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의 구정공세는 미군이나 미 관료들에게는 완벽한 기습이 아니었다. 북베트남군의 공세자체는 예상하고 있었고 패하고 있는 군대도 승리를 위해서 최후의 발악을 하였던 전례도 많이 있었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 1944년의 아르덴 공격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공세는 미 국민들에게나 언론기관들에게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지금까지 50만 명에 가까운 미군이 투입되었고 엄청난 전비를 소모하면서 베트콩이라고 하는 하잘 것 없는 적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지상 작전을 시작한지도 2년이 넘었다. 미 국민들은 지금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었으나 미군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현지 사령관인 웨스트모얼랜드 대장도 적이 패배하고 있고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하였었다. 1967년 연말까지는 미 정부나 미군, 미 국민 모두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대체로 낙관하고 있었다.
1968년에 들어서 1월 21일 북한의 특수부대가 한국 청와대 습격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고, 1월 23일에는 한국 동해의 공해상에서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납치되어 한동안 미국 전체가 술렁거리는 가운데 1월 31일에는 남베트남의 전 도시지역에서 북베트남군들이 대규모 공세를 개시한 것이다.
1.21 사건
푸에블로 호. 현재 북한 대동강에 전시되어 있다.
어떻게 미국 국가의 상징인 미 대사관이 베트콩들에 의해서 점령될 수 있는가? 패배하고 있다는 베트콩들이 어떻게 전국 규모의 공세를 취할 수 있는가? 도대체 연합군들은 어떻게 하고 있기에 베트콩들이 후에(Hue)를 완전 점령할 수 있는가? 미 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었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다 전부터 베트남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일관해 왔던 미 언론들도 가세하였다.
미국 대사관 정문에 걸려 있던 국가문장이 불에 탄채 떨어져 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인들이 각 가정의 거실에서 선명한 칼라 TV의 화면을 보고 평가하는 최초의 전쟁이었다. 베트콩들이 점령은 못하였다고 하였지만 파괴된 미 대사관의 담장, 베트콩들의 B-40에 의해서 파괴된 건물 입구, 어지러이 널려져 있는 베트콩들과 미 해병 헌병의 시체들이 화면에 방영되었다.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을 공격하기 위해서 베트콩들이 독립궁 건너편 아파트에 굴을 파고 은거했던 흔적도 TV 화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교전으로 파괴된 일부 시가지의 방영은 마치 사이공 전 시가가 그렇게 파괴된 것처럼 생각되기 마련인 것이다. 후에의 시가전도 방영되었고 후에의 유적은 일부분만 손실이 되었으나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도되었다. 케산(Khe Sanh) 기지의 모습도 계속 방영되었다. 2월 23일에 북베트남군이 1,100발의 포격을 가했다고 보도되었다. 그 조그만 기지에 1,100발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 기지는 초토화가 되어버렸을 것 같았다.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 이후 일주일 동안 미군의 손실이 전사 534명, 부상 2,547명이라고 대서특필되었다. 베트콩들은 이 일주일동안에 35,000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는데도 미 언론들은 이 극적인 미군손실의 증가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소모전에서 미국과 북베트남의 “받아들일 수 없는 손실”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구정공세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미국 본토로 이송되는 시신 박스
※연도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월평균 전사자
년 도 |
미 군 |
남베트남군 |
년도 |
미 군 |
남베트남군 |
1965 |
114 |
937 |
1968 |
1,216 |
2,027 |
1966 |
417 |
996 |
1969 |
785 |
1,578 |
1967 |
782 |
1,060 |
1970 |
352 |
1,782 |
미 국민들의 여론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TV 뉴스 캐스터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는 2월 27일 저녁 뉴스보도 시간에 베트남 전쟁은 이제 가망이 없는 교착상태로 전락되었고 미군이 철수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협상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월터 크롱카이트
미 국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고 딘 디엠의 독재, 끝없는 쿠데타 등으로 남베트남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구정공세의 충격, 언론의 영향 등으로 현재 가망이 없을 것 같은 베트남전에서 계속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베트남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는 베트남전의 당위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가졌다. 갤럽(Gallop) 연구소는 공세기간 동안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지금까지 베트남전을 지지하였던 20%의 인원이 반전으로 돌아섰다고 발표하였다.
미 의회 지도자들도 야단이었다. 윌리엄 풀브라이트(William Fullbright), 프랭크 처치(Frank Church),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조지 맥거번(Geoge McGovern) 등의 상원의원들도 지금까지 베트남전은 실패하였다고 존슨 대통령을 공격하였다.
윌리엄 풀브라이트
프랭크 처치
조지 맥거번
언론의 압력, 반전으로 선회하는 국민여론, 의원들의 공세 등은 선거를 앞두고 있는 존슨 대통령에게 충격적인 일들이었다.
이러한 워싱턴의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전선의 웨스트모얼랜드는 북베트남군이 스스로 군사적 패배를 자초한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을 지휘하면서 차후작전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먼저 남베트남 제1군단지역에 대한 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2월 12일 해병 1개 연대와 1개 공정여단을 2월 말까지 긴급히 증파하도록 요청하여 이 부대는 2월말까지 도착되었다. 이 긴급증원도 보도되어 언론이 또 야단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2월 23일 휠러(Wheeler) 합참의장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현지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2월 18일 사이공 지역에 122㎜ 로켓포 포격을 가하여 미 보도기관을 흥분시켰던 북베트남군은 휠러 대장이 묵고 있는 숙소에도 포격하는 악착같은 근성을 발휘하였다.
합참의장 얼 휠러
당시의 남베트남 상황은 후에의 재탈환작전도 종료단계에 있어 북베트남 구정공세에 대한 반격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케산 기지 방어도 이상이 없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휠러에게 자신의 장차작전 계획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재 예상되는 최악의 상황은 남베트남 정부의 붕괴,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지역에 대규모 부대의 투입, 한국에서 고조되고 있는 전쟁위기에 따라 한국군 철수 등의 세 가지로서 이에 대한 대응책도 강구하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이러한 사태가 발발할 가능성은 없다. 특히 북베트남은 이번 구정공세에서 당한 군사적 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번 구정공세의 결과로 남베트남 정부도 안정되어 가고 있고 남베트남군도 작전수행능력이 향상되어 베트남 전쟁에서 후방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밀집지역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미군은 여타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 장차작전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따라서 작전지역을 남베트남 국경선내로 제한한 정책을 철폐하고 현재의 유리한 상황을 전과확대할 수 있는 과감한 대규모 공세작전을 전개함으로써 북베트남에 대한 계속적인 군사적 압력으로 북베트남의 전쟁계속 의지를 말살하여 미국의 군사개입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가용한 공세작전은 다음과 같은 5개 작전이다.
• 남베트남 내 적 지배지역과 작전기지를 제거하여 남베트남의 안전확보
• 북폭을 강화하여 하이퐁(Haiphong) 항과 같은 정치, 심리적인 표적의 무력화 또는 파괴
• 호치민 통로 절단 작전
•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북베트남군 성역 공격
• 상륙작전과 공중기동 작전으로 DMZ 바로 북쪽에 위치한 북베트남군 기지 점령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가병력 525,000명(2월말까지 보충병력은 515,000명) 외에 추가로 2개 사단(기계화, 보병), 1개 기갑수색 연대, 6개 해병대대, 15개 전술비행대대, 군수지원 부대 등 206,000명의 병력증원이 필요하다.
이 병력증원 하기 위해서 부족한 병력은 예비군을 동원하고 동원에 소요되는 시간에 따라 1968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병력을 증원해 주면 예비군 동원 기간인 1년 이내에 작전 종결이 가능하다.
또한 작전지역 제한정책의 철폐와 예비군의 부분적인 동원은 미국의 단호한 전쟁의지를 북베트남에게 보여주어 북베트남이 미 국민들의 반전운동을 부추기면서 미 국민들의 전의를 꺾으려는 그들의 공세를 저지시킬 수 있는 정치, 심리적인 효과까지도 있다.
휠러 대장은 이와 같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장차 작전계획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였다. 두 군사 지도자들은 현재 가용한 108,000명의 증원 병력은 5월말까지 전개시키기로 하고 추가병력은 미군의 범 세계적인 전략예비의 확보 문제와 관련하여 작전결과에 따라 증원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직 존슨 대통령을 설득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제 결정은 미 민간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휠러 합참의장의 보고를 받은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처음부터 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곧 이어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취임 후부터 7년간 베트남전을 주도하였던 맥나마라(McNamara) 미 국방장관이 2월 29일 물러나고 존슨 대통령 취임 후부터 베트남전에 관한 대통령 고문으로서 신임받아왔던 클리포드(Clark Clifford)가 취임하였다.
국방장관 클라크 클리포드
미 국방부 부장관 니츠(Paul Nitze), 국제안보 담당 차관보 완크(Paul C. Warnke), 운영부서 담당차관보 앤소븐(Alian C. Enthoven) 등을 중심으로 하는 민간인 관료들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추가병력 요청은 약점을 보강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계획하고 있는 공세작전은 현재 실패한 소모전략의 연장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미 재무장관 파울러(Henry H. Fowler)도 이 추가병력은 연간 100억 달러의 전비가 추가로 소요되어 이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빈민과 흑인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존슨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인 “위대한 사회”의 추진계획에 차질을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다른 분야의 방위비와 외국 원조까지도 삭감되어야 한다고 재정상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폴 니츠
폴 완크
운영부서 담당차관보 앤소븐
미 재무장관 헨리 파울러
따라서 미 국방관료들은 웨스트모얼랜드가 요구하는 추가병력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수도 없고 병력, 재정, 국내 제반여건 등으로 추가병력 증원은 곤란함으로 더 이상의 병력증원을 억제하고 미군은 현재의 전력으로 인구밀집 지역을 방호하면서 시간을 획득하여 남베트남군을 증강하고 전력을 강화하여 남베트남군이 작전을 담당하도록 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추진하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3월 4일 미 국방관료들은 그들의 검토결과를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으나 합참은 이에 반대하고 웨스트모얼랜드의 공세전략을 지지하였다. 존슨은 결심을 유보하였다. 존슨은 애치슨(Dean Acheson), 볼(George Ball), 번디(McGeorge Bundy), 밴스(Cyrus Vance), 롯지(Henry Cabot Lodge), 브래들리(Omar Bradley), 리지웨이(Matthew Ridgeway), 테일러(Maxwell Taylor) 등의 자문도 구했다. 이들도 일부 반대자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확전에는 반대였다.
미 정부의 이 같은 병력증원문제 논의를 간파한 뉴욕 타임즈지가 3월 10일 이 문제를 크게 보도함으로써 문제는 더욱 비화되었다. 북베트남이 군사적으로 패배했다면 현 병력의 40%에 달하는 206,000명의 병력이 왜 필요한지 미 언론이나 국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 국민들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더 이상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전 정책을 지지할 수 없다고 들고 일어났다.
3월 12일 뉴햄프셔에서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첫 예비선거가 시행되었다. 반전론자인 무명의 매카시(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이 42%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3월 14일에는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도 존슨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합을 벌이겠다고 발표하였다.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
3월 23일 존슨은 작년 11월부터 차기 육군참모총장 감으로 물망에 올랐던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내정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미 언론에서는 이를 해임형 승진이라고 비꼬았고 북베트남에서는 웨스트모얼랜드가 해임된 것은 자기네들의 구정공세가 성공하였다는 증거라고 선전하였다.
3월 24일 존슨은 휠러 합참의장을 필리핀의 미 클라크 공군기지로 보내어 웨스트모얼랜드를 비밀리에 만나 자기의 결심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예비군 동원과 작전지역 제한정책 철폐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고 인가병력은 549,000명이라는 것이었다.
심약한 존슨은 건강도 좋지 않아 가족들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지 말도록 종용하였다. 3월 31일 존슨은 전국 TV 및 라디오 방송연설에서 미국은 19도선 이북의 전 북베트남 지역에 대한 북폭을 중지하고 자신은 1968년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폭탄선언을 하고 말았다. 또한 이 선언에서 존슨은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호응하여 북베트남은 즉각 평화협상에 동의할 것을 촉구하고 소련, 영국 등 세계 강대국이 협상개최에 협조해 줄 것도 아울러 호소하였다.
이 선언을 바꾸어 말하면 이제 미국은 군사적 승리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북베트남과 협상으로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이 동남아의 하잘것없는 국가인 북베트남에게 협상을 구걸한 것이다. 이것은 지압이 목표했던 대로 존슨이 타올까지 던지지는 않았지만 백기를 들은 셈이다. 이로써 지압의 구정공세는 빛나는 정치, 심리적인 승리를 달성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극적인 백기를 보고 북베트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4월 3일 북베트남은 하노이 방송을 통하여 미국의 협상제의를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