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달마 한 조각을 찢어 옮깁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자아’나 ‘우리 마음’과 ‘우리 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계속 변하고 있는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인 ‘아비담마’에서는 삶의 모든 현상을 정신적인 현상(나마)과 물질적인 현상(루빠)으로 나눠 열거하고 분류하고 있다. ‘봄[眼識]’은 정신현상(나마)이며, 눈의 문을 통해 형상을 지각한다. 보이는 대상인 형상[色]은 물질현상(루빠)이며, 이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으며 인식의 대상이 된다. 형상이 감지되어지는 눈의 문으로 기능하는 눈의 감성 역시 물질이다. 형상[색], 소리, 냄새, 맛, 접촉대상 이런 감각대상인 물질들과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감성기관들도 물질로서,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현상의 조건이 된다.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
마음과 물질은 궁극적인 실재다. 우리는 궁극적 진리(실재)와 관습적인 진리(실재)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관습적인 진리란 사람, 나무 또는 동물과 같은 개념들의 세계다. 불교에 대해 배우기 이전에는 관습적인 진리, 즉 개념의 세계만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진리였다. 빨리어로 ‘빤냐띠’라는 개념의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유용하다. 이 단어는 어떤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명칭이나 용어를 나타낸다.
또한 단어에 의해 전달되는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이름은 개념이며 또 ‘나무’라는 말에 대해 형성된 생각도 개념이다. 소위 말하는, 나무를 만지면 ‘물질의 성질’(이하 물성으로 줄임) 중 하나인 ‘단단함’을 경험할 수 있다. 눈을 통해서는 단지 형상이라는 물성만 인지하게 된다. 형상과 단단함은 궁극적인 실재이며, 각각 그들 자신의 고유한 특성들을 갖고 있다. 이런 특성들은 변하지 않으며, 이름 붙이지 않아도 지각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붙인다 해도, 형상은 항상 형상이며, 단단함은 항상 단단함일 뿐이다.
온종일 우리는 수저나 접시 또는 의자와 같은 사물을 만진다. 우리는 다양한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즉각적으로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봄(안식)’이나 ‘몸의 감성을 통해 감촉대상을 경험함[身識]’과 같은 감각인지를 한 뒤에 이전의 경험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복잡한 과정이 있으며, 이런 순간들은 매우 빠르게 차례대로 연이어 일어난다. 개념은 생각을 통해 떠오른다.
우리는 사물의 형태와 모양을 기억해 어떻게 다른지, 무엇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안다. 관습적 실재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관습적 진리의 세계를 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순간들 사이에도 궁극적인 실재인 마음과 물질에 대한 깨달음을 계발시킬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을 계발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한다든가 남을 돕거나 타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든지 하는 일상적인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받는 사람과 같은 관습적 실재를 생각할 수 없다면 관용의 행위는 행해질 수 없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에 대한 깨달음을 계발하면 절대적 진리와 관습적 진리를 구별할 수 있다.
후대 인도에서 저술된 아비담마 개요인 <아비담마타상가하>에서는 ‘개념이란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볼 때, 우리는 사람들의 투영된 이미지를 보는데, 눈의 감성을 통해 색상이 보일 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난 사람을 볼 때, 눈의 감성을 통해 형상만이 경험될 뿐이다. 궁극적 관점에서 사람은 없다. 비록 그것들이 정말 진짜같이 보일지라도 실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가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이란 실재들의 일시적인 결합이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과 물질일 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들의 집합체에 집착하는 한, 이것들을 견고한 ‘전체’로 여긴다. 마음과 물질의 생기고 사라짐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자아의 존재가 있다고 계속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