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전선이 점점 악화되면서 북상하는 미군의 공세에 도처에서 패퇴하고 있던 일본은 44년초 두가지의 야심찬 공세작전을 추진합니다. 하나는 인도, 또하나는 중국이었죠.
38년 10월 무한회전이래 중국전선은 5년째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지루한 국지전의 반복이었습니다. 이미 국력이 한계에 직면한 쌍방은 전세에 결정적인 일격을 먹이지 못한채 전선은 큰 변화없이 교착상태만 이어지고 있었죠. 더욱이 현지의 일본군은 대본영의 "장기 지구전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라"는 지시를 의도적으로 묵살한채 명확한 전략적 목표도 없이 지엽적이고 분산된 공격만 반복합니다. 물론 중국군의 피해도 컸지만 일본군 역시 막대한 인명과 물자를 지속적으로 소모할 수 밖에 없었죠.
또한 화북과 화중, 화남의 각 전선은 별개의 작전으로 수행된 것이기에 병력은 광대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고 특히 화중과 화남의 점령지역은 중국군에게 포위된채 서로 고립된 상황이라 연계작전이나 병참선의 유지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특히 무한의 제11군은 돌출된 지역이라 항상 중국군의 위협에 시달렸고 중일전쟁내내 주요 전장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병참선은 장강의 수로를 활용했는데 중국군 유격대의 습격과 센놀트의 항공공격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방작전을 전개하면서 중국에 전력을 추가 증원할 수도, 중국군의 반격을 우려해 병력을 축소할 수도 없는 것이 수렁에 빠진 일본의 딜레마였죠.
43년 이후 미해군의 통상파괴작전으로 본토와 남방을 연결하는 해상수송선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일본 경제는 거의 마비상태에 직면하였고, 또 한가지 미국이 장거리 대형폭격기인 B-29를 완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만약 B-29가 실전배치되어 중국을 발진기지로 삼을 경우 본토가 전략폭격의 위협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B-29 슈퍼 포트리스. 기존의 미육군 항공대 주력 폭격기인 B-17 플라잉 포트리스의 두배가 넘는 64t의 중량에 2200마력 엔진 4발, 최대 항속거리는 9,650km, 상승한도 1만2500m, 최대속력 576km/h, 폭장량은 9t에 달했습니다. 이 초대형 폭격기의 성능은 그야말로 기존 폭격기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것으로 세계 최초의 "전략폭격기"였습니다. 44년 6월 중국 성도 비행장에 처음으로 실전배치되어 큐슈와 만주, 동남아 등을 공습하였고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한 후 일본 전역이 공격범위에 들어가게 되어 사이판, 괌, 티니안섬에서 발진한 B-29가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45년 8월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죠. 일본이 보유한 대부분의 전투기는 1만m이상의 고고도에서 비행하는 이 폭격기를 추격하는 것조차 어려웠고 KI-84 하야테 등 극소수의 기체들만이 요격이 가능했으나 설사 접근하더라도 20mm 기관포 6문과 13mm 기관총 16문으로 무장한 막강한 탄막을 돌파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매출격시 B-29의 손실은 15%에 달했고 이오지마 점령후 P-51 무스탕의 호위를 받은 뒤에야 비교적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성능은 우수했으나 엔진 고장이 잦았고 조종이 어려워 파일럿들이 기피하는 기종이기도 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3년 12월 대본영은 중국에 대해 "지나사변 이래 최대의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나마 전력이 비교적 온존한 지나파견군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중국을 남북으로 관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죠. 우선 화북에서 대규모 공세를 통해 중국군 제1전구를 격멸하고 북평-한구를 연결하는 경한철도를 개통시킨 후 이어서 오한철도(무한-광주)와 상계철도(형양-계림-유주)를 확보한다면 한반도에서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버마,말레이에 이르는 철도와 육로를 연결하여 남방의 자원을 육상으로 일본까지 수송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진격로상에 있는 형양, 계림, 유주, 영릉 등 중미연합공군의 주요 비행장과 기지를 점령한다면 B-29의 일본 폭격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큰 목적은 중국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미-영-중 연합군의 한 축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추축국의 전세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유럽전쟁이 종결된다면 일본은 미, 영, 소, 중에 의해 4면에서 포위공격을 받을 것이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영연합군은 이탈리아전선에서 교착상태였고 소련 역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치열한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독일이 1, 2년안에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를 점령하고 중국을 연합군의 전열에서 이탈시킨다면 미, 영과 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것이죠. 또한 중국에서의 승리는 국민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전명은 "이치고작전(一号作戦)"이라 명명되었으며 예상되는 작전거리는 2,400km에 북지나방면군과 중지나방면군, 화남의 제23군까지 지나파견군이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과 물자가 총동원되는 중일전쟁 최대의 작전이었습니다. 투입병력만도 17개 보병사단, 1개 전차사단, 6개 독립여단 등 50만명에 달하였습니다. 또한 전차 800량, 차량 1만6천대, 군마 10만 마리에다 제공권 확보를 위해 제5항공군(기존의 제3비행단을 재편) 항공기 200대도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요행을 바라는 무리한 작전이었으며 목표도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이치고작전은 42년에 구상했던 "5호작전"과는 명백히 달랐는데 중경을 직접 공략하여 장개석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목표는 없었습니다. 일본에게는 이미 그런 역량이 없었습니다. 중경과 성도는 너무 멀었고 중국군은 험준한 산악지대을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설사 중경과 성도까지 진격한다고 장개석이 항복하리라는 보장도 없었으며 오히려 전선만 지나치게 확대되어 부담만 커질 수 있었습니다. 또한 수천km에 달하는 육상교통로를 어떻게든 확보한다고 해도 일본군으로서는 이를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B-29의 발진을 막겠다는 목표 역시 중경과 성도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행에 건다는 점에서는 44년 12월 히틀러의 "아르덴 공세"에 유사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고려치 않고 여러개의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하겠다는 일본군의 욕심은 히틀러 이상으로 무모한데다 전쟁의 향방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도 불필요한 작전이었습니다.
사실 지나파견군 내에서도 이 작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 제11군은 단지 비행장을 제압하는 것만으로 중국의 항전전의를 꺾을 수 있을 리도 없고 오히려 중경과 성도 공격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야 한ㄷ고 주장합니다. 또한 식량과 탄약 등 병참선의 확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수상이자 육군상이었던 도죠 히데키는 임팔작전과 마찬가지로 이치고 작전 역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중국 서남부의 중미연합공군의 비행장을 파괴하는 제한적인 목적에서 작전을 허가합니다. 그러나 도죠의 명령은 대본영 작전과장인 핫토리 다쿠시로 대좌 등 실무진에서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작전은 당초 계획대로 "대륙을 관통한다"는 목적으로 진행됩니다.
이치고작전을 주도한 핫토리 다쿠시로 대좌. 육군사관학교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육사 34기의 3날개중 한명"이라 불리었으나 매우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머리속에는 이시하라 간지나 쓰지 마사노부처럼 허황된 망상과 출세욕만 가득하여 상층부의 지시를 수시로 묵살하거나 왜곡했습니다. 이론에만 해박했을뿐 실전에는 형편없어 대표적으로 그가 입안하고 주도했던 노몬한전투, 가달카날전투는 참담하게 끝났지만 막강한 인맥덕분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채 도리어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에서 혼자 돌아와 맥아더 사령부(GHQ)에 적극 협조하였고 경찰예비대(자위대의 전신)의 막료장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당시 요시다 시게루총리가 그의 임명을 취소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쿠테타를 계획하기도 했습니다.(생각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았음) 이후 한직만 돌다가 1960년 사망합니다. 당시 일본군 중견참모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이치고작전은 같은 시기 전개되었으나 무모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었던 무다구찌의 "ウ号작전(임팔작전)"과는 명백히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 지나파견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원수는 만주와 본토, 조선에서 대량의 전차와 차량, 야포를 화북으로 수송했고 병참에서도 이전처럼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를 하였습니다. 부상자의 후송부터 물자의 수송, 심지어 동물들을 위한 수의사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지나파견군이 병력과 물자를 집중하여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중국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테헤란회담에서 선유럽후아시아 정책이 결정되자 장개석은 루즈벨트에게 "연합군이 유럽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은 일본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될 것"이고 경고하였고 44년 2월 제4차 남악군사회의에서도 중국군이 전면적인 공세로 전환하기전 일본이 선제공격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중국내 미군 고문단은 일본의 전력이 약화되어 있어 더이상 대규모 공세를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고(스틸웰과 그의 부하들은 정확한 정보없이 자신들의 편견과 막연한 추측만으로 일본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루즈벨트는 장개석의 경고를 묵살해 버립니다. 그리고 운남에서 훈련중이던 중국 유일의 전략예비대인 Y군을 스틸웰의 버마작전에 호응하여 북부 버마에 주둔한 일본군 제18사단을 공격하는데 투입하라고 압박합니다.
※ 42년초 버마에서 참패한 스틸웰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활용한 중국군 재편과 버마 탈환에 대해 장개석과 합의하였고 스틸웰과 함께 인도로 철수한 제5군 등을 기반으로 42년 7월 주인도 중국군(X군)을 창설합니다. 이들은 스틸웰 직속부대로서 철저하게 미국식으로 편성, 훈련되었습니다.
인도 람가르훈련소에서 미국식 훈련을 받고 있는 X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이와 별도로 30개사단을 추가로 美式사단으로 재편할 계획을 수립하여 11개군 31개사단 22만명이 각 전구에서 차출되어 운남에 집결합니다. 스틸웰의 X군과 달리 이들의 지휘권은 중국에게 있었고 X군과 구분해 "Y군"이라 불렀습니다. 43년말까지 총 15개사단이 편성되었으나 결원이 많아 각 사단의 병력은 5~6천정도에 불과했고 원조물자의 우선권에서도 스틸웰의 X군과 서놀트의 제14공군에게 밀려 극히 적은 분량만 제공되었고 장비의 부족분은 중국이 부담해야 했기에 X군과는 차이가 매우 컸습니다. 사실상 완전한 미식사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중국군으로서는 그나마 최정예부대였죠.
일본의 대규모 공세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장개석으로선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Y군을 내놓을 수 없었죠. 루즈벨트에게 "중국군은 7년간의 전쟁으로 이미 지쳐있으며 신강에서는 소련군이, 섬북에서는 중공이, 운남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Y군이 패배할 경우 일본군은 운남을 침공할 것이고 또한 중국은 중공에 의해 적화될 것"이라며 카이로회담에서 합의한대로 버마에서 연합군이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개시하지 않는한 Y군을 투입할 수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중국은 일본과 싸울 의지가 없다"라고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Y군이 즉각 운남-버마 국경의 살윈강을 건너 스틸웰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대중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립니다. 결국 장개석은 굴복하고 Y군에게 살윈강을 건널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산악지대에 포진한 일본군 제56사단의 강력한 방어로 교착상태가 되었고 가장 위급한 시기에 중국의 최정예부대는 엉뚱한 전선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또한 스틸웰을 지원하기 위해 중미연합공군 대부분도 버마로 투입되어 제공권에서도 열세에 놓이게 되죠.
살윈강에서 일본군과 전투중인 Y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4년 3월말까지 병력과 물자의 전개를 끝낸 일본군 제12군은 4월 20일 황하강을 건너 하남에서 중국군 제1전구에 대해 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른바 "경한작전" 투입된 병력은 제12군 산하 제37사단, 제62사단, 제110사단, 제3전차사단 등을 주력으로 14만 8천명, 군마 3만3천필, 전차 700대, 차량 6천대에 달했습니다. 작전목표는 하남성과 호북성에서 중국군 제1전구를 격멸하고 중국대륙의 심장선인 평한철도(북평-한구)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 제1전구는 장정문 휘하 17개군 40개 사단 약 30만명정도였습니다.
일본군 제37사단의 공격을 받은 중국군 제23사단은 전멸당했고 일본군의 압도적인 공격앞에서 중국군의 최일선은 속수무책으로 붕괴됩니다. 4월 20일 정주가 함락되었고 30일에는 2일간의 격전끝에 허창이 함락되어 수비대인 신편 제29사단장 여공량중장이 전사하였고 제1전구 부사령관 탕은백이 제12군을 직접 지휘하여 구원에 나섰으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격파됩니다. 콘크리트로 된 토치카에서 저항하는 중국군의 방어선앞에서 일본군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우세한 포병 화력과 전차, 항공지원으로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하남성의 비포장된 산길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일본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남쪽에서는 제11군이 북상하여 5월 9일 양군이 남북에서 합류함으로서 평한철도를 장악합니다. 정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5월 20일 하남성 서쪽 중국군 제1전구의 보급기지가 있는 노씨현을 점령합니다. 이어서 5월 23일 중국군 제1전구의 최대거점인 낙양을 포위한후 치열한 격전을 벌여 25일 점령합니다. 여기서 중국군 제36집단군 사령관인 이가옥이 전사합니다.
이치고작전(중국명 : 예상계회전)에서 전사한 이가옥 이급상장. 그는 40년 5월 의창에서 전사한 장자충과 함께 중일전쟁중 전사한 중국군 최고위장성중 한명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이로서 일본군은 하남성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평한철도와 농해철도를 개통하였고 중국군 제1전구는 완전히 붕괴되어 패주합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폭동으로 무려 5만명이 무장해제되고 수천명이 생매장되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이는 42년이후 하남성에서 유례없는 기근이 반복되어 300만명이상이 아사했음에도 군대가 식량을 약탈하자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약 한달간의 경한작전에서 북지방면군은 중국군 사살 32,390명, 포로 7,800명을 획득한 반면 자신들의 피해는 전체의 약 10%라고 발표합니다. 이것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라는 미국측의 주장과 달리, 적어도 중국군이 일본의 공격을 받자말자 전의를 상실하고 일방적으로 패주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죠. 중국군 제1전구는 고립된데다 다른 전구로부터 어떤 증원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의 손실로 각 사단은 2~3천명에 불과했고 물자와 탄약도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전염병과 영양실조까지 만연했죠. 피아간의 화력차이가 압도적인데다 일본군의 대규모 전차부대를 상대할 무기가 거의 없었음에도 이들의 저항은 예상이상으로 완강했으며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많은 부대들이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 전멸당했습니다.
경한작전(중국측은 "예중회전"이라고 부름)의 전개도. 붉은 색이 일본군의 진격로. 제1전구는 와해되어 낙양에서 서안으로 후퇴하였고 황하에서의 중국군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경한작전이 종료되자 일본군 제11군은 곧장 병력을 악주에 집결시켜 "상계작전"을 발동합니다. 상계작전은 경한작전보다 훨씬 더 대규모였는데 제9전구는 중국군의 주력이었고 제9전구의 중심인 장사는 3번이나 공략에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원된 병력은 제11군 휘하 8개사단, 1개 독립여단에다 화북에서 추가로 3개 사단을 증원하여 36만 2천명, 군마 6만7천두, 전차 100대, 자동차 9,450대에 달했습니다. 작전목표는 오한철도와 상계철도를 따라 남하하면서 장사와 형양, 계림, 유주, 남녕을 점령하고 중불 국경까지 진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군 진지를 공격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군 제9전구는 29개사단 40만명정도였습니다. 제9전구 사령관 설악은 그동안 일본군의 장사 공격을 여러차례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해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러나 6개월전 상덕회전에서 제9전구는 완전히 누더기가 된데다 손실도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기존의 3번에 걸친 장사공격에서 중국군을 과소평가하고 단순히 정면공격을 하다가 큰 피해만 입고 퇴각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아 이번에는 숫적, 화력의 우세를 확보하고 양익에서 우회한후 포위 공격하기로 합니다.
5월 27일 일본군은 항공지원을 받으며 양자강을 도하하여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6월 16일 장사 북쪽까지 진출합니다. 장사를 지원하기 위해 중미연합공군이 쉴새없이 출격했으나 제공권에서도 일본이 우세하여 중국군 증원부대와 물자를 실은 바지선들을 마구 격침시켰습니다. 그러나 중미연합공군이 신속하게 증강되면서 일시적으로 일본이 차지했던 제공권은 곧 중미연합공군으로 넘어가 일본군은 야간에만 이동해야 했고 병참선의 확보에도 심각한 차질이 발생합니다.
설악은 일본군의 공격이 압도적이라고 판단되자 장사 방어를 포기하고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후퇴시킵니다. 장사수비를 맡은 제4군은 1만명에 불과했고 일본군 3개 사단(제34사단 제58사단, 제116사단)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6월 18일 장사가 함락됩니다. 여기에 대해 데어도어 H. 화이트는 장개석과 설악간의 불화때문에 설악이 싸우지 않고 장사를 포기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피아간의 전력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설악이 끝까지 장사의 사수를 고집했다면 제9전구의 주력은 포위 섬멸되었을 것입니다.
장사를 점령한 일본군은 병력을 재편하는 한편 2개사단(제68사단, 제116사단)이 계속 남하하여 6월 24일 형양을 포위합니다. 형양은 오한철도와 상계철도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미연합공군의 기지가 있었습니다. 형양을 수비하는 중국군은 제10군 4개사단(제3사단, 제10사단, 제54사단, 제119사단) 2만명정도였습니다. 반면 일본군은 숫적으로 약 5만에 달했고 155mm 중포도 배치되어 중국군을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숫적으로나 화력에서도 월등히 열세했음에도 제10군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여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된 일본군의 제1차 공격을 막아내었고 일본군은 포병과 항공지원을 강화한후 7월 11일 재차 공격을 했으나 고작 수백미터를 진격한후 중국군의 반격을 받아 격퇴당하였고 10일만에 제2차 공격도 완전히 실패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68사단장과 참모장이 포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제57여단장인 시마 겐키치 소장이 중국군의 저격을 받아 전사합니다. 제116사단은 제120보병연대장이 공격중에 전사했습니다.
일본군으로서는 중국군의 이런 강력한 저항은 여지껏 유례없는 것이었고 형양성에 미군부대가 투입된 것이 아닌가라고까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장사를 손쉽게 점령했던 제11군은 형양에서 예상외의 고전을 하자 제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중장이 직접 현지로 내려와 지휘를 맡습니다. 그는 제13사단, 제40사단, 제58사단 등 3개사단에다 포병을 대거 증원하여 형양에 대한 포위를 강화합니다. 그러나 제공권에서 중미연합공군이 점차 우세를 점하면서 일본군의 병참선이 차단되어 식량과 탄약도 부족했고 전염병까지 만연하여 요코야마 중장조차 이질에 걸려 설사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형양 교외를 수비중인 중국군 병사들 ※ 사진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15221
한편 추축국의 전황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었는데, 유럽에서는 6월 6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에서 사상최대의 상륙작전이 전개되었고 22일에는 소련의 하계공세인 "바그라티온작전"이 시작되어 독일은 양면에서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에서는 6월 15일 미 육군과 해병대가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마리아나해역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연합함대는 완전히 괴멸되었습니다. 성도 비행장에서는 B-29가 출격하여 북큐슈를 공습하죠. 무다구찌의 모험이었던 "임팔작전"은 참담하게 실패한채 작전에 투입된 3개 사단이 전멸당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만약 형양마저 점령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군 역시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형양을 수비하고 있던 제10군 사령관 방선각은 일본군의 제2차 공격을 격퇴한 직후 장개석에게 더이상 형양을 지탱할 수 없으며 증원병력이 필요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제9전구는 이미 형양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고 장개석은 제62군과 제79군을 급파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장비도, 인력도 매우 빈약했고 식량과 탄약도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의 방어선을 근근히 돌파하며 형양 근처까지 진격하지만 8월 4일 일본군의 제3차 공격이 시작되어 4일간의 혈전끝에 방선각은 항복하였고 형양은 결국 함락됩니다. 40일간의 공방전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여단장 1명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2만이상이었습니다.
제11군의 피해가 너무 컸기에 이치고 작전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고 제11군을 재편하는 한편 제11군과 광주에 주둔한 제20군, 제23군, 제34군을 합해 제6방면군을 신설하여 제3단계작전인 이른바 "후단작전(後段作戦)"을 준비합니다. 일본군의 공격은 약 3개월후인 11월 3일에 재개되었습니다.
그 사이 장개석과 루즈벨트, 스틸웰간의 대립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중경으로 복귀한 스틸웰에게 살윈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Y군을 위해 X군의 증원을 요청했으나 스틸웰은 이를 거부하고 섬북에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대를 일본군과의 싸움에 투입하라고 응수하였습니다. 이것은 장개석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결국 장개석은 루즈벨트에게 스틸웰의 해임을 요구했고 10월 19일 스틸웰은 웨드마이어로 교체되었습니다. 이런 동맹국들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중국은 3개월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선을 제대로 보강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목표는 중국 주둔 미공군 최대기지인 계림이었습니다. 요코야마 중장은 공격을 시작하기전 다음과 같이 훈시하면서 결사를 다집니다.
"형양 공략전에 막대한 희생을 치뤘으니 미공군의 본거지인 계림에서는 더욱 치열한 저항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11군은 계림에 당도하기까지는 전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계림성 위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은 우리 11군이 아니라, 우리의 시체를 넘고 진군하는 후속부대인 것이다."
3개월간의 휴식과 재편에도 불구하고 이미 피폐해진 일본은 식량과 물자를 제대로 수송하지 못했고 제11군은 전염병과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군 역시 극도로 피폐해진데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더이상 증원할 수 없는 병력도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웨드마이어에게 적어도 2개월은 버틸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중국군은 계림과 유주의 방어를 포기한채 퇴각하여 11월 10일 두 도시는 동시에 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중국군 제131사단은 최후까지 저항하여 사단장 감유옹중장이 전사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광주와 홍콩에 주둔한 제23군 산하 제22사단이 남녕을 공격하여 11월 24일 재점령하였고 12월 10일 중불국경에 당도함으로서 이치고작전은 종료됩니다. 그러나 철도 부근에서의 중국군에 대한 소탕작전과 비행장 점령은 45년 2월까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상계작전과 후단작전의 전개도. 붉은 색이 일본군의 진격상황. 이로서 일본군은 중국을 완전히 반토막내는데 성공했으나 다른 전장에서 참패함으로서 이 승리는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험프루트의 종점인 곤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웨드마이어는 버마로부터 X군 소속의 제14사단과 제22사단을 곤명으로 급히 수송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참의 한계에 직면한 일본군은 곤명으로 진격할 능력이 없었고 웨드마이어의 조치는 사실 때늦은 것이었습니다.
44년 4월부터 12월까지 약 8개월간의 전역에서 중국군은 50만명이상의 병력을 상실했고 모든 전구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남, 호북, 호남, 광서, 광동 등 곡창지대를 모두 빼앗겼고 100여개의 도시를 상실했으며 6천만명에 달하는 인구가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7개의 주요 공군기지와 36개의 비행장이 함락되었죠. 특히 제1전구와 제4전구, 제7전구, 제9전구는 완전히 괴멸되었으며 제3전구는 고립되었습니다.
이치고작전은 중일전쟁 전체를 통틀어 지나파견군이 직접 주도한 유일한 대규모 공세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전략적인 것이 아니라 전술레벨로 국한되어 있었고 전술적으로 큰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한데다 시기적으로도 매우 적절치 못한 작전이었습니다. 당초 지나파견군에서 5개사단을 남방으로 전용키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이를 취소하고 대신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에서 병력을 대거 빼냅니다. 이때문에 다음해 8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자 관동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또한 철도는 장악했지만 정작 수송수단이 부족하여 남방의 물자를 육상으로 수송한다는 것은 꿈같은 소리였고 게다가 중국군 유격대의 지속적인 역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국내 비행장들을 점령하여 B-29의 본토 폭격을 막겠다는 것도 마리아나제도의 함락으로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발진하는 B-29는 일본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병참상의 문제로 제약이 많아 실질적으로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런 최소한의 계산조차 없이 무작정 공세를 시작하였고 막대한 병력과 물자만 소모한 셈이었죠. 한마디로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장개석 정권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는데, 중국은 화북과 화중 전체를 상실했고 주력부대 대부분이 괴멸되었습니다. 43년 11월 장개석은 연합군의 공세에 맞추어 44년 5월부터 전 전구에 걸쳐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중국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회복하고 재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어 45년 5월에 가서야 화남에서부터 제한적인 반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3개월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죠. 이때문에 장개석은 종전후 공산군과의 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산군은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은데다 오히려 어부지리로 국민정부군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이용해 화북과 화중, 만주에서 적극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루즈벨트와 마셜, 스틸웰은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장개석에게 Y군을 전략적으로 시급하지 않은 북부 버마 전선에 투입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 직후 일본의 공세가 시작되어 중국군 일선부대가 붕괴되자 자신들의 전략적 오판을 인정하는 대신 도리어 중국군이 무능하고 싸울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였고 지휘권을 지휘권을 스틸웰에게 넘길 것을 강요하죠.
더욱이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버마전역에 대해서만 집착한데다 장개석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까지 품고 있었던 스틸웰은 중국 동부전선의 절망적인 상황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의 일기에 "고소하다"라고 씁니다. 만약 장개석이 Y군을 형양에서 고전하는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는데 투입할 수 있었다면 전세는 명백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44년의 전역에서 중국군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