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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33. 사이공과 미국의 반응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6.29|조회수1,637 목록 댓글 0

중부 고원지대의 철수가 패주로 끝나자 사이공에서는 티우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장성들도 티우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고 후에(Hue)가 포기되어 처참한 해상철수의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던 3월 26일 대통령병에 걸려있던 키(Ky)는 자기의 추종자와 동조자들을 탄손누트(Tan Son Nhut) 공군기지 식당으로 불러들여 오찬을 갖고 군대를 단결시킬 수 있고 북베트남과 힘을 배경으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정권의 창출을 위해서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구엔 카오 키

 

3월 27일 남베트남 정부는 이 중대한 시점에 정부의 전복을 기도한 15명을 구속하였다고 발표하자 키와 1974년 9월부터 티우의 부정고발로 유명인사가 된 탄(Thanh) 신부가 탄손누트 공군기지에서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투옥된 인사들과 자기들은 무관하다고 밝히고 현 시점에서 쿠데타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며 군과 국민의 신망을 잃은 티우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냉담하였다. 3월 20일경 여론조사는 10명중 8명이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미 상원도 6월 30일까지 모든 원조를 중단하는 문제를 논의할 정도였다. 원조의 계속은 미군의 재개입 우려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3월 25일 미 백악관에서 포드(Ford) 대통령, 키신저(Kissinger) 국무장관, 마틴(Martin) 주베트남 대사(당시 신병 치료차 워싱턴에 있었음), 웨이얀드(weyand, 베트남에서 제25사단장, 구정공세 시 제2야전사령관, 주베트남 미군 부사령관, 사령관 역임) 육군참모총장 등이 모여 남베트남 사태에 관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슐레진저(Schlesinger) 국방장관은 베트남 정책에 관하여 키신저와 대립하고 있어 제외되었다. 당시의 남베트남 전황은 중부고원 철수가 대패주로 끝났고 후에(Hue)와 추라이(Chu Lai)가 포기되는 시점이었다. 이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은 소극적인 대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프레드릭 웨이얀드 장군. 후에 참모총장으로 승진

 

 

• 웨이얀드 장군을 남베트남에 보내어 사태를 파악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차후 대책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 남베트남의 제1, 2군단 지역의 인원, 장비의 철수를 조력하기 위한 대책도 현재 제공되고 있는 민간 항공기나 선박 외에 추가적인 군용선박의 제공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1973년도에 제정된 전쟁수행에 관한 결의안이나 캄보디아 폭격금지 결의안 등의 입법취지로 보아 인도차이나에 군사개입은 불가능하다고(60일은 개입이 가능함) 전제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미 행정부도 추가 군사원조로 남베트남을 지탱시켜 보려는 의사는 있었으나 더 이상의 군사개입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미 해군 선박을 제1, 2군단 지역의 해안으로 보내어 해안으로 3마일 이상 접근하지 않고 대기하면서 남베트남군이나 민간인을 구조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제한된 활동은 합법적인 것으로 미 의회나 반전주의자, 진보파들도 반대할 수 없는 조치라는 것이다.

• 현재 남베트남에 긴급히 필요로 하는 전쟁물자는 승인된 군사원조 중 미집행분에 대하여 신속히 제공토록 하며 이를 위하여 웨이얀드 장군의 남베트남 방문에 군수분야 전문가를 대동시킨다.

• 추가군사원조 요구는 현재 의회에 요청 중인 3억 달러의 승인을 조기에 해주도록 독촉하는 방안도 있으나 웨이얀드 장군이 귀국 후에 종합 판단한다.

 

회의 후 키신저가 기자들에게 앞으로 3년간 충분한 원조를 제공한다는 요지의 남베트남에 대한 장기 원조계획을 의회에 요청하는 문제도 검토하였다고 말한 것을 보면은 아직은 아무도 남베트남이 그렇게 쉽게 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웨이얀드 장군은 3월 28일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사태는 심각하였다. 남베트남 고위 수뇌들과 회동한 자리에서 웨이얀드는 남베트남 정부의 대국민 홍보 활동, 참모본부에 군사작전 지휘권 부여, 피난민 문제 해결 등의 현안 문제점을 지적하고 현재 미 의회에 계류 중인 추가 군사원조 3억 달러를 획득하기 위해서라도 어디선가 군사적 승리를 쟁취하여야 할 때라고 말하였다.

남베트남측은 최우선적으로 적의 밀집된 부대에 대한 B-52 폭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웨이얀드는 어떤 형태이든 남베트남에 새로운 군사개입을 하려면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나 의회의 승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모든 것을 미 의회로 미루어 버렸다. 티우는 4월 1일 귀국 출발 전에 웨이얀드와 면담하도록 되어있는 일정을 취소시켜 버렸다. 그러나 주위의 권고로 다음날 웨이얀드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더 이상 미국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으며 휴전협정 전에 닉슨이 지원을 약속하였던 서한을 내보이며 현재 미국의 태도를 힐난하였다.

3월 31일에 북베트남군은 사이공 지역에 대한 최종공세를 준비하면서 임시혁명정부(PRG) 명의로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남베트남이 티우를 제거시킨다면 임시혁명정부는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협상의 운을 띠웠다.

4월 2일 키는 남베트남군 제18사단장 레 민 다오(Le Minh Dao) 준장을 만나 쿠데타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오 준장이 남베트남군 참모본부의 명령이 없이는 안 된다고 하자 키는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대장을 만났다. 비엔은 키엠(Khiem) 수상에게 키의 쿠데타 기도를 미국이 지지하고 있는가를 물었으나 미 대사관측은 현 시점에서 쿠데타는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남베트남 상원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미국 상원도 남베트남의 거국내각 구성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레 민 다오 준장

 

카오 반 비엔

 

트란 티엔 키엠

 

4월 3일 키엠 수상 이하 각료들은 사표를 제출하였고 포드 미 대통령은 팜스프링스(Palm Springs)에서 중부 고원지대에서 티우의 성급한 철수 결정을 비난하고 남베트남에 있는 6,000여 미국 시민들의 철수를 고려할 시점에 있다고 발표하였다.

4월 4일 티우는 쿠데타 음모자들을 체포하였다고 밝히고 키엠의 사표를 수리하고 수상에 구엔 바 칸(Nguyen Ba Can) 하원의장을, 부수상 겸 국방상에 트란 반 돈(Tran Van Don)을 임명하였다. TV 연설에서 그는 미국을 비난하고 중부고원 철수는 그의 전략적인 결정을 예하 지휘관들이 잘못 수행해서 일어났던 과오였으며 전 군, 관, 민은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단합하여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티우는 미국의 원조가 있던 없던 그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적과 싸우겠다고 말하여 그의 사임요구를 거부하였다. 트란 반 돈도 외유 중이어서 4월 5일에야 돌아왔고, 내각의 구성은 지연되어 4월 15일에 제1차 신임 내각회의가 개최되었다. 2주 가까이 행정의 공백이 있었던 셈이다.

구엔 바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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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 반 돈

 

4월 4일 오후에 남베트남에 군수물자를 공수하였던 C-54기로 243명의 혼혈아들을 제1차로 후송시켰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고장으로 탄손누트에 회항 도중 추락하여 어린 생명들의 처참한 죽음은 남베트남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혼혈아들의 상당수가 부유한 자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자제였다는 것이다.

티우를 사퇴시켜 남베트남 정부의 혼란을 노리는 북베트남은 당시 알제리에 있었던 임시혁명정부 외상 구엔 티 빈(Nguyen Ti Binh)을 이용하여 협상의 운을 또 띠웠다. 그들은 티우가 사퇴하고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이 집권한다면 민과는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파리에 있는 임시혁명정부 요원들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하였고 프랑스의 시라크(Chirac) 수상도 국방상으로 임명되어 귀국하는 트란 반 돈에게 현재의 상황에서는 강대국들의 합의하에 협상하는 길밖에 없다고 조언하였다. 돈은 임시혁명정부 요원들과 접촉하였고 임시혁명정부와 남베트남 간의 협상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오 다이(Bao Dai) 전 황제도 만난 후 귀국하였다. 소련의 프라우다 신문도 4월 5일 북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의 말을 인용하여 티우만 제거된다면 베트남 문제는 협상으로 해결가능하다고 보도하였다.

구엔 티 빈

 

두옹 반 민

 

바오 다이 전 황제

 

시라크

 

4월 8일 08:25에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사이공에 충격을 주는 사건이 터졌다. 남베트남 공군 소속 구엔 탄 트룽(Nguyen Thanh Trung) 중위가 조종하는 F-5E 전투기가 독립궁을 폭격하고 지난 1월에 북베트남이 점령하였던 푸옥롱(Phuoc Long)에 착륙하였다. 티우는 있을지도 모르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독립궁에서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폭격 시에 현장에 없었고 경비병 2명이 사망하고 유리창이 박살난 것 외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 피아 간에 미치는 심리적 충격과 국제적인 영향은 컸다.

트룽 중위

 

추후에 밝혀진 내용이었지만 트룽 중위는 북베트남 노동당 평생당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프랑스 항쟁 시 전사하였고 그는 사이공 대학 재학 중에 베트콩들의 지령에 따라 차후에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1969년에 남베트남 공군에 입대하여 미국에서 조종훈련을 받은 바 있었다. 북베트남의 지하 공작원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던 트룽은 판랑(Phan Rang) 지역 폭격임무를 부여받고 비엔 호아(Bien Hoa) 공군기지를 이륙한 후 편대장에게 계기 고장이라고 허위보고한 후 독립궁을 폭격한 것이다. 트룽은 북베트남군 대위로 임명되었고 영웅 칭호를 받았다.

4월 5일 키신저의 위기조치반은 웨이얀드 장군의 방문결과와 남베트남의 사태악화에 따라 추가 군사원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남베트남에 7.22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2.5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제안을 국가안보회의(NSC)에 회부하였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나 조지 브라운(George Brown) 합참의장도 기 요청된 3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로서 충분하다고 반대하였으나, 키신저는 이 원조는 우방에 대한 미국의 신의이며 우리가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에까지 미국의 신의에 대하여 영향을 줄 것이라고 주장하여 의회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합참의장 조지 브라운

 

4월 11일 포드 대통령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남베트남의 자구를 위해서 4월 19일까지 긴급 원조액을 승인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캄보디아 사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미 행정부의 마지막 제스츄어인 이 요청에 대하여 대부분의 의원들은 부정적이었다. 더 이상의 원조는 낭비라는 것이다.

이제는 미 의회에서나 국무부, 주베트남 미 대사관 모두 원조문제가 논의되기보다는 남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미 행정부와 의회 간에 철수시의 군대 운용 권한에 대하여 시비가 오고 갔다. 의회의 실무자들은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행정부의 실무자들은 이는 행정부의 고유권한이라고 맞섰다.

4월 9일부터는 사이공 지역에 대하여 본격적인 공격을 하기 위한 북베트남군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쑤안록(Xuan Loc) 전투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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