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논산 조선 후기 소론 영수 명재 윤증(1629~1714) 고택이다.
그의 사랑채는 대문이 없다. 솟을대문은 사대부 집 상징이다. 그런데 이 집에는 대문이 없다.
대문이 없으니 담장도 없다. 뚫린 길에서 곧장 마당이 나오고 그 고택의 사랑채가 노출돼 있다.
가을 추수를 하고 곡식을 마당에 쌓아 놓았다.마을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는 곡식이다.
그 집주인 명재 윤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조정의 벼슬 부름에 20번이나 수락하지 않았다.
그의 벼슬 거부이력은 다음과 같다.
38세에 공조 좌랑, 39세에 세자익위, 40세에 전라도사, 41세에 사헌부 지평, 44세에 사헌부 장령, 45세에 집의,
53세에 성균관 사예, 54세에 경연관, 55세에 장악원정과 호조참의, 57세에 이조참판, 68세에 공조판서와 우참찬,
69세에 제주, 70세에 이조판서, 73세에 좌참판, 74세에 좌찬성, 81세에 우의정, 83세에 판중추부사 등이다.
우의정을 사양하는 상소는 열여덟 번이었고, 판중추부사 사임 상소는 아홉 번이었다.
우의정 자리도 거부하는 그를 보고 당시의 인심은 ‘백의 정승’이라는 칭호를 붙일 정도였다.
조선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끊임없는 당쟁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묘안을 짜냈다.
숙종은 한 마디로 당대의 명망 있는 정계 원로 3인을 초빙해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을 도모하겠다는
획기적인 정치실험의 모험을 한 것이다.숙종이 염두에 둔 원로 3인은 우암 송시열, 남계 박세채, 명재 윤증이었다.
이른바 숙종의 ‘삼인동사’(三人同事)이다. 이들 중 주목해야 할 두 인물은 남계 박세채와 윤증 명재다.
두 사람은 재야에 머물면서 정치권을 멀리한 존경받던 학자들이다.
특히 명재 윤증은 조정의 꾸준한 입각요청에도 변함없이 거부해왔던 지조 높은 선비였다.
1680년 경신년 남인에게 넘어갔던 정권이 서인에게 돌아왔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했다.
3년 뒤 숙종은 정계를 떠나 있던 서인 지도자 3인을 불렀다. 송시열, 박세채, 윤증이다.
박세채에 이어 송시열이 입경했다. 과천에서 대기 중인 윤증에게 박세채가 가서 복귀를 청했다.
여기서 과천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자리한 곳에서 삼풍아파트 근처를 말한다.
1914년 측정한 지도에 나오는 이곳 명달리다. 명덕리 명월동 명촌리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안정(安定) 나씨 집안의 세거지다.
우암 송시열은 도성으로 들어갈 때 나씨의 별서에 묵었고 명재 윤증도 가끔 이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때 윤증과 박세채와의 대화다.
"(그릇되게) 추록한 공신을 삭제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데, 형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외척의 당파를 물리칠 수 있는가?" "
할 수 없다."
"지금 (송시열이 지배하는) 세상이 의견을 달리하는 자를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를 두둔하니 이런 풍습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윤증이 박세채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조정에) 들어갈 길이 없다."
윤증은 고향 논산으로 돌아갔다.('연려실기술', '강상문답')
명재 윤증은 조정 입각을 심각히 고민하던 차에 최후의 결단에 앞서
남계 박세채와 과천에서 만나 입각의 전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 정권을 빼앗긴 남인의 한(恨)을 풀어줘야 한다.
둘째, 숙종의 외척들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
셋째, 당파가 다른 이를 배척하고, 자기 당에만 복종하는 자만을 등용하는 잘못된 정치풍토를 쇄신해야 한다.
남계 박세채는 명재의 제안을 고심하더니 세 조건 모두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명재 윤증은 “이 세 가지 조건이 불가능하다면 입각할 수 없다”며 출사를 포기하고 낙향했다.
남계 박세채도 미련 없이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두 사람의 회동 결과를 기다리던 우암 송시열도 화양동 계곡으로 낙향했다.
결국 숙종의 야심찬 정치실험인 ‘삼인동사’는 실패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