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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마음, 몸은 계속 변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신문기사글

작성자조성래|작성시간14.11.21|조회수138 목록 댓글 1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위오기 교수님의 아비달마에 관한 번역문을 읽기 쉽도록 손을 봐서 올립니다.

 

자아·마음·몸 … 계속 변하는 줄 알아야

붓다의 물리학_들어가기

위오기 교수(공주대) | webmaster@hyunbul.com

현대불교신문 승인 2014.01.13

 

마음과 물질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 깨닫지 못하면

영원한 자아의 존재 있다고 믿게 돼

 

마음과 물질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자아’라는 잘못된 견해 뿌리 뽑을 수 있어

 

붓다의 가르침 ‘아비담마’ 공부 목적은

번뇌 뿌리째 뽑고 지혜 계발하는 것

 

정신과 물질현상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오감과 마음을 통해 경험한 것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것들은 모두 조금도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국 이별해야 하고 재산도 가지고 떠나지는 못한다. 집착이 슬픔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집착하는 그 순간에는 만물이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를 우리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즐거운 대상들을 원하며 ‘자아’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각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자아’나 ‘우리 마음’과 ‘우리 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계속 변화하고 있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인 ‘아비담마’에서는 삶의 모든 현상을 정신적인 현상(나마)과 물질적인 현상(루빠)으로 나눠 열거하고 분류하고 있다. ‘봄[眼識]’은 정신현상(나마)이며, 눈의 문을 통해 형상을 지각한다. 보이는 대상인 형상[色]은 물질현상(루빠)이며, 이는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으며 인식의 대상이 된다. 형상이 감지되어지는 눈의 문으로 기능하는 눈의 감성 역시 물질이다. 형상[색], 소리, 냄새, 맛, 접촉대상 이런 감각대상인 물질들과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감성기관들도 물질로서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현상의 조건이 된다.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관계돼 있다.

 

마음과 물질은 궁극적인 실재다. 우리는 궁극적 진리(실재)와 관습적인 진리(실재)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관습적인 진리란 사람, 나무 또는 동물과 같은 개념들의 세계다. 불교에 대해 배우기 이전에는 관습적인 진리, 즉 개념의 세계만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진리였다. 빨리어로 ‘빤냐띠’라는 개념의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유용하다. 이 단어는 어떤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명칭이나 용어를 나타낸다.

 

또한 단어에 의해 전달되는 생각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이름은 개념이며 또 ‘나무’라는 말에 대해 형성된 생각도 개념이다. 소위 말하는, 나무를 만지면 ‘물질의 성질’(이하 물성으로 줄임) 중 하나인 ‘단단함’을 경험할 수 있다. 눈을 통해서는 단지 형상이라는 물성만 인지하게 된다. 형상과 단단함은 궁극적인 실재이며, 각각 그들 자신의 고유한 특성들을 갖고 있다. 이런 특성들은 변하지 않으며, 이름 붙이지 않아도 지각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붙인다 해도, 형상은 항상 형상이며, 단단함은 항상 단단함일 뿐이다.

 

온종일 우리는 수저나 접시 또는 의자와 같은 사물을 만진다. 우리는 다양한 사물들이 무엇인지를 즉각적으로 안다고 믿는다. 그러나 ‘봄(안식)’이나 ‘몸의 감성을 통해 감촉대상을 경험함[身識]’과 같은 감각인지를 한 뒤에 이전의 경험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복잡한 과정이 있으며, 이런 순간들은 매우 빠르게 차례대로 연이어 일어난다. 개념은 생각을 통해 떠오른다.

 

우리는 사물의 형태와 모양을 기억해 어떻게 다른지, 무엇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안다. 관습적 실재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관습적 진리의 세계를 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사고하는 순간들 사이에도 궁극적인 실재인 마음과 물질에 대한 깨달음을 계발시킬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을 계발시킨다고 해서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한다든가 남을 돕거나 타인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든지 하는 일상적인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받는 사람과 같은 관습적 실재를 생각할 수 없다면 관용의 행위는 행해질 수 없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에 대한 깨달음을 계발하면 절대적 진리와 관습적 진리를 구별할 수 있다.

 

후대 인도에서 저술된 아비담마 개요인 <아비담마타상가하>에서는 ‘개념이란 실재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볼 때, 우리는 사람들의 투영된 이미지를 보는데, 눈의 감성을 통해 색상이 보일 뿐,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난 사람을 볼 때, 눈의 감성을 통해 형상만이 경험될 뿐이다. 궁극적 관점에서 사람은 없다. 비록 그것들이 정말 진짜같이 보일지라도 실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는 우리가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이란 실재들의 일시적인 결합이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과 물질일 뿐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대상들의 집합체에 집착하는 한, 이것들을 견고한 ‘전체’로 여긴다. 마음과 물질의 생기고 사라짐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자아의 존재가 있다고 계속 믿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은 ‘번뇌의 뿌리뽑음’이 목적

 

궁극적인 실재는 무상해서 매우 빠르고 쉽게 생겼다 사라진다. 그러나 사람과 사물이라는 개념은 생기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궁극적 관점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의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은 개념이 아니라 통찰지혜의 대상들이다.

 

팔정도를 계발하는 목적은 무상(매우 빠르고 쉽게 변함), 고(불만족), 무아(고정불변 실체가 없음)라는 특성을 가진 궁극적인 실재를 알기 위해서다. 개념과 궁극적 실재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팔정도는 계발되지 않는다.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이해[正見], 즉 ‘마음과 물질에 대한 바른 지혜’는 그것들에 대한 ‘바로 있는 그대로의 알아차림’에 의해 계발된다. 그러나 이는 어려워서 매우 점진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다섯 감성의 문이나 마음의 문 중 어느 하나의 문을 통해 어떤 대상이 나타날 때, 나타남과 동시에 바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전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물질에 대해 공부하면, 이런 대상들이 경험되는 다섯 감성의 문이나 대상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다. 대상과 문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으면, 대상이 나타나는 그 순간에 그 실재를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마음과 물질에 대한 공부는 나중에 바로 알아차림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물질에 대한 공부는 물리학이나 의학에 대한 공부가 아니다. 마음과 물질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은 ‘자아’라는 잘못된 견해를 뿌리 뽑고 번뇌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물들을 소유한 ‘자아’라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그런 생각은 탐욕과 질투를 야기시켜, 심지어는 도둑질이나 살생과 같은 악행까지도 하게 한다. 번뇌를 한 순간에 뿌리 뽑힐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육문 중의 어느 하나를 통해 한 순간에 오직 하나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불변하는 자아나 어떤 사람 또는 실체라는 견해에 덜 집착하게 된다.

 

붓다가 남기신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다. 율장(위나야), 경장(숫딴따), 논장(아비담마)다. 이 셋은 ‘번뇌를 뿌리뽑음’이라는 같은 목적이 있다. 인용한 경전들 속에 아비담마도 또한 있다. 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하나다.

논장은 궁극적 의미에서 삶이란 적당한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사람이나 자아로 알고 있는 것은 마음(찟따),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정신적 요소인 마음부수(쩨따시까) 그리고 물질적인 현상인 루빠일 뿐이다.

 

마음과 마음부수는 정신현상이며 그것은 대상을 인식한다. 반면, 물질현상은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 마음은 오감을 통해 물질인 대상을 경험한다. 대상뿐만 아니라 오감도 또한 물질이다. 마음이 대상을 경험하는 도구인 오감을 문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거나 들은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은 감각의 문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라는 또 다른 문을 통해 대상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여섯 개의 문이 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통해 개념뿐만 아니라 정신현상과 물질현상이라는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은 오직 하나의 대상을 경험하고 사라지며, 다음 마음에 의해 연속된다. 우리는 보고 들을 수 있는 하나의 마음이 영속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순간에 오직 하나의 마음만 있다. 어떤 한 순간에 보는 마음이 있고, 다른 순간에 듣는 마음이 있으며, 또 다른 순간에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의 삶은 연이어 일어나는 끊어지지 않는 마음의 연속이다.

 

마음은 유익한 마음(꾸살라?따)이거나, 해로운 마음(아꾸살라?따)이거나, 또는 유익한 마음도 해로운 마음도 아닌 마음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보는 마음은 유익한 마음도 해로운 마음도 아닌 오직 눈의 문을 통해 보이는 대상을 경험하는 작용만 한다. 보는 마음이 사라진 후 대상[색]은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에 의해 경험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이 여섯 문 중 어느 하나에 부딪치면 여러 가지 유형의 마음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이것들이 다 그 대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들은 그 과정에서 특정한 순서로 일어나며 그것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막을 자아는 없다. 일련의 과정으로 일어나는 마음들은 오감의 문과 마음의 문 중 어느 하나를 통해 대상을 경험한다.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이 일어나지만, 각각의 마음은 그와 대상을 공유하지만 고유한 기능을 하는 여러 가지 정신적 성질들인 마음부수들을 동반한다. 느낌이나 인식과 같은 어떤 마음부수들은 모든 마음에 동반되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해로운 마음부수는 해로운 마음에만 동반된다. 반면 아름다운 정신적 성질들인 아름다운 마음부수들은 유익한 마음들에 동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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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21 위오기 교수님은 부산대 선배님이신데, 어려운 아비달마를 번역하시느라 수고가 너무나 많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비달마는 그 내용이 어렵거든요. 그래서 번역은 더 어렵고, 또 물리학자는 언어표현에 약할 수 있잖아요. 불교용어에 대한 정확한 개념 없이 번역하면 어려운 글이 될 수 있는데 위오기 교수님은 너무나 수고가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들 읽어드려야 하는데, 사람들은 낯선 내용이라 어려워하고, 또 내용이 있는 것은 잘 안읽으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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