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전에서 유류보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유류소모는 엄청난 양이었다. 지상군의 주 전투부대는 보병부대로 대규모의 기계화 부대는 없었으나 최고 4,228대의 육군 항공기가 운용되어 다량의 유류가 소요된 것이다. 연도별 미군의 유류 소모량은 다음과 같다.
※ 베트남에서 미군의 유류 소모량 단위 : 1,000드럼
년도 |
소모량 |
년도 |
소모량 |
1965 |
5,394 |
1968 |
34,700 |
1966 |
17,370 |
1969 |
33,169 |
1967 |
28.840 |
1970 |
28,976 |
미 육군과 해군(해병사단 지원)은 약 127만 드럼을, 미 공군은 비행장에 278,000 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구축하였고 미국의 계약회사들이 약 80만 드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미군의 저장목표는 30일분이었으나 소요의 증가, 분배 및 수송기간, 총 소모량의 3%에 달하는 손실(자연손실, 송유관 수송 중 절취된 량) 등의 요인 때문에 실제 저장수준은 20이이었다. 송유관이 가설된 곳은 사이공-탄손누트(Tan Son Nhut) 간, 붕로(Vung Ro)-투이 호아(Tuy Hoa) 간, 퀴논(Qui Nhon)-푸캇(Phu Cat) 간, 퀴논-안케(An Khe)-플레이쿠(Pleiku) 간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각 지역 유류 저장고에 대한 적의 공격이 계속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이공 근교에 있는 쉘(Shell) 회사의 나베(Nha Be) 저장고에 대한 적의 공격으로 약 44만 드럼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특히 퀴논-플레이쿠 간의 송유관에 대한 적의 공격행위는 집요하여 월 평균 47,000여 드럼의 피해를 입었다.
나베의 유류 저장고 전경
베트남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긴급히 소요되는 장비나 물자를 보급하는데 정상적인 절차나 군수 관리 측면만을 고려할 수는 없었다. 소요를 충족시키는 비상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시에 많은 건설장비가 필요하며 가용한 미수용 장비는 모두 조달하였다. 31종의 서로 다른 모형은 조작, 정비 상의 문제를 야기하였으나 1년간의 수리부속을 보급 받고, 납품한 민간회사의 조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세계대전시에 미군의 전기소요는 1명 당 한 시간에 0.5KW였으나 베트남에서는 2KW로 4배였다. 보유하고 있는 군의 표준장비로는 충당할 수가 없어 1.5KW부터 100KW까지의 대규모로 소요되는 발전기는 145개의 제작회사로부터 규격이 서로 다른 모형이 조달되어 정비 상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베트남의 고온다습한 기후는 건전지의 성능과 수명에 영향을 미쳐 정상적인 소모 기준보다 훨씬 많은 양을 보급하여야 했다. 1968년도부터 냉장이 가능한 콘테이너로 10일 간격으로 각 보급창에 보급하고 1종(주, 부식류) 보급과 같은 절차로 소요량을 2~3일 간격으로 사용부대가 수령토록 함으로써 성능과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도록 조치를 강구하였다.
편성 및 장비표의 기준보다 24%나 초과 소요되는 APC는 지뢰에 의한 피해와 인화하기 쉬운 휘발유 엔진 때문에 적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늘자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장비 개발소요 긴급처리반은 예하 지휘관과 운용병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1968년 7월까지 베트남에서 작전 중인 전 APC를 디젤엔진으로 교체하였고 1969년 3월에는 지뢰방호 장비를 개발하여 시험한 후 부착토록 하였다.
베트남의 지형과 기후에 맞는 전투복과 전투화를 개발하여 베트남에서 작전 중인 병력에 대해서는 긴급공수로 보급하였고 1967년 7월부터 부대단위로 증파되는 병력과 8월부터는 교체병력도 미 본토 내에서 지급하여 파병시킬 수 있었다.
육, 해, 공군의 3개 군에서 똑같이 사용하고 있는 품목을 지역별로 군수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부대에서 통합하여 보급한다면 병력과 예산이 절약될 것은 당연하다. 1965년 중반부터 육군, 해병대, 공군의 전투부대가 대거 파견되면서 각 군은 타군의 보급문제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미 합참에서는 3군의 공통품목에 대한 단일지원체제를 연구하여 1965년 11월에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 시행토록 지침을 하달하였다. 이 지침에 의하여 남베트남 제1군단 지역은 해군, 제2,3군단 지역은 육군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평시부터 확립된 체제도 아니고 더구나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1966년 말부터 3군의 통합보급창을 운영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고 1968년 3월부터는 해군에서 담당하던 제1군단 지역에 대한 군수지원 책임을 육군으로 전환시켰다.
미 해군이 고문단에 대한 군수지원 책임을 갖고 있을 때 3,500개에 달하는 3군 공통지원 품목 목록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 목록 자체가 엉터리가 많았다. 공통 소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불필요한 품목이 있었고 신청해도 재고가 없거나 재고목록에도 없는 품목이 있었다. 이런 때는 다시 소속 군 보급계통으로 청구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특히 공군부대가 불만이 많았다.
베트남에서 미군의 3군 통합 보급지원은 성공적이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전쟁 상황 하에서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