가 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나,

부유한 부모를 둔 자녀들이 오히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힘들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On top of that, we suffer from our cultural inventions.

We live in the most creative century in history, with miracles of technology, ease of travel, and a new freedom from the drudgery of life.

Researchers estimate that in an average family household, twenty-eight servants would be needed to accomplish only one part of the work that is taken care of by our mechanical aids.

What a wonderful ages!

But its shadow appears, inevitably, as boredom and loneliness-the exact opposites of the efficient society we have made.

On a global level, we have escalated war and political strife to equal our visions of utopia and of a Brave New World.

The high creativity of our modern society can be maintained only if we will recognize the shadow that accompanies it and pay out that in an intelligent way.

게다가 문명의 발달은 우리들의 고통을 가증시킨다.

기술혁명을 이룬 우리는 세상을 편리하게 여행하고 일상의 힘든 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연구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오늘날 평범한 가족이 기계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일은 과거의 하인 28명이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얼마나 경이로운 시대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룩한 효율적인 사회의 정반대 편에는 권태와 외로움이란 그림자가 불가피하게 등장한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보면, 신세계를 향한 유토피아적 비전이 거대해진 만큼 전쟁과 정치 분쟁의 수도 증가했다.

현대사회의 뛰어난 창의력은 이와 함께 수반되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이를 현명하게 다룰 때만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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