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 여행[경기 고양] 강지선생 묘

작성자광나루|작성시간10.03.09|조회수686 목록 댓글 0

강지선생 묘(고양시 향토유적 2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강지선생 묘역 입구에서 바라 본 묘역군

강지(姜漬, 1453~1517) 선생은 조선조 성종~중종 대의 무신 및 문신으로 자는 덕윤(德潤),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통계공(通溪公) 회중(淮中)의 증손이며, 아버지 영선군(永善君) 이찬(利纘)과 어머니 경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묘역 초입에는 재실과 사당을 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건너편 산에 보이는 묘가 정종의 후궁인 숙의 윤씨 묘입니다.

어릴 때부터 천자영매하여 문(文)과 함께 무예에도 정진, 병서를 통독하고 전술을 연마하여 문무겸전(文武兼全)을 이루었다. 성종 8년(1477) 겸사복, 내금위장이 된 후, 성종 21년(1490) 압록강 변경지대에 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선생을 첨절제사에 제수하여 적의 침입 경로인 고산리(高山里)에 주둔케 하였다.

▲ 강지선생 묘역(무안박씨와 합장) 전경

선생은 부임 후, 방비를 튼튼히 하고 적의 침투를 봉쇄하는데 전력하던 중 이듬해 대거 침입한 적을 맞아 싸워 적병 수천기를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은 고산리 전투의 승첩 후 군공(軍功) 1등으로 3계급을 특진하여 어회장군이 되었다.

▲ 강지선생 묘역 왼쪽에 측면으로 세워져 있는 묘비와 석물 모습

성종 23년(1493) 부친상을 당해 3년 거상(居喪) 후 벽동 및 용천군수를 거쳐 군자감정, 선공감부정, 행락원정 등을 역임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었다. 그 뒤 연산군 11년(1505) 정평부사에 임명되었으나 1년만에 투옥되었고, 이듬해 연산군의 폭정을 제거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 장명등은 후대에 세운듯...

▲ 강지선생 봉분 뒤에서 바라 본 모습

중종 1년 9월, 선생은 반정공신의 한 사람으로 병충분의결책익운정국공신에 올라 영선군(永善君)에 봉해짐과 아울러 기린각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중종 5년(1510) 선생은 강계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계모 연일정씨의 노환 중 봉양을 위해 내직을 희망한 끝에 전보되어 겸사복장 오위장이 되었다.

▲ 강지선생 묘역 뒷편 측면에서 내려다 본 모습

그 뒤 중종 9년 삼척부사로 외직에 나아갔고, 중종 11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중종 12년(1517) 6우러 30일 별세하니 향년 65세였다. 시로는 소정(昭淸),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을 내렸다.

▲ 강지선생 부친인 강이찬 묘도비와 상단에 위치한 부모(경주이씨 합부)이며, 계배 연일정씨는 부좌입니다.

선생의 묘는 정부인 무안박씨(務安朴氏)와 합장되어 있고, 묘 앞에는 묘비, 상석, 쌍사자석등 그리고 좌우에는 촛대석과 문인석이 각기 배치되어 있다. 묘소 앞 측면에 세워진 오석의 신도비는 1959년 봄에 입석한 것으로 ‘김윤동찬 병서(金潤東贊 幷書)’로 되어있다.

▲ 강지선생 부모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신도비는 이수와 귀부를 갖추었으며, 그 규모는 높이 150cm, 폭 75cm, 두께 30cm이다. 한편 선생을 향사하는 부조묘는 본래 금천(시흥군)에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었다. 그 뒤 해주읍에 중건되었으나 국토의 분단으로 후손들이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으므로 1988년 9월 22일 선생의 묘 아래에 재건, 그 현액을 익충사라 하였다.                                         - 묘지 안내판 내용 발췌 -

강지선생 묘역 위치도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산79-1                                                 화살표 ↑ 위치에 강지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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