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뱀이 선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테오소피(Theosophy)에 의해 사용된 상징에서는 또아리를 튼 뱀이 제 꼬리를 입에 물고 있으며,
라마크리슈나 미션(Ramakrishna Mission)의 상징에서는 뱀의 꼬리가 머리에 닿아 있습니다.
이런 상징의 의미가 무어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뱀이 사용된 것은 아주 적절하고 의미 심장하다. 아마 이보다 더 나은 상징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쿤달리니가 여러 여정을 거치듯이 뱀의 상징적 형태 또한 많은 여정을 거쳐 왔다.
어떤 식으로든 뱀을 묘사하지 않는 종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뱀이 쿤달리니와 부합하는 여러 가지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를 언급할 때 마음 속에 제일 먼지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끄러지듯 기어가는 동작이다.
쿤달리니의 첫 번째 경험은 내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대는 내부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뱀이 움직이는 느낌과 같다.
뱀을 생각할 때 마음 속에 떠오르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뱀이 다리 없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뱀은 이동 수단 없이 움직인다. 쿤달리니 또한 사지가 없다. 이동 수단이 없다. 쿤달리니는 순수한 에너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달리니는 여행한다.
뱀에 관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세 번째 이미지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앉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쿤달리니 또한 똑같은 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긴 것이 좁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서는 또아리를 틀어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아주 거대한 힘이 아주 작은 센터 위에 앉아 있다. 그러므로 이 힘은 또아리를 틀 수밖에 없다.
뱀은 서서히 또아리를 풀고 일어난다. 뱀이 일어날수록 또아리가 풀린다.
마찬가지로 쿤달리니 에너지가 상승할 때 우리는 쿤달리니가 또아리를 풀고 일어서는 것처럼 느낀다.
가끔씩 뱀은 놀이를 즐기며 자신의 꼬리를 입에 문다. 이것 또한 의미 심장한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가치 있는 상징으로 인정한다.
이 상징은 쿤달리니가 완전히 깨어나면 원을 그리며 순환을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머리가 자신의 꼬리를 잡을 것이다. 쿤달린니의 뱀이 형성할 것이다.
뱀이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은 남성적인 수행을 상징한다. 이것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상징이다.
반면, 여성적인 수행을 상징하는 뱀은 그저 꼬리가 머리에 닿아 있을 뿐이다.
이 꼬리는 그저 복종할 뿐 입에 물려 있지 않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그 이상의 차이는 없다.
뱀의 머리 또한 의미 심장하다. 꼬리가 좁은 반면 머리는 아주 넓다.
완전히 깨어난 쿤달리니는 사하스라르(sahasrar)에 도달한다. 뱀의 턱처럼 크게 열리고 확장된다. 엄청나게 팽창한다.
마치 그 안에 수많은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때 그 꼬리는 아주 작아진다.
뱀이 꼬리만으로 우뚝 서는 것은 경이적인 장면이다. 이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것은 내부에 있는 바이탈 에너지(vaital energy)의 도움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뱀이 똑바로 설 수 있는 다른 실질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뱀은 의지력의 힘으로 우뚝 선다.
뱀이 자신을 기댈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은 없다. 쿤달리니가 깨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쿤달리니는 물질적인 지지대가 없다. 쿤달리니는 비물질적인 힘이다.
이것이 뱀을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선택한 이유다. 다른 이유들도 있다. 예를 들면, 뱀은 순진무구한 동물이다.
힌두 교에서 '순진무구한 쉬바'라고 불리는 쉬바가 머리위에 뱀을 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뱀은 아무에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방해받은 뱀은 크게 위험할 수도 있다.
똑같은 사실이 쿤달리니에도 적용된다. 쿤달리니는 매우 순진무구한 힘이다.
쿤달리니 자체는 그대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릇된 방식으로 쿤달리니를 방해하면 그대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뱀이라는 상징은 쿤달리니를 그릇된 방식으로 방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해 볼 때 뱀보다 나은 상징물이 없었다. 전 세계에서 뱀은 지혜를 대표하는 상징 동물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뱀처럼 영리하고 지성적이며 비둘기처럼 순수할지어다."
뱀은 아주 영리한 동물이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주의 깊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재빠르다.
이 모든 것이 뱀의 특성이다. 쿤달리니 또한 이와 같다.
그대는 쿤달리니를 통해 지혜의 정상에 도달한다. 쿤달리니는 매우 신속하면서도 강력하다.
옛날에 쿤달리니의 상징을 선택할 당시에는 뱀보다 나은 상징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이보다 더 나은 상징은 없다.
아마 미래에는 새로운 상징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로켓(rocket)이 쿤달리니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로켓을 상징으로 사용하면 쿤달리니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 여정은 똑같다.
로켓은 하나의 하늘에서 다른 하늘로, 하나의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여행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로켓이 쿤달리니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상징은 시대에 따라 결정될 수도 있다.
뱀이 상징으로 선택될 당시 인간은 동물의 왕국에 가까웠다. 그 당시의 모든 상징은 동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로부터 상징을 발견하려고 했다.
뱀은 쿤달리니를 정의할 수 잇는 가장 적합한 상징이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쿤달리니가 전기와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5천 년 전에 쿤달리니를 전기라는 용어로 말하는 것을 불가능했다. 그 시대에는 전기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뱀은 전기와 같은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뱀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쿤달리니에 대한 경험뿐만 아니라 뱀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다.
우리에게 뱀은 아직도 신화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70만 명이나 되었다.
소도 본 적이 없는 이 아이들은 아마 뱀에 대해서도 아무 개념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사고 방식과 상징은 우리와 전혀 다를 것이다.
이제 뱀은 시대에 뒤떨어진 동물이 되었다. 우리의 삶에서 뱀은 더 이상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옛날에는 뱀이 우리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뱀은 우리의 이웃이었으며 하루 이십사시간 내내 우리와 함께 있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뱀의 민첩함과 지성, 그 움직임을 알고 있었으며, 뱀이 지닌 특성에 익숙했다.
사람들은 뱀이 얼마나 위험한 동물이 될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기를 보호하는 뱀에 대한 전설이 있다. 그만큼 뱀은 무해한 동물이다.
또한 뱀에 물려서 격노한 사람이 뱀을 죽여 버린 전설도 있다. 뱀은 그렇게 위험할 수도 있다.
뱀은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갖고 있다.
뱀과 가까이 지내던 당시 인간은 뱀을 아주 자세히 관찰했을 것이다.
쿤달리니라는 주제 또한 같은 시대에 관찰되기 시작했으며, 둘 사이의 유사성이 발견되었다.
모든 상징은 의미를 갖고 있다.
어떤 상징이 오랜 시대를 통해 전해 내려왔다는 것은 그 상징에 적합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 적합성은 깨질 수밖에 없다. 뱀이라는 상징은 오랫동안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쿤달리니를 뱀과 같은 힘으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뱀이 어디에 있는가? 뱀은 더 이상 우리의 이웃이 아니다. 우리는 뱀과 아무 연관이 없다.
길에서 뱀을 보는 것은 매우 힘들다. 우리는 뱀과 아무 연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뱀이 쿤달리니의 유일한 상징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없었다.
<질문 : 깨어난 쿤달리니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에는 의미가 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진실이다.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실제로 육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육체 안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날 때마다 육체의 기존 성분이 완전히 변한다. 당연히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육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수 많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구두쇠를 예로 들어 보자 인색함은 마음의 특성이지만 그의 육체 또한 구두쇠과 된다.
그의 유체는 장래에 필요할지도 무르는 성분들을 수집하기 시작할 것이다.
육체는 아무 이유 없이 그 성분들을 축적할 것이다.
결국 괴롭고 불편한 지경에 처할 때까지 계속 그 성분들을 긁어모을 것이다.
겁 많은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육체가 두려움에 떨기를 원하는데 필요한 분비선과 호르몬이 없다고 하자.
이 때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육체는 필수적인 성분들을 저장한다. 육체는 그대의 요구를 알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사람의 육체는 그가 두려움에 빠져드는 것을 촉진하기 위하여 두려움의 분비선들을 활성화시킨다.
겁에 질려 땀을 흘리는 사람은 땀분비선의 기능이 아주 강하다. 그는 땀을 많이 흘리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런 사전 조치가 필수적이다. 그는 하루 중에도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우리의 마음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많은 것을 저장하고 있다. 육체는 마음의 요구력 이상으로 저장한다.
마음이 변하면 육체 또한 변한다. 쿤달리니가 솟아오르면 육체에 전체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변형을 통해 그대의 살이 빠지고 혈액량도 감소할 것이다. 정확하게 그대에게 필요한 만큼 감소할 것이다.
이렇게 육체가 전체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다. 육체에 꼭 필요한 만큼의 살과 피만 남고 나머지는 타서 없어진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그대는 가벼움을 느낀다. 그대는 내면의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질문에서 인용한 말은 정확하게 옳다. 구도자는 특수한 식이 요법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쿤달리니가 솟아오르면 내부에 상당량의 열이 발생한다.
쿤달리니는 전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쿤달리니는 아주 높은 전압을 가진 에너지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는 불이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불 또한 훌륭한 상징이다.
쿤달리니는 그대의 내부에서 불처럼 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이 아주 높이 치솟을 것이다. 많은 것이 불에 탈 것이다.
큰달리니의 각성으로 인해 일종의 건조함(dryness)이 초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비해 그대의 퍼스낼리티가. 아주 조화롭게 되어야 하고,
윤택한 특성들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어떤 수로가 개발되어야 한다.
화가 많은 사람을 예로 들어 보자. 그렇지 않아도 그는 메마르고 거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내부에 불이 치솟기 시작하면 그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화학적인 조화가 훌륭하다. 그의 내부에는 부드러운 화학적 조화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쿤달리니 각성으로 인한 역효과가 없을 것이다.
쿤달리니에 관해 예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말은 이런 점들을 상세하게 고려하여 말해진 것이다.
물론 그 말들이 정교하지는 못하다.
이것은 고대에 표현법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접근 방식 또한 서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진실이다. 피와 살, 골수가 불 탈 것이고, 그대는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대의 패턴과 화학 성분이 변화를 겪을 것이다.
구도자는 이것을 마음 속에 새기고 자신을 합당하게 준비시켜야 한다.
-OS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