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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나루 동작진

풍수로 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쌍분묘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0.28|조회수1,042 목록 댓글 0


관악산에서 북쪽으로 내닫는 산세는 서달산 공작봉에서 좌우로 갈라져 현충원을 좌청룡 우백호로 감싸고 있다.

현충원의 주산 공작봉에서 내려오는 생기(生氣)가 제일 먼저 멈추는 곳 그 혈(穴)이다.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의 쌍분묘는 그 높은 곳 혈(穴)자리에 놓여있다.

국가원수 부부는 원래 합장묘로 쓰도록 하고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쌍분묘로 되어있다.

참배객 쪽에서 보면 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이, 오른쪽에 육영수 여사가 각각 영면하고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일생을 싣고있다.그대로 옮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다.
1963년 대한민국 5대 대통령에 취임해 연이어 9대 대통령까지 역임하는 동안
수차례에 걸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산업입국을 다지는 한편,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한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여 가난을 극복하고 ‘하면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일깨움으로서 우리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율곡계획을 집념 있게 추진하여 국방력 증강 및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1979년 10월 26일 서거하여 11월 3일 국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25년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이 된 후 각종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앞장섰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중 북한의 사주를 받은 괴한의 저격으로 서거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이 곳에 안장되었다.

장군봉에서 바라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쌍분묘이다.서달산 공작봉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감싸고 있는 묘자리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를 하고 있는 공작포란형의 국립서울현충원이다.공작이 품고있는 알이 바로 장군봉이다.

참 안정되고 좋아 보인다.소나무와 각종 수림이 경호라도 하듯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묘역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모양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천하의 대길지도 완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명당이라도 반드시 흠이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래서 풍수 고전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완벽할 수 없다(好地無全美)'라는 단서를 단다.부족한 부분을 보완(裨補)해서 쓴다.

아무리 명당이라고 해도 드는 사람에 따라 그 땅의 성격이 다르기 마련이다.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죽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재일 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에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세상을 떠난다.
훗날 박대통령도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그토록 믿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으로 별세한다.

이곳에 묻힌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죽음이 너무도 비극적이었다.그 유자녀 세남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가족의 잇단 불행한 일이 묘자리 탓이라는 생각에 '명당이다''명당이 아니다'라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명당논쟁에 불을 당기곤 했다.

특히 2007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경선에 나섰을 때 수맥이 발견됐다고 해서 보강공사를 했다.

먼저 자리잡은 육영수 여사의 터가 풍수지리상 썩 좋은 자리가 아니어서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 묘를 조성할 때

수백 트럭의 흙을 날라다 풍수를 보강하는 작업을 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명당논쟁은 고개를 숙였다.아버지와 딸을 대통령으로 배출한 터를 놓고

'묘자리가 좋지 않다'는 논쟁을 벌인다는 게 큰 의미가 없어서인지 한동안 그 논쟁을 잠잠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밀려나고 옥중에 갇히게 되면서 그 명당논쟁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앞에 볼록하게 솟은 동동산 장군봉이 현충원의 안산(案山)이다.공작이 품고 있는 알이 안산 바로 장군봉이다.

아주 맑은 날이면 한강이 감돌아 빠져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좌청룡 산맥이 그 한강의 꼬리를 감싸안고

감춰주고 있는 형세를 확인할 수 있다.전형적인 명당의 형세를 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내외 묘자리다.

"정말, 박 대통령 부부 묘에 물이 차는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 묘자리를 놓고 오가는 이른바 '냉혈론(冷穴論)'이 최근 다시 등장한다.

1993년 '육관도사'로 유명했던 손석우씨가 이곳을 가리켜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의 땅"이라고 처음 주장하였다.

 “여기 이 자리는 음양의 교구(交媾)가 안 되는 자리이고 냉혈입니다. 냉혈이니 시신이 썩지 않고, 음양교구가 안 되니

자손이 끊어집니다.딸이라도 시집을 가서 살 수가 없게 됩니다.”(손석우의《터》)

왜 이런 냉혈 논쟁이 나왔을까? 김두규교수(우석대)는 냉혈논쟁이 이렇게 출발한다고 분석한다.

사건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피격되었을 때의 일이다.

청와대는 지창룡씨와 손석우 두 사람에게 장지 자문을 구했다. 이 둘은 라이벌이었다. 다음은 손씨의 증언이다.
 “청와대의 부탁으로 현장에 도착해 보니, 지창룡씨가 먼저 와서 육 여사(그리고 훗날 박정희) 자리를 현재의 이곳으로 정해놓았다. 동행한 청와대 관계자가 나(손석우)에게 의견을 물었다. 나는 ‘시신이 썩지 않는 냉혈’이라고 답변했다.

반면에 지창룡씨는 ‘이곳에 영부인(육 여사)을 묻으면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남북통일을 이루고, 그 아드님은 만주까지 지배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터》)
물론 손씨의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지씨의 주장은 다르다.
 “내가 묘역 조성에 관여를 하긴 하였으나 직접 잡은 자리는 아니다. 육 여사가 저격을 당했을 때 고향집에 있었다.

한밤중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와 육 여사 유택을 봐달라고 하였다. 다음날 현장을 갔더니 묘지 관리소장 이주호씨가 안내를 하였다. 나를 기다리다 지쳐 최 풍수와 남 풍수라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광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청와대 관계자는 내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현장 작업을 내가 지휘하고 육 여사를 안장했다. 그리고 나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했을 때는 무덤 뒤 약한 용세가 마음에 걸려 수백 트럭의 흙을 날라서 비보(裨補)를 했다.”(《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결국은 당대 최고의 술사로 알려진 손씨와 지씨 모두 이곳이 길지가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 이곳은 누가 잡았을까? 손씨는 지씨가 잡았다 하고, 지씨는 최 풍수와 남 풍수가 자리를 잡았다 한다.

그런데 최 풍수와 남 풍수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영원한 미스터리가 될 듯하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천혜의 명당(明堂)에 자리한 민족의 성지이다.서달산 공작봉을 주산(主山)으로 하면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현충원이다.그 북쪽 앞에는 한강이 동쪽에서 출발해서 서쪽으로 힘차게 내닫고 있다.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는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들어섰다.이 이상 더 좋은 명당이 있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풍수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이타심의 최고봉이 모셔진 자리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최창조 교수는 다시 고개를 든 명당논쟁에 대해 현충원에서는 이 논쟁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의 저서 <한국풍수인물사>는 명당론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 땅에도 인간의 의지가 반영된다. 너무 반영되어 '환경오염'에까지 이른 것은

돌이키기 힘든 실수지만, 그 의지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도 상기해 볼 일이다. 줄잡아 2000년 동안이나 찾아낸 명당이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게다가 백두산의 영기를 이어야 할 백두대간은 수없이 많은 곳이 끊겼기에 전통적인

풍수 이론상으로도 명당은 없는 셈이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명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상황이다. 비보裨補라는 풍수 방책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풍수인물사> 162쪽-

"자애성은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분명히 부가 어느 정도면 충분한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자들은 반대라고 한다.
부는 충분한 것이고, 그 충분한 것이 아주 조금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만족스러운 사람은 누구보다도 부유한 사람이다.
명당이란 것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바로 이 땅에 만족하면 그만이다. 자애란 항상 주관적이기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천하에 없는 명당이라 할지라도 명당일 수가 없다. 자신이 아니라고 믿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믿음에도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이 있다." - <한국풍수인물사>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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