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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중국 공군, 일본 본토를 폭격하다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10.22|조회수788 목록 댓글 1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기를 제작하여 비행에 성공하죠. 그 직후 전세계에서 경쟁적으로 너도나도 비행기 제작에 도전하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중국에서도 1910년 경에 최초의 비행기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중국에서 최초로 제작한 국산비행기라는군요. 밑에는 손문과 송경령이 인증샷중.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전국에 대소군벌들이 할거하면서 치열한 내전을 벌입니다. 덕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의 재고 무기를 중국에서 대거 처분하여 많은 돈을 벌죠. 중국 군벌들은 경쟁적으로 신형무기인 전차, 항공기를 수입하여 전쟁에 사용합니다. 물론 유럽에 비하면 그들의 사설 공군은 규모도 작을 뿐더러 실력도 형편없었지만요. 장작림의 봉천군의 비행대가 가장 규모가 컸고 장개석의 북벌군 역시 손문의 호를 딴 "중산항공대"라는 이름의 비행대를 편성하여 정찰과 지상폭격 등에 활용하죠. 규모는 약 40여대정도였다고 합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중국과 소련은 중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함과 함께 소련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됩니다. 소련은 극동에서 일본을 견제한다는 안보적 목적이 있었기에 장개석이 반공정책을 고수하는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원조하죠. 특히 하늘은 소련의 대리전쟁이나 다름없었을만큼 최신 전투기와 파일럿들이 대거 파견되어 중국 공군을 육성하고 중국 공군과 연합해 일본과 전쟁을 벌입니다. 핀란드처럼 만만하다 싶은 상대는 망설임없이 공격하는 반면,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남을 앞세워 대신 싸우게 하는 것이 스탈린 특유의 방식이죠. 스페인내전, 한국전쟁에서도 소련공군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달고 참전합니다. 

 

중일전쟁중 전략폭격을 감행하다 격추되거나 불시착하여 포로가 된 일본인 파일럿들입니다. 중경을 비롯한 중국 내륙 깊숙히 전략폭격하는 것은 일본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소련의 원조를 받은 중국 공군 또한 만만치 않아 일본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제로기가 등장하면서 쌍방의 균형은 깨졌고 중국 공군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습니다. 이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미 공군이 본격적으로 중국 전선에 투입되는 1943년 이후에 와서야 중국의 제공권은 중미연합공군에게 넘어가죠.

 

중국 공군의 창설부터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에서의 공중전, 1930년대 중반 중국 공군의 비약적인 성장, 중일전쟁중 양공군의 치열한 혈전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중간 중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공중전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전에 제가 중일전쟁을 연재하면서 간략하게 다룬 적이 있지만 중일전쟁중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를 습격한 사건에 대해서 이 책에서도 2페이지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

 

1938년 5월 20일. 소련제 투포레프 SB-2 폭격기(중국에서는 馬丁重爆이라고 명명) 2대가 중경에서 출격합니다. 편대장 서영승의 지휘하에 6명의 승무원은 두달간의 훈련을 받았고 당일날 한구 비행장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은후 다시 출발하여 달빛 아래 중국 상공을 횡단합니다. 이들은 일본군이 점령한 주산열도를 거쳐 동북 방향으로 비행하였고 한밤중에 큐슈의 구마모토 상공에 도착합니다. 그들이 구마모토에 떨어뜨린 것은 폭탄 대신 "평화"와 중국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100만장의 삐라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은 채 무사히 귀환하죠. 이 사건은 일본에게는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었고 방공망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는 체면때문에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방공망을 강화하거나 아무런 대응책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4년후 두리틀 폭격대의 동경 폭격이었죠.

 

사실 중국이 왜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는지는 의문입니다. 삐라따위로 일본 국민들이 새삼스레 동요할리도 없는데 말이죠. 무한 보복이 두려웠던 것인지. 일본의 방공망이 얼마나 구멍 투성이인지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중국 공군도 이런 야심찬 계획을 두번 다시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해암 안병무 선생 역시 "왜 애써 그기까지 가서 왜놈들 머리위에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았는가"라고 한탄했습니다. 만약 중국 공군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다면 일본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겁니다. 대신 그 반작용으로 일본 본토의 방공망이 강화되어 두리틀 폭격대는 실패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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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 지옥같은 행성 | 작성시간 13.10.22 공항손실과 주행거리 부족으로 다시 시도할 여력이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삐라를 뿌린것을 볼때 공격해서 단일된 적보다는 국론분열을 노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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