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이나 보 구엔 지압이 의도했든 안했든지 간에 그들의 구정공세는 베트남전의 분수령이자 일대 전환점이 된 공세가 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완전히 무모한 공세였다. 북베트남군은 최초 공세의 시간과 장소 면에서 기습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기습이라는 것은 그것이 전술적이든 전략적이든지 간에 어느 정도 피아 균형을 이룬 전력간의 전쟁에서 기습을 달성함으로써 전력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기울게 하여 군사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과 북베트남군(그것도 모든 북베트남 정규군이 투입되지도 않았고 베트콩이 공세의 주력)과 같은 현격한 차이가 나는 전력 간에는 약자가 강자를 기습하였을 때는 잠시 비틀거리게는 할 수 있으나 곧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자의 기습이 계속 반복될 수만 있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북베트남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당시 연합군과 북베트남군 간의 전력은 항공전력, 주요 지상 전투장비 면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이였고 단순한 병력숫자만도 3:1의 비율이었다.
공세결과는 북베트남군이 투입병력의 50% 이상이 손실되는 참담한 군사적 패배를 당하였다. 북베트남군이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달성할 수는 없는 여건이었으나 부분적인 군사적 승리마저 달성할 수 없었던 요인과 손실을 가중시킨 요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 사이공, 다낭(Da Nang), 캄란(Cam Ranh)과 같은 결정적인 도시목표 공격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전 지역에 병력을 분산시켰다.
• 전 지역을 공격하여 민중봉기를 점화시켜 승리하려 하였으나 남베트남인들의 민중봉기는 환상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남베트남인들은 베트콩의 공격에 냉담하였고 그들의 공세는 남베트남인들의 혐오감정을 배가시켰다.
• 후에(Hue)에서 북베트남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공세 이후 그 참상이 전국에 퍼져 남베트남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 되었고 도시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끈질긴 항전은 많은 민간인의 피해와 가옥파괴를 유발하게 되어 이후 남베트남인들은 북베트남군이 공격하면 무조건 피난을 가야한다는 인식을 갖게 됨으로써 7년후 북베트남군은 그들의 총 공세에서 엄청난 피난민 사태를 야기시켜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가속시키게 되는 역설적인 요인이 되었다.
•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전의가 없으며 그들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은 와해되고 그들에 동조할 것이라고 가정하였으나 남베트남군은 공세 시에 구정휴가로 인해 약 50% 정도의 병력수준이었으나 와해되지도 않았고 즉각 반격하는 전의를 보였다.
• 남베트남 중부지방 일대에서 하루 먼저 공격이 개시되어 기습효과를 감소시켰다. 북베트남군의 이와 같은 실수는 특히 미군의 대기태세를 강화시켜 반응시간을 단축시켰다.
• 광범위한 지역에서 작전 동안 북베트남군의 지휘, 통제, 통신의 결여는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융통성과 협조된 작전을 곤란하게 하였다.
• 계획은 집권화하되 실시는 분권화하라는 기본적인 전술준칙을 북베트남군은 적용하였으나 그들의 분권화는 도가 지나쳐 분권화가 아닌 조각화가 되어 버렸다.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자 부여된 임무 외에는 다른 사람이 수행하는 임무나 해당 도시지역 내에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작전이 전개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공세준비 기간 중 보안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막상 공세가 시작되어 부여받은 임무수행이 불가능하여졌을 때 어떻게 차후 작전을 전개하여야 할지 몰랐고 지휘자가 유고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되어 유기적인 작전수행이 곤란하였고 피해를 가중시켰다.
• 미군의 기동력과 화력의 우세를 당할 수가 없었다. 또한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까지도 우수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 해병부대는 메콩 델타 지역에서, 다음은 사이공에서 그리고 후에에서 기동성있게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구정공세의 결과로 남베트남에서 군사작전을 주도하였던 베트콩들이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북베트남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보충하여야 했다. 이제 북베트남이 지금까지 베트남전은 민족주의자들과 현 정권과의 내전이라고 표면적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 명실공히 베트남전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남북대결로 전쟁의 성격이 변화하게 되었다.
지압도 구정공세의 군사적 패배를 솔직히 인정하였고 북베트남 상하의 실망도 컸다. 회복하는 데는 수년이 걸려야 했다. 북베트남은 미 지상군이 개입하고 있는 베트남전에서 군사적 승리를 기도하는 최후의 공세에서 실패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10,000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미 본토에서 이루어졌다. 마침내 3월 31일 그들의 최고 적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슨 미 대통령이 스스로 북폭을 안하겠으니 협상하자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구정공세는 미국인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존슨 대통령에게 충격을 주어 이제 전쟁의 흐름을 바꾸게 한 것이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사정하고 있는 협상을 통하여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미군을 남베트남으로부터 철수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제 북베트남은 그럴 전력의 여유도 없었지만 사생결단의 대규모 공세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전쟁 시에도 적용한 바 있는 협상전술대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소규모의 군사적 공세를 계속하여 적을 지치게만 만들면 되었고 협상 기간이 길면 길수록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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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ZEALOT 작성시간 13.04.30 슬프게도 군대는 정계의 시녀지요.
무모한 작전이든,무의미한 희생이든 정치적명분아래 죄다 희석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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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4.30 전쟁에서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죠. 남베트남이 북에 비해 더 부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순수 민족주의의 관점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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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James Lee 작성시간 13.04.30 좋은글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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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4.30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