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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광복군 김준엽(金俊燁)의 '장정(長征)'

작성자조영희|작성시간18.12.03|조회수374 목록 댓글 1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아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진리·정의·선은 반드시 승리한다”

김준엽(金俊燁, 1920년 8월 26일 ~ 2011년 6월 7일)은 '이 시대의 지성을 밝혀나갈 지표를 제시한 마지막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으로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였다.그가 생전에 집필한 그의 자서전이자 역사서 <장정>에 그의 삶을 담겨있다.

그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통일원장관 제의 사양을 시작으로 총리직 3번을 포함해 12번의 관직을 사양해 '고사 총리'의

별명을 갖게 된다. 
"독립운동가·교육자.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 시절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이후 교육에 뜻을 두어 중국국립 동방어문 전문학교 한국어강사를 시작으로,

해방 후에는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밖에 월간 <사상계>의 편집위원 및 주간, 유엔총회 한국대표 및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 공산권연구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중국최근세사>·<중국공산당사>.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등이 있다."-Daum 백과에서

김준엽은 1920년 평북 강계 출생으로 신의주고보(新義州高普)를 졸업하고 동경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찾고자 역사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사가 부족해

학병을 징집하고 있었고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독립군에 합류하려는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지못한 척 징집에 응했다. 이듬해 그는 중국 쉬저우(徐州)로 배치됐다. 운 좋게도 미 해군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부대에 신병 10여명을 남기고 모두 작전에 동원했다. 기회를 엿보던 김준엽은 새벽녘에 탈출에 성공한다.


광복군 시절 김준엽(가운데)

“나는 학병으로 나가 중국 전선으로만 간다면 일군을 탈출하고

내가 동경하던 우리의 독립군, 우리의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장정> 1권 65페이지

“나는 성공했다. 자유의 몸이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장정>1권 171페이지

그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학병탈출 제1호), 장준하 등과 함께 린취안(臨泉)을 거쳐 중칭(重慶)으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했다.김준엽이 충칭에 닿았을 때 일행을 맞은 김구 주석은

이런 말을 남긴다.
“일제 폭정 밑에 온 국민이 일본인이 된 줄 알고 염려했더니 그것이 한낱 기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왜놈들에게 맞서 이렇게 용감하게 탈출해서 이곳까지 찾아와 주었으니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숭엄한 조국 혼이 살아있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945년 광복군이 미국전략정보기관(Office of Strategic Service/OSS)과의 합작으로 계획한 국내진공 유격훈련을 받던 중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광복군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총사령관 이범석의 부관으로 선발대가 되어 1945년 8월 18일

여의도에 도착했으나 미극동군사령부의 종전처리 지연으로 뜻대로 임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하루만에 다시 출국하게 되었다

1945년 귀국을 앞둔 20일 동안 김준엽은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한다. 김구 선생이 ‘함께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부탁 했다.

그는 학문에 대한 관심과 대학을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학계를 택한다.


1974년 봄, 김준엽 교수의 동양최근세사 강의실.
교실에 모인 학생들은 약간 들뜬 기분으로 김 교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 교수가 나타나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아침 조간신문에 김 교수가 통일원장관 입각 요청을 거절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유신시대의 민심이었다.

촉망받던 지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유신독재정권에 발탁돼 고관이 되는 세태에 실망하던

차에 김 교수의 장관직 거절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6월항쟁 끝에 6.29선언이 나오고 대통령 직선이 실시됐다.
대선을 앞두고 먼저 김영삼 후보측이 학문에 몰두하던 김준엽 총장 영입에 나섰다.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 총장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힐 계획이니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들어와 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계나 관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김준엽의 결심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이번에는 김대중 후보측에서 사람을 보내 제안을 했다.
"평화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들어와 대선을 돕다가 김 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는 것이 총재의 구상입니다"
김준엽은 김영삼 후보에게 밝힌대로 절대 공직을 맡을 생각이 없고, 지금이라도 야당후보 단일화에 힘을 쏟으라고 당부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이번에는 노태우 당선자가 만나자고 해서 안가를 방문했다.
훗날 김준엽은 이렇게 회고했다.
"노태우 당선자에게 내가 국무총리를 사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 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는다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의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김준엽은 끝내 벼슬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학자의 길을 고수한다.

1982년 6월 김상협 총장이 임기 만료를 두달 앞두고 국무총리로 취임한다.

그 뒤를 이어 김준엽 교수가 제9대 총장에 오른다.그가 총장 취임한 날 생긴 유명한 일화다.

하루는 학교 서무과에 노인 한 분이 방문해 "실례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서무과 직원에게 뭘 부탁하려고 했다.

서무과 여직원이 달갑잖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지만 지금 신임 김준엽 총장 취임식이 있어 저희가 정신이 없어요"라고 응답했다.

 그 때 그 노인이 "그러시군요, 제가 그 김준엽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통에 학교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총장 취임을 그렇게 하신

김준엽이다.

7월 10일 총장으로 첫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김준엽 총장은 가족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첫째, 결코 비굴한 행동을 하면서까지 총장 자리에 남아 있지 않겠다.

둘째, 총장으로서 업적을 내지 못한다든지 또는 업적을 낼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자리에서 물러나겠다.

광복군 출신의 강직한 학자 김준엽이 총장생활 하루를 보내보니 이 분위기에서 4년 임기를 채우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취임 후 김 총장이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총장 비서실에 진을 치고 앉아 온갖 간섭과 협박을 일삼던 기관원들을 쫒아낸 일이다.
당시에 보안사, 안기부, 치안본부, 시경, 성북경찰서, 문교부 감시원으로 구성된 이들 기관원들은 총장실에 죽치고 앉아 학교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내가 대학에 막 들어갔을 무렵 대학가는 안팎으로 시끄러웠어. 정권에 맞서는 학생운동도 활발했지만

‘학민싸움’ 즉 학교 당국에 반대하는 학내(學內) 민주화 투쟁도 그에 못지않았지. 그래서 각 학교의 총장실은

무시로 학생들에게 점령당하기 일쑤였단다. 그런데 고려대학교는 조금 달랐어. 학생운동 활발하기로는

어느 학교에 뒤지지 않았던 고려대학교였지만 1989년 이전까지는 총장실 점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데에는 고려대학교 제 9대 김준엽 총장이라는 큰 이름이 버티고 계시지."

인터넷에서 본  '김준엽 총장 이야기,이 땅의 아들과 딸에게'의 일부다.그 글을 통해 총장 김준엽의 면모를 살핀다.

이분은 일제 말엽 학병에 끌려갔다가 탈출, 광복군의 일원이 된 독립운동가이셨고, 중국사에 정통한 역사학자이시며

동시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의 파도 속에 뛰어든 제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진정한 교육자셨어. 이분의 일생을

설명하기엔 이 지면이 너무나 짧으니 1980년대 고려대 총장으로서의 그분의 모습을 잠깐 얘기해 주려고 해.

총장은 밤새 학교에 머물며 경찰 당국을 설득했고 결국 농성 학생 전원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단다. 저 서슬 푸른

빛나리 대통령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해피 엔딩은 현미경으로 들여 봐도 찾기 어려워. 하지만 정권측에서 봐서는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었지.

1984년 11월 당시 대학생들이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당사를 기습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어. 여당의 본부가 학생들에

의해 일순 장악된 셈이니 정권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곰보로 만들고도 남았지. 당시 권익현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의 말은 이랬다.
“폭도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야! 전기 끊고 물 끊어!”

글쎄 누가 폭도였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겠지만, 아무튼 학생들은 경찰들 손에 질질 끌려나와 곤죽이 되도록 맞고

감옥에 갇혔어. 정부는 그에 그치지 않고 각 학교에 “관련학생 전원” 제적을 요구한다. 여기에 분연히 맞선 게

김준엽 총장이셨어. 몇일 몇시까지 제적을 강행하라는 문교부 (그때는 이렇게 불렀어)의 요구에 김준엽 총장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고려대 학칙에는 총장에게 그런(자신의 뜻대로 학생들을 제적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학칙에 따른 소정의 절차를 따를 겁니다. 제적이든 퇴학이든 검찰조사가 끝나고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후에

그 판결을 토대로 할 겁니다. 법적으로 일하겠다는 것이 반정부라면, 우리 정부는 무슨 정부란 말이오?”

전두환 정권은 이런 꼬장꼬장한 선비를 고려대학교 총장 자리에 앉혀 둘 인내심을 포기하지.

문교부는 거의 모든 학교에서 관행처럼 돼 있던 교직원 자녀 특례 입학 사례를 핑계 삼아 총장에게 책임을 물었고,

1985년 2월 고려대 9대 총장 김준엽은 문제의 학생들을 보호하는 조건으로 스스로 퇴진하게 돼.

이에 학교 안에서는 불길 같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가 일어난다. 그때껏 시위대가 소수로서 경찰에게 쫓겨 다녔다면

경찰이 무서워서 도망다닐 만큼 그 기세가 뜨거웠다고 하네.

김준엽 총장은 학생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반정부 성향의 학생시위가 잦았다.

그는 사실 시위를 싫어했다. 시위가 일어나면 학교가 마비되고 강의도 되지 않고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면

부상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교부의 압박도 그가 시위를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다.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문교부는 주동학생들을 당장 제적시키라는 학칙을 무시하는 지시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위를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민주주의를 옳게 시행해야지, 학생들이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을 제적시키지 않는 그에게 ‘총작직에서 그만 물러나시라’는 정부의 압력은 결국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총장직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1985년 2월 25일 열린 제78회 학위수여식은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1총장 퇴진 반대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열린 졸업식이다.졸업생 답사를 맡은 여자 졸업생이 으레 이어지는

공식적인 문장을 읽어 내리다가 갑자기 단호한 어투로 바꾼다.

“고대 사학 80년 전통에 있어서 외부 당국의 압력에 의해 행해지는 굴욕적인 사퇴 처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진정한 학원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위해 이번 일이 철회될 때까지 매진할 것입니다. 총장님, 힘을 내십시오!”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지. 총장 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학생들 일부도 엉엉 목놓아 울었고 말이야. ·
뒷날 김준엽 총장은 이를 으뜸가는 자랑거리로 꼽았다.

“총장 물러가라”

는 데모는 많았어도

“물러나지 말라”는 데모는 당신밖에 없었다면서

이 일을 두고 당신이 받은

“으뜸 훈장”이고,

이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졸업식이 사실상 김준엽 총장의 이임식이었다.그는 이임사 한 줄 없이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학생들은 김 전 총장의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열었다. 총장 사퇴를 주장한 시위는 많았지만

총장을 물러나지 말라는 시위는 최초였다. 하지만 그는 총장재임시절 자신이 이루려던 것들을

대부분 마무리 지었다고 판단해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김준엽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1987년 새 헌법안을 마련할 무렵 민정당 이종찬 의원을 불러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法統)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종찬 의원은 독립 운동의 거목인 우당 이회영의 손자다.

"'법통(法統)'이라고 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보면 법(法)과 전통(傳統)입니다.일반적으로 전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것은

 ' 선열들이 쌓아놨던 문화유산, 정신, 이런 것들을 그대로 이어 받는다는 뜻이죠.'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그대로 이어온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사학과)

그는 상하이에 방치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를 조국으로 봉환하는데 앞장 선다.
마침내 1993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옮긴다.그때 그의 소감이다.
"시일이 늦었습니다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봉환할 수 있어서 여간 기쁘지 않고 이것이 우리 헌법에
있다시피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되어있는데 이번에 봉환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이 국내외로 아마 확고부동하게 주장이 되지 않는가........."

2011년 6월 7일 김준엽은 세상을 떠난다.

서영훈 전 총재는 고인이 잡지 ‘사상계’에서 주간을 맡던 시절, 편집기자로 함께 일한 추억을

되새겼다. 서 전 총재는 “선생은 큰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몇 안되는

분이었다”며 “ ‘역사의 신’(고인이 쓴 책 제목)은 살아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이라고

애도했다.

백기완 소장은 “별은 지지 않고, 밤이 깊어지면 더 반짝인다”는 말로 고인을 기렸다.
민경현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선생은 학자와 지식인이 걸어야 할 길을 몸소 보여주신 등대와

같은 분이었다”며 “어느 때보다 선비정신이 그리운 시기에 우리 곁을 떠나 안타깝고 슬프다”고 했다.

양위레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중국 저장대 역사학과 교수)은 “저장대에

 한국연구소를 세운 분이 김준엽 선생이다. 연구소의 기틀을 닦고 최근에도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왕래하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 몰랐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생전에 회고록 <장정(長征)>을 남기고 그의 영원한 '장정(長征)'에 들어갔다.
그삶은 회고록 『장정』전 5권에 오롯이 담겨있다. 이 회고록은 집필 자체만도 대장정이었다.
1987년 광복군 시절을 다룬 1, 2권이 나온 이래, 고려대 총장 시절과 무직시절을 회고한 3, 4권에 이어 33년간의 고려대 평교수 시절과 사회과학원을 세운 1988년 이후 활동을 다룬 시리즈 마지막 권이 2001년에 나왔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장례는 가능한 한 외부에 알리지 말고 조용히 치렀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고 유족들이 전했다. 이 같은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으로 4일간 치렀고 고인은 10일 영결식 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특히 고려대 총장으로 있을 때 민정당사 점거 농성 참가 학생을 제적하라는 권력기관의 압력을 거부하다 해직되자 학생들이

총장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는데, 이 일을 두고 자신이 받은 “최고의 훈장”이었고, 이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살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대책회의를 하다 참석자들이 저녁식사를 하려 하자  “제적이면 학생으로선 사망선고인데, 제자들이 죽음의 위기 앞에서 밥이 넘어 가냐?”며 호통치고 끝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보수진영이든 진보진영이든 가리지

 않고 두루 신망이 두터웠으며, 새벽 4시에 일어나 시간을 5, 10분 단위로 쪼개 쓰면서 공부와 집필에 몰두한 김준엽이다.

 그는 ‘시대의 사표(師表)’라는 헌사조차 함량미달로 느껴질 만큼 우리에게는 드문 참 선비였다고 사람들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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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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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정희 | 작성시간 18.12.05 회장님 ~~
    역사탐방.
    기회가 된다면 꼭 참석하고싶어요.
    전,~~~
    역사 공부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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