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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34. 쑤안록(Xuan Loc) 전투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6.30|조회수4,149 목록 댓글 16

쑤안록은 사이공 동북방 약 60㎞ 지점에 있는 인구 4만이 못되는 소도시로 롱칸(Long Khanh) 성의 성도이다. 전에는 큰 전투가 없었던 지역으로 지금까지 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사이공 외곽 1번 국도 상에 있다는 것 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도 아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 제18사단이 이곳에서 전투다운 전투를 하여 북베트남군 4군단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약 2주 동안 저지함으로써 제18사단의 쑤안록 전투는 남베트남인들에게 잠깐 동안이나마 사이공 지역을 방어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었고 남베트남군도 훌륭한 지휘관 밑에서 전의만 있다면 이렇게 싸울 수 있다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쑤안록의 전략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주요 도로의 길목에 자리잡은 평야 지대의 다소 고도가 높은 구릉지다.  이곳만 돌파하면 핵심요충지 비엔호아 공군 기지로 가는 직통로가 뚫린다.

 

남베트남군 보병 제18사단의 마크

 

제18사단은 창설될 때 제10사단으로 명명되었으나 “Number Ten”이라는 명칭상의 나쁜 이미지와 걸맞게 남베트남군의 최약체 사단으로 정평이 나 있어 제18사단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휴전 직후 장군으로 승진한 레 민 다오(Le Minh Dao) 준장이 사단장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사단의 면모는 달라지게 시작하였다. 제18사단은 다오 준장이 특별히 준비한 정신교육과 전투훈련을 받은 뒤부터 남베트남군에서 전투력이 강한 사단으로 부상하였다. 다오는 정치 바람을 타고 진급한 장군이 아니라 능력을 인정받아 진급한 장군이었다.

레 민 다오 준장

 

영관급 장교 시절의 레 민 다오

 

쑤안록에 대한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4월 9일 여명에 개시되었다. 북베트남군 제7사단은 2,000여 발의 공격준비 사격과 함께 쑤안록 북쪽에서 2개 지역에 집중공격을 하였고 북베트남군 341사단은 20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베트남군은 1번 국도와 2번 성도는 차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남베트남군은 자기들이 공격도 하기 전에 스스로 와해되어 도주하였기 때문에 이 사단도 그렇게 될 것으로 알고 일부러 비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제18사단은 물러나지 않았다. 사단장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남베트남군의 명예가 걸린 전투이고 미국의 원조여부도 이 전투 하나에 달려있다.”고 장병들을 격려하면서 전투현장에서 직접 지휘하여 상황을 조치하였다. 북베트남군의 공격 당시에 쑤안록에는 1개 연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장은 즉각 1개 연대를 쑤안록으로 증원시켜 돌파된 지역에 대하여 역습을 가하였다. 오후 늦게 적은 격퇴되었다. 3월 10일 이후 패퇴만 거듭하던 남베트남군에게는 귀중한 승리였다. 퀴논(Qui Nhon) 서북방에서 남베트남군 22사단이나 칸두옹(Kanh Duong)에서 남베트남군 3공수여단도 분전하여 훌륭하게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그때는 전2군단이 패주하는 상황이어서 그다지 빛이 나지 않았던 전투였으나 제18사단이 거둔 승리는 사이공 지역에 대한 북베트남군의 최초공격을 격퇴하였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것이었다.

쑤안 록에서 남베트남군에게 포로가 된 북베트남군

 

다음 날 북베트남군은 제6사단을 추가 투입하여 사이공으로 통하는 1번 국도를 차단하고 제341사단과 제7사단은 재차 공격을 하였으나 역습으로 격퇴되었다. 쑤안록 시내에서는 밀고 밀리는 시가전이 계속되어 시가지는 거의 파괴되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일주일 이상 전개되었다. 1번 국도는 계속 차단되어 있었으나 제18사단은 동요되지 않았다. 보급은 공수되었다. 1번 국도를 개통시키기 위하여 남베트남군 제3기갑여단(M-41 전차 및 M-113장갑차 2개 대대, M-48 전차 1개 대대로 편성)이 공격하였으나 개통시키지 못하였다.

쑤안 록 전투에 투입되는 남베트남군

 

승리에 목말라 있었던 남베트남 정부는 내외신 종군기자들을 초청하여 4월 13일 CH-47로 승리현장을 답사토록 하였다. 거리는 폐허가 되었고 북베트남군의 시체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전투가 끝난 후의 쑤안 록

 

기자들도 언젠가는 이 쑤안록도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리라 생각은 하였지만 남베트남군에게 귀중한 재편성 시간을 부여하는 제18사단의 승리를 전 세계에 전하였다.

쑤안록 전투 승리로 열광하는 남베트남군 병사들

 

쑤안록 전투 동안 남베트남 공군의 근접항공지원 노력도 대단하였다. C-130 수송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투하하였다. 미군이 정글지역에서 착륙지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데이지 커터(Daisy Cutter, 야구에서 강한 땅볼이라는 뜻)라고 명명된 15,000파운드의 대형폭탄(당시 3발이 미국에서 도착)이 투하되어 북베트남군을 경악시켰다. 또한 2에이커 지역의 산소를 파괴하여 인마를 살상한다는 FAE탄도 투하되어 북베트남군 공격을 둔화시켰다. 대부분이 신병으로 구성된 북베트남군은 공격방법이 서툴러 밀집대형을 취하기 마련이었는데 이러한 적의 밀집지역에 투하된 CBU-55탄의 효과는 대단하였다. 수백 구의 북베트남군 시체가 완전한 상태의 화기나 장비와 함께 널려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피난민의 제보로 그 효과가 증명된 것이다. 북베트남은 미국이 생화학전을 전개했다고 주장하였고 중국도 항의하였다.

BLU-82  데이지 커터

 

CBU-55 폭탄

 

록닌(Loc Ninh) 근처에서 호치민 전역 구상에 전념하고 있었던 반 티엔 둥(Van Tien Dung)은 쑤안록 전투의 패배에 격노하였다. 제4군단의 패배는 무모한 정면공격의 결과라는 것이다. 둥은 호치민 전역 부사령관인 트란 반 트라(Tran Van Tra)에게 작전지침을 주고 현지에서 지도하도록 하였다. 비엔 호아(Bien Hoa) 비행장에 장거리 포격을 가하여 항공지원을 못하게 하고 측방기동으로 적의 배후를 공격하면서 시가전을 회피하고 야지로 남베트남군을 끌어내어 격파하라는 것이 둥의 지침이었다.

반 티엔 둥

 

트란 반 트라

 

북베트남군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1개 사단을 증강시켜 4월 30일부터 다시 본격적인 공격을 재개하였다. 남베트남군도 그동안 제1공수여단을 증원하였으나 공수여단도 공수 이동 간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항공지원과 공수보급도 여의치 못하였다. 다시 시가전이 벌어졌다. 18사단 장병들은 계속 분전하였다.

쑤안 록 전투 당시 사진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은 4월 22일 참모본부의 승인을 받고 제18사단에게 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제18사단은 2번 성도를 따라 북베트남군을 공격으로 견제하면서, 4월 23일 15번 국도로 질서 있게 철수를 완료하였다. 제1공수여단은 푸옥레(Phuoc Le) 지역의 방어를 위해 그곳에 잔류시켰다. 제18사단은 30% 이상의 손실을 입었고 특히 북베트남군 341사단의 집중공격을 받은 제52연대의 피해가 제일 많았으나 그들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전략적 균형이 기울어져 버린 현 시점에서 그들의 빛나는 승리를 보전시킬 남베트남의 운명은 시간 문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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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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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eAstSUN 작성시간 13.07.01 저 '레 민 다오'라는 지휘관은 남베트남에서 성골에 해당될 정도로 빽이 든든한 사람인가요?
    부대 기강을 저정도로 일거에 혁신할려면 부정부패문제를 건드릴 수 밖에 없을텐데요...
    대체 어느정도로 기반이 단단한 사람이길래 온갖 커넥션으로 뒤엉켜 있는 복마전을 건드리고서도 별 탈이 없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01 빽이 든든한 인물은 아니고 전형적인 무인형입니다.
    영관급 장교일때 미 고문관들이 우수하게 평가를 했고 그래서 장성까지 진급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정부패 일소는 그가 사단장이 되는 타이밍이 좀 절묘했습니다.
    미군 철수하고 북베트남의 침공이 우려되는 상황이어서 어떻게든 군대의 전투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고, 당시 터진 여러가지 군내 부패 폭로가 기폭제가 되어 이를 명분으로 삼을 수가 있었죠.
    결정적으로 제18사단 자체가 원래 2개 연대만으로 구성되고 전투력도 최하인 약체 사단인데다가 부대의 주둔지가 수도 사이공 근처였기 때문에 군인 가족들이 작전에 애로사항이 되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01 하지만 어쨌든 레 민 다오 준장 개인의 능력도 뛰어났다고 봐야 합니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에 남베트남 최약체 사단을 남베트남 최고의 전투부대로 바꾸어놓았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01 그 당시 직속상관인 3군단장인 히우 중장이 레 민 다오를 비범하게 평가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베트남이 패망한 뒤 저분의 후속 스토리가 그야말로 드라마틱합니다. 나중에 언급되니까 그때 참조하세요.
  • 작성자eAstSUN 작성시간 13.07.02 답변 감사합니다. 패망 후에 18사단 장병들이 너무 심하게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재교육캠프같은데 가서 죽지나 않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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