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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효령대군 이보와 장인 정역(鄭易) 그리고 단종 부부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01.18|조회수806 목록 댓글 0


서울 서초구 법원로 15(서초동) 법원단지 정곡빌딩 서관 입구에 있는 정역(鄭易) 신도비이다.

서초동 법원종합청사와 그 남쪽 일대에 옛날 해주 정씨들이 모여 살던 정곡(鄭谷)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조선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 (集賢殿 大提學)을 지낸 정역(鄭易)의 묘소가 있었다.

이 일대에 법조단지가 조성되면서 정역의 묘는 1984년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고 현재 그의 신도비(神道碑)만 있다.

정역(?∼1425년)은 본관이 해주이고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태종 이방원과 함께 같은 해 과거를 봤던 동기이다.

그는 조선왕조 초기 국정운영에 참여하면서 친구였던 이방원이 개국 초반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도왔다.

이방원은 정역의 딸을 숙의옹주로 삼아 효령대군 이보의 배필로 들인다. 이 가문은 조선왕실과의 끈끈한 유대를 맺었다.

정역은 예조·형조판서와 의정부 좌찬성, 집현전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성품이 근검하고 왕실과 인척관계이지만

교만하지 않고 덕이 많았다고 한다.


해주 정씨들은 정역 사후에도 약 500년동안 그의 묘역 아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이 일대를 정곡(鄭谷)이라고 불렀다.

정곡마을 입구에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낸 백석(白石)정중만 (鄭重萬)이 쓴 정곡(鄭谷)이라는 표석 2개가 있었다.

지금도 정곡빌딩 서관 뒤편에는 '鄭谷"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1979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법원 등이 정곡마을로 이전하면서 그의 묘는 경기도 여주로 이장한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해주 정씨로 시집을 간다. 단종의 정순왕후 송씨가 세상을 떠나자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사를 치르고

해주 정씨 묘역에 안장한다. 그것이 오늘의 사릉(思凌)이다.1984년 사릉묘역의 소나무 두 그루는 강원도 영월 단종의 장릉으로

옮겨 심었다.그토록 이별하고 살아온 단종 부부가 '서로 손잡고 사무친 그리움을 달래라'고 그 소나무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는 아비와 어미를 잃어 천애고아가 된 정미수를 양아들로 삼는다.정미수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이다.

자식이 없던 정순왕후 송씨기 기댈 곳은 미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김별아의 장편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은 정순왕후와 미수의 가슴 저미는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대로 정업원 지붕을 박차고 떠올라,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립니다.찾고픈 혼백이 있어요.잠시나마 해후상봉하고픈

그리운 영혼이 있어요.당신 말고는 아무도 그리워할 수 없게 운명지어진 내게도,일말의 위로인양 살붙이의 은애를

나누었던 상대랍니다.

미수야!미수야!

나는 생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무람없이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내 쉰 목소리가 자욱했던 구름을 흩어놓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그는 이미 중음을 벗어나 다음 생을 찾아 떠났나 보내요.

한편으로 당연하고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이내 목이 메고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지는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머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렇게 불러주는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비록 배를 앓아 낳은 친자식은 아니지만,그가 나를

향해 그 낯선 이름을 부를 때에 나는 지옥의 밑바닥마냥 어두컴컴한 가슴속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신비로운 모성의 빛이 이미 중년이 된 나를 달금한 젖내를 풍기는 어린 어미로 만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몸이 뜨거워졌습니다.마음도 흐늘흐늘 풀렸습니다.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운명 속에서 붙임의 평생을 살아낸 내게

생경한 모성은 예성치 못한 생의 축복이었습니다.

당신은 미수를 기억하시나요?당신이 영월 땅에 유배되어 돌아가시 전년,당신이 그토록 의지하고 사랑했던 누이 경혜공주가 낳은 아들,당신의 조카입니다.그래요,바로 그 피바람 몰아치던 기혹한 때에 고물거리며 태어난 가엾은 생명입니다.

미수의 팔자도 기구하기가 나에 못잖습니다.아버지인 부마 정종은 사약을 받아 죽고,경혜공주는 순천의 관비가 되었지요.경혜공주는 순천부사 여자신이라는 자가 관비의 사역을 시키며 모욕하려 하자 끝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새벽이슬처럼스러져가셨습니다.그 후 아비와 어미를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미수는 기막히게도 원수나 다름없는 세조에게 거두어져 아슬아슬 위태롭게 그만큼이나 자랐답니다.

싹쓸이를 하듯 문종 임금의 혈육을 제거한 후 그나마 세조에게도 일말의 미안함이 있었던지,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부마 정종을 반역자의 명단에서 빼고 아들 정미수를 등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그리하여 미수는 죽은 자의 말에 의지하여 실낱같은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지요.예종 임금 대를 지나 성종 임금이 즉위한 후에는 사족의 신분을 되찾아

해평부원군으로 복원되어 종친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돈령부에 관직을 얻고 마침내 과거 응시도 허락을 받게 되었고요.

그처럼 간신히 지상에 발붙일 땅을 찾고 나서야 미수는 나의 양아들이 되었습니다.숭인동 초막집에서 홀로 스무 해를

기거한 내게 별안간 아들이 생기고 어미라는 벅찬 이름이 생겼습니다.미수의 집으로 이사하여 들어가던 날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나는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던지 흔들리는 가마 속에서 잠시 아무도 모르게 혼절하기까지 하였답니다.

행운보다 불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좋은 것도 마냥 좋을 수도 없고 불안하기만 합니다.언제 어떻게 빼앗겨버릴

행복일지 몰라 그마저도 흠뻑 즐기지 못하고 조바심치기 마련입니다.그래도 가마에서 내려 마당에 첫 발을 내어딛을 때,

섬돌 위를 구르듯 달려 내려와 내 앞에 무릎을 꿇던 미수의 모습에 나는 조마조마한 찰나의 행운이나마 덥석 받아

안기로 작정하고 말았어요.

그의 선량한 머리통과 하얀 버선발에는 자기의 삶이 온전히 제 것이 아니었던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서러운 체념과

달관이 묻어 있었지요.어머니,성심을 다하여 우러러 받들고,욕되이 하지 않으며,정성껏 봉양하겠습니다.누추하기 이를

데 없는 변명 같지만 그래서 나는 살아낼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당신의 목숨을 빼앗고 피의 보탑에 앉은 세조 임금과

냉혈한 권력자였던 정희왕후마저도 용서아닌 용서,화해아닌 화해로 같은 시공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본디 외숙모와 조카 사이에 다름 아닌 나와 미수를 모자의 인연으로 엮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니까요.

세조의 손자인 성종 임금이 뒤늦은 은혜를 배푼 데에는 그를 수렴청정한 대비 정희왕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습니까?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미수를 복권시킨 데에도,역모 죄로 죽은 나의 아비 송헌수의

무고함을 변호하여 동생 송거에게 과거 응시를 허락한 데에도 모두 정희왕후의 입김이 작용했겠지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묵은 원한이 단번에 풀릴 리는 없지만,어찌 되었든 미수와 함께 슬픈 사연을 탯줄 삼아

어미 자식으로 살아낸 삼십여 년은 그럭저럭 행복했습니다.

그가 내게 바친 것은 경전에서 가르치는 효가 아니었습니다.기어이 대를 잇겠노라 양자하여 맺은 법도의 인연이

아니기에,우리는 뜻밖에도 더욱 지극스러운 모자가 되어버렸답니다.

어려서 친부모를 잃은 미수는 늘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드레졌어요.나 역시 칼끝을 걷듯 살아온 인생이기에 누구에게도

쉽사리 본맘을 털어놓기 어려웠고요.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양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나는 당신을, 미수는 경혜공주를,서로가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이야깃거리를 삼아 떠올리지 않았습니다.하지만 미수가 이가 성치 않은 나를 대신해 고기를 씹어 밥 위에 얹어줄 때,그 비린 육찬을 씹어 삼키는 나는 내가 아니라 경혜공주였습니다.내가 첫새벽부터 분주스레 가죽신을 품어 데워 입궐하는 미수의 발치에 내어놓을 때,미미한 온기에도 감격하여 눈물을 삼키던 미수는 미수가 아니라 당신이었습니다.

효라는 것도 결국 정(情)에서 뻗어 나온 가지에 지나지 않을지니,형식이 어찌 되었든 우리에겐 그 울울창창한 연민의 나무가 혈연보다 더 굳센 결련의 뿌리였습니다.그런데 박복한 내게는 자식 먼저 세상을 떠나는 늙바탕의 행운조차 주어지지 않더군요.미수와 나는 함께 늙어가다가 결국 죽음으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외손이나마 그 역시 자식도 없이 문종 임금의 핏줄을 아주 끊고 가는 모습을 보며,나는 또다시 내가 타고난 목숨의 연한이 형벌이 다름 아님을 자책하고 슬퍼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어머니!

모두가 헛된 집착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버겁고 면구한 이름을 한 번만 다시 들을 수 있다면,그래도 살아 비티길 잘 했노라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은데,발버둥치며 떠올라 아무리 높은 곳에서 천지간을 살펴보아도 그 이름을 불러주는 누군가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바싹 옥이어 죄이는 쓰라린 가슴과 함께 내 혼백은 쪼그라져 분꽃 씨앗마냥 까맣게 작아집니다.내게는 그 작은 바람마저도,다만 욕심일 뿐이었을까요? -영영이별 영이별 29쪽~3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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