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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관련 상식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의 까치

작성자김재훈|작성시간04.08.15|조회수100 목록 댓글 0
2001년 11월 말, 인천공항 여객터미널 내에 서식 중이던 까치가 식당 음식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하여 조류퇴치팀이 생포작전에 나선 적이 있다.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에는 공항개항이전부터 어디에선가 까치 1마리가 날라 들어와 서식하고 있는 모습이 공사관계자 및 개항준비요원들의 눈에 띄었으나 그저 신기한 눈으로만 쳐다봤지 적극적으로 내쫓을려고 하지는 않았다. 까치는 때로는 여객터미널 중앙 밀레니엄홀에 있는 인조 소나무 위에 앉아 있기도 하여 한폭의 그림을 선사하곤 했다.



그러나 까치는 지붕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결국 이 곳에 서서히 적응해가면서 인천국제공항의 터줏대감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도록 서식하다가 심지어는 4층에 있는 조선호텔 식당가에 나타나서는 손님들을 위해 진열해 놓은 사과나 계란말이 등을 쪼아먹는 장면이 여러 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 곳에나 배설을 하는 등 말썽을 부려 인천공항측에서는 까치를 생포해 자연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었다.



제1의 피해자인 조선호텔측의 이야기를 빌리면 천장에 광주리 덫을 놓는 등의 방법을 동원해서 까치를 잡아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인천공항을 관리, 운영하고 있는 인천국제공항공사 조류퇴치팀에 생포를 의뢰했었다. 항공기와 새가 충돌하는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구성된 이 팀은 업무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가 조류생태를 잘 안다는 이유로 생포작전에 앞장서게 됐다.

그러나 생포작전이 전개되었다는 발표와는 달리 이 까치는 상당히 영리해 설치한 쥐덫 등에도 걸리지 않고 오랫동안 터미널 내에서 살아오다가 지금은 4층 조선호텔 파노라마라운지에 직원들의 비호(?)하에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까치 생포작전에 즈음하여 공항공사 관계자는 여객터미널 청사 내에서 총을 쏠 수도 없어 공항 이용객이 없는 한밤중에 덫을 여러 곳에 놓는 방법으로 생포작업을 벌였으나 공항에 상주하는 직원들은 이러한 공항공사측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잡히지 않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작전개시 후 수개월이 지났을 무렵일까 까치는 굶어죽은 것으로 발표됐고 상주직원들은 안타까워했으나 얼마 후 아직도 살아 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분명히 까치퇴치를 의뢰했던 조선호텔 파노라마 라운지에 그것도 조선호텔측의 비호(?)하에 서식하고 있다는 것으로 "까치구경 하러 파노라마라운지에 가자"라는 직원들도 늘었다고 한다. 까치의 존재를 지배인에게 확인해보면 빙그레 웃으며 시인반 부인반이나 천정에는 엄연히 둥지까지 마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까치는 이웃나라 일본인에게 있어 매우 희귀한 존재로 임진왜란때 건너가서 현재는 큐슈지역 후쿠오카 남부와 사가현 동부지역 츠쿠시(筑紫)평야 일대에만 서식하고 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철저히 보호받고 있는 새로 일명 카치가라스(勝ち烏)라고도 부르고 있다. 까치는 일본어에서 "勝ち(카치)", 즉 "승리"를 뜻하는 단어로 1592년4월1일, 코니시유키나(小西行長)가 부산포로 상륙하여 막사를 치고 있는데 까치 떼가 날아들어 "까치까치(이겨라 이겨라)"로 울어대어 일본군의 사기(?)를 높여 최대의 길조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철수 시에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특별명령에 따라 이 "승리의 새" 까치를 데리고 갔으며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 국어교과서에 "까악 까악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지요"라고 배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에 "배신을 때린" 배은망덕한 녀석들인지 모르겠다. 까치에 대해 일본의 서적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별명이 "승리까마귀", "조선까마귀" 이며 현재 일본에 번식하고 있는 것은, 16 세기말 무렵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원정 때에 일본에 데리고 온 것이 효시인데 그 울음소리가 "이겨라", "승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까치는 후쿠오카(福岡)남부와 사가(佐賀)동부일대의 츠쿠시(筑紫)평야지대에만 번식하고 있다는 점. 비거리는 전신주 2개분 정도로 더 이상 멀리 날 수 없다. 사가시내에는 전신주에 둥지를 트고 있는 풍경이 흔히 눈에 띄는데 일단 이 일대를 벗어나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거리가 짧아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신기하게도 이 평야지대 내에서만 살고 딴 곳으로는 아예 움직일 생각도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헤이안시대(平安, 794∼898)의 우리나라의 시조(時調)에 해당하는 일본와카(和歌, 통상 31자의 짧은 시로 일본에선 국시(國詩) 로 불린다)에 오작교니 하는 노래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그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확실한데 어느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日本書記에는 스이코(推古)천황 6년(559년) 4월에 신라에서 건너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때 풀어놓은 곳은 지금의 오오사카 남바(難波)일대로 전해지며, 상당기간 알을 낳고 서식하였으나 끝내 정착하지 못하고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 직후에 다시 건너갔는데 이번에는 부산지역과 기후가 비슷한 큐슈지역을 서식처로 정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좁은 츠쿠시평야에서 벗어나지 않고 서식하고 있는 것이 설마하니 잃어버린 고향의 슬픔과 과거 자기들이 저지른 "배신행위"에 대한 자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어떤 이유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앞으로라도 인천공항의 수호조(守護鳥)가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 간절하다.

www.airport11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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