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지도자는 무력합니다. 병으로 고통 겪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만 치료하지 못합니다. 아주 가끔, 기도를 해서 나은 성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목사가 된 2007년 이후 기도했을 때, 저도 잘 모르겠는 왈칵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 게 두 번 있었습니다. 어려운 병이었지만, 두 사람은 치료됐습니다. 기도 때문에 치료된 건 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저에겐 병 고치는 은사가 없습니다. 수 백 명 환우를 위해 기도했지만, 제 기도 때문에 치료된 건 아닙니다. 저는 병 낫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무력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픈 사람들 얼굴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 기도는 마술을 부리지 못합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에게 치유하는 은사가 있어,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병들을 고칠 수 있다면, 민들레교회는 융성하지 않을까요. 예배드릴 공간이 좁게 되지 않을까요.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서지 않을까요.
옛날 성전 남서쪽엔 “나팔 부는 곳”이 있었습니다. “유대교 성일들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성전 근무자가 이곳에서 천체를 적절히 관찰하고 나팔을 불어 안식일이나 다른 절기의 시작을 공동체에 알렸습니다. 1세기에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남쪽과 서쪽 산지에 정착했기 때문에, 이 지점은 사람들에게 선언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배리 베이첼 편집, LEXHAM 성경지리주석)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잘 볼 수 있는 성전 꼭대기에서 예수께서 뛰어내리고 천사들이 예수를 받아 안아 공중을 부양하는 기적을 시전한다면, 예수야말로 그리스도임을 극적으로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타락한 성전을 일소하고, 로마 군대에 저항할 의병 지도자로 전격 추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나 보이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금식 기도할 때도 티내지 말라 하십니다(마6:16). 사람들 앞에 나타나 기도하기보다 골방에 숨어 기도하라 하십니다(마6:6). 종교인으로 구별될만한 옷도 입지 말라 하십니다(마23:5). 자기 열심과 능력을 뭇 사람들 앞에서 증명하는 걸 예수는 경계하십니다. 이런 예수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는 당대 사람들이 기대하던 그리스도상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십자가를 지라 하십니다. 예수 자신도 실패하고, 예수를 따르는 이들도 실패하라 권합니다. 세상에 지겠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패배자로 살다가 죽겠다고 합니다.
이런 예수께서 경영하셨던 인생을 오롯이 따르기란 버겁습니다만, 적어도 자기 유능함을 과시하는 건 곤란하겠습니다. 또렷한 주장을 펴 상대를 제압하려는 태도를 버려야겠습니다. 져 주겠습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 진부한 말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부모를 따르는 시기가 있습니다. 부모에게 져주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런 어린 아이의 것입니다. 부모는 나이 들면 청년이 된 자식들에게 져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져주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에게 져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목사에게 져주어야 합니다. 져주어야 저주에서 멀어지고 행복에 가까워집니다.
이겨왔다면, 성찰하겠습니다. 나에게 져주었던 사람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배우자가 여태 져주었기에 이겼던 겁니다. 자식이 져주었고, 부모가 져주었음을 기억하고, 여태 이겨왔다면, 회개하겠습니다. 무력한 사람으로서 그저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신뢰하겠습니다. 이기지 않는 무력함이 신성입니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무력하셨던 예수가 우리 그리스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