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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중)저항과 사랑_행8:1~17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22.06.04|조회수42 목록 댓글 0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악한 제도에 대한 저항입니다.

 

2천여 년 전, 그리스·로마 세상(체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성전의 타락에 저항하던 사람들은 광야로 나갑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 보았던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광야에 있다고 여겼을까요(겔47:1)? 제물을 살 돈 없어도 깨끗해진다는 회개의 세례를 받습니다. 도랑같이 흐르는 물 속에 몸을 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물 속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상징했습니다. 노아 시절의 홍수를 추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벧전3:18~21).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다스리던 세상에 저항했던 노아처럼, 바알 아세라처럼 음란하고, 그리스 문화에 물들고, 로마 군단에 굴복한 성전주의자들에 저항하는 표시가 물세례였습니다.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의지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례 받을 때 마음과 의지를 부끄러워해 다시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필요할 수 없지만, 반드시 그래야되는 건 아닙니다. 물세례 말고 성령세례를 받으면 되겠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온 세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성령이 덮치면 경계 너머 사람들마저 사랑하게 됩니다. 심지어 원수마저 사랑합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해도 미워하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직접 보복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하며 보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서 원수사랑은 시작됩니다. 「의로운 사람이 악인이 당하는 보복을 목격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시58:10).」 「멸망할 바빌론 도성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너에게 되갚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시137:8~9).」 하나님에게 원수를 갚아달라고 기도하는 건, 원수를 여전히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도 원수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직접 복수하기를 관두고 하나님께서 복수해주실 기도하는 것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라, 좋아해야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는 ‘광야교회’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빠져나왔던 히브리 사람들이 광야에서 이미 교회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성막을 중심으로, 광야에 모인 사람들이 불과 구름과 연기 사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고,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런 스데반의 생각을 성전주의자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신성모독의 교리를 유지해야 권력과 권위와 부유함을 지킬 수 있었던 성전주의자들이 스데반을 죽입니다. 세례요한은 목 잘려 죽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교회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흩어져야 했습니다. 청년 마가의 집이 기도하는 공간을 내주고, 바나바를 비롯한 사람들이 재산을 내놓아, 꾸린 교회였지만 어쩔 수 없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파친코의 첫 문장입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누군가, 무엇인가, 누군지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망가질 수 있습니다. 상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경계 너머에서 우리는 할 일을 합니다. 갈 길을 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경계 너머 사람들에게 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습니다. 이북과 이남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이주민과 선주민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넘어갑니다. 쫓겨나듯 나선 길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역사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경계를 넘어갑니다. 쫓겨나 가게 된 곳이 경계 너머라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겁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현재와 미래 사이에 경계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그어진 경계를 넘는 게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아무나 현재를 살지 않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 있습니다.

 

체코의 얀 후스는 성만찬 때 포도주를 사제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마시게 했습니다. 현재로 넘어오지 못하고 과거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후스를 죽였습니다. 후스의 스승이랄 수 있는 위클리프의 묘를 파, 그 뼈를 불태워 강에 뿌려버렸습니다.

 

(이하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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