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강 중류에서 그 지류인 한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무한은 호북성의 성도이며, 삼국지 적벽대전직전 유비가 조조를 피해 후퇴하여 유기와 합류한 하구가 바로 이곳입니다. 유비는 여기에서 전열을 재정비한후 손권과 손을 잡아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둔후 형주와 서촉을 점령하여 촉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총 면적이 서울의 약 8배에 달하는 무한은 무창, 한양, 한구 이 3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창은 정치의 중심지, 한구는 상업의 중심지, 그리고 한양에는 군수산업의 중심지였으며 이를 묶어서 "무한 삼진(三鎭)"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무한은 삼국시대부터 화중의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중심지의 역할을 맡았고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의 가치를 중시한 서구 열강은 1858년 청나라를 압박해 천진조약을 체결하여 이곳에 조계지를 설치하였고 일본 역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후 한구에 자신들의 조계를 설치하여 양자강을 통한 화남에서의 가장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무한은 광주, 상해와 함께 중국에서도 가장 먼저 근대화되었고 한양에는 각종 근대공업을 비롯해 대규모 병기창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신식문물과 사상이 가장 먼저 유입된 곳이기도 했으며 1911년 10월 10월 무창봉기가 신해혁명의 방아쇠가 되어 청조가 몰락하였죠. 손문의 혁명군과 원세개의 북양군이 이곳을 놓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벌이기도 했으며 장개석의 북벌전쟁 역시 무한 공략이 첫번째 목표였습니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중국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개석은 중국의 근대화된 시설과 공장이 대부분 일본의 공격에 취약한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 35년부터 중요 군수산업의 중심을 좀 더 안전한 내지로 옮기자는 "병공창" 재배치 방안을 수립하여 추진합니다. 또한 독일로부터 정밀 기계와 기술을 수입하여 군수산업을 확충하여 생산능력을 증대시킵니다. 물론 예상외로 빠른 개전으로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않았으나 당시 한양 병공창에서는 매월 75mm 박격포 2문, 한양 88식 소총(독일제 Gew88 소총의 라이센스) 월 700정, 30 절식 기관총(체코제 ZB.30 경기관총의 라이센스) 월 35정, 소총탄 월 600만발, 기관총탄 월 2만발, 화약 월 30톤 등을 생산합니다.
1차대전당시 독일 보병의 제식 소총이었던 Gew88의 카피판입니다. 청말 독일 모젤사로부터 라이센스를 구입하여 당시 장지동이 설립한 한양 병공창에서 1895년부터 생산됩니다. 청일전쟁, 의화단의 난, 군벌전쟁과 중일전쟁, 국공내전에까지 사용되었으며 중일전쟁기간 Gew98의 카피판인 중정식 소총과 함께 주력 소총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국민정부군외에 공산군과 우리 독립군 역시 이 소총을 사용하였죠. 일본군은 자신들의 38식 소총이 이 소총에 비해 화력과 명중률에서 명백한 열세를 보이자 급히 99식 소총을 개발하였고, 무한 점령후 대량으로 노획한 88식 소총과 생산설비를 적극 활용하였죠. 정확한 생산 수량은 확인할 수 없으나 오랜 기간동안 매우 많은 수가 생산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양 병공창의 모습. 30년대중반 남경정부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충된 한양 병공창은 상해, 금릉 등과 함께 중국 최대 군수공장중 하나였습니다.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시 상해와 북평, 천진, 남경 외에 내지에도 일본 조계가 있었는데 특히 양자강의 교통과 무역의 중심인 한구에는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1,738명의 일본 거류민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구를 통해 내륙과 무역을 하였고 주요 수출입 물품은 사탕, 면포, 해산물, 식료품, 도자기, 화학공업약품, 석탄, 시멘트, 기계류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노구교사변이 발발하고 상해에서도 중일 양측의 충돌이 우려되자 일본정부는 중국내 모든 거류민의 철수를 명령합니다. 한구에서도 중국군이 일본 조계를 포위하고 조계 상공에 전투기가 위협 비행을 하는 등 무력 시위를 하자 일본은 8월 중순까지 영사관을 폐쇄하고 1개 대대 700여명의 육전대와 거류민들을 모두 상해로 철수시킵니다. 일본이 철수하자 중국군은 텅빈 일본 조계를 무혈 점령하였고 38년 8월 13일 일본 조계에 대해 일방적 회수를 선언한후 한구시 직할구역으로 편입시킵니다.
남경이 함락되자 장개석은 수도를 중경으로 천도하는 한편, 무한 한구에 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를 설치합니다. 상해와 남경이 함락되면서 해안가의 공장들을 사천과 귀주 등 내지로 대규모 이전을 추진했으나 기업가들의 비협조와 여러가지 여건의 문제로 미미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무한은 남경함락이후 사실상 중국 군사, 경제를 지탱하는 거점이나 다름없었죠. 남경 함락직후인 38년 1월 장개석의 최측근이자 참모총장인 진성을 무한위수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무한의 수비를 강화합니다. 6월 서주회전에서 패배한 직후부터는 무한의 산업시설을 중경과 사천 등 내지로 이동시키는 한편, 무한일대를 새로이 제9전구로 설정하고 병력을 대규모로 증강하여 방어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무한은 남경과 마찬가지로 주변이 넓은 평야지대이고 험준한 산이 없어 지형적으로 방어에 불리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남성과 호북성, 안휘성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서 북쪽으로는 대별산맥을, 동쪽으로는 번양호를 비롯한 장강남안에 펼쳐진 많은 호수와 늪지대를 활용한 지연전과 기동전, 소모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한다는 전략을 수립합니다. 여기에는 제9전구를 중심으로 정잠의 제1전구와 서주에서 철수해온 이종인의 제5전구가 최외곽 방어선으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집결한 병력은 3개 전구를 합해 최대 47개군 120개 사단 총 80만~100만명에 달하였고 항공기 200여대와 군함 30척도 동원되었으며 이중에는 소련에서 파견한 파일럿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 해군이 양자강을 따라 거슬러올 것을 대비해 다수의 기뢰를 살포하여 양자강의 운행을 차단시키고 무한상공의 방비를 위해 소련제 고사포를 배치합니다. 특히 방어의 핵심은 무한의 관문이라 불리는 마두진과 전가진으로, 이 일대에는 험준한 고지와 습지대가 펼쳐져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천험의 요새였습니다.
중국군의 전의는 여전히 높았으나, 많은 부대들이 그동안의 연속된 전투로 극도로 소모된 상태였고 소련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지만 그동안 상실된 장비와 병력의 보충은 결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100만에 달하는 병력중 절반가량이 중앙군이었고 나머지는 운남, 사천, 광동, 광서, 호북, 호남 등 각지에서 긁어모은 지방잡군들이라 무기, 장비,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중앙군과의 격차가 매우 컸고 지휘계통의 혼란과 협동작전 역시 미숙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것은 중국군에게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한편, 일본 대본영은 당초에는 남경 점령후 곧장 한구와 광동 공략을 계획했으나 병참의 한계와 병력 부족으로 38년 2월 "불확대방침"을 결정한후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현지부대의 성화에 밀려 서주를 점령한 직후인 6월 18일 무한과 광동에 대해 동시에 공략하여 대중작전을 끝내기로 결정합니다. 이를 위해 중지나방면군을 당초 6개 사단에서 14개 사단으로 대폭 강화하는 한편, 중국전선의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하여 만주를 제외하고도 23개사단, 4개 혼성여단 등 총병력은 8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전체 육군의 70%에 달하는 병력이었죠.
대본영은 무한이 중국의 중심부라는 점과 중국군의 대병력이 집결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의 격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따라서 동원된 병력은 중지나방면군 산하 제2군과 제11군 등 총 9개 사단 및 1개 혼성여단으로 도합 40만에 달하였고 이는 상해전역이나 서주회전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습니다. 무한 공격을 위해 제2군이 서주에서 회하를 건너 남하하여 노주 근교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제11군은 제3함대의 엄호를 받으며 남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안휘성을 침공합니다. 즉, 제2군이 북쪽에서, 제11군이 동쪽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취합니다.
제일 먼저 일본군 제6사단은 양자강 북안을 따라 진격하여 6월 12일 안경을 점령하였고, 7월 26일에는 구강을 점령하여 무한 공격을 위한 교두보와 전진항공기지를 마련합니다. 구강을 방어하는 중국군은 제3함대의 전진을 막기 위해 구강의 강상에 수백개의 기뢰를 살포하고 폐선을 침몰시키는 등 격렬한 저항을 하였고 중국공군도 새로 도입한 소련제 신형 단엽기인 I-16전투기를 앞세워 대규모로 출격하여 쌍방은 "노구교사변이래 최대의 공중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7월말 이른바 "장고봉사건"의 발발로 만주에서 일소간의 전면전의 위기가 고조됩니다. 그러나 곧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비록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대본영은 당장 소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고 무한작전에 집중합니다
※ 장개석은 38년 4월 손과를 모스크바로 보내 중, 소 양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공동으로 일본과 맞서기를 희망했으나, 당시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나치독일의 위협에 직면한 상태에다 정권의 공고화를 위해 대숙청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물론 일본도 이런 소련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일본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한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합니다.
8월초부터 구강비행장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대대적으로 무한을 폭격하고 중국공군과 치열한 공중전을 펼치며 제공권을 점차 장악해 나갑니다. 이렇게 제2군과 제11군이 무한공격준비를 마치자, 대본영으로부터 무한공략을 명령하는 "대륙명 제188호"가 중지나방면군과 제3함대에 정식으로 하달된 것은 8월 22일이었습니다. 일본이 가을에 공격을 시작한 것은 병참의 곤란과 물자 부족때문으로, 추수기를 이용해 식량을 현지에서 알아서 조달할 것을 명령합니다. 제2군만 해도 1만대에 달하는 각종 차량과 1만7천두의 말을 동원했으나 약 40만에 달하는 대병력의 병참을 지탱하는 것은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죠. 양자강을 따라 서진했던 제11군은 그나마 강을 통해 보급선을 유지했으나 제2군은 극심한 보급 부족에 허덕였고 여기다 콜레라까지 퍼져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렇게 쌍방 모두 개전 이래 최대의 병력을 집중시켜 일대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중국군의 방어선은 마치 양파껍질이나 다름없을만큼 두꺼웠기에 일본군은 시작부터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앞에서 고전과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제2군은 북쪽에서 갑군과 을군으로 나누어 진격합니다. 갑군(제3사단, 제10사단)은 대별산 북방으로 우회 서진하여 8월 26일 육안을 점령한후 9월 15일 광주를 공격하여 4개 사단에 달하는 중국군의 저항을 2일간의 격전끝에 돌파하여 점령하지만 험준한 산속에서 탄약과 식량 부족에 허덕이며 4천이 넘는 사상자를 냅니다. 또한 나산에서도 중앙군이 방어하는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나 5일간의 격전을 벌여 9월 21일 점령하지만 제10사단 제39보병연대만 해도 당초 2800명이 5일만에 800명으로 줄어들어 병력의 사상율은 거의 3/4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나산에서 신양까지는 겨우 40~50km에 불과했으나 일본군이 신양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것은 20일뒤인 10월 12일이었죠. 그만큼 일본군의 진격은 한발짝 한발짝마다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을 만나 그야말로 "피로 길을 씻는 진격"이었습니다.
게다가 을군(제13사단, 제16사단)은 대별산맥에서 이종인의 제5전구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9월 16일부터 한달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막대한 사상자를 내었고 산중에 갇힌 일본군은 기아와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거나 후송되는 이들이 속출합니다. 10월 중순에 와서야 간신히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대별산맥을 따라 진격중인 일본군. 중국군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곳곳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습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도해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한편, 동쪽에서 양자강을 따라 서진하는 제11군은 제101사단과 제106사단이 노산과 마안산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선 앞에서 막대한 사상자만 낸채 한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106사단은 덕안에서 압도적인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제11군 사령부에서 공중에서 탄약과 식량을 보급하고 제17사단을 급히 증원하여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106사단은 전사자만 3300명, 부상자 4천에 1만명이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전염병에 걸려 후송되었고 이는 2만5천명의 병력중 70%에 달하는 손실이었습니다.
노산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제11군은 제9사단과 제27사단, 해군육전대를 서진시켜 마두진을 공략하게 합니다. 9월 7일부터 1주일간의 치열한 격전끝에 14일 오전 철벽을 자랑하던 마두진은 결국 함락됩니다. 양사단은 계속 서진하여 10월 27일 가승교를 점령하여 무한 남쪽의 오한철도를 차단시킵니다.
양자강 북안으로 서진하고 있던 제6사단은 숫적으로 2배 이상 우세한 중국군 8개 사단의 반격을 받았고 8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이들을 간신히 격파하고 9월 6일 광제를 점령했으나 중국군은 광제를 탈환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역습을 반복하여 일본군은 근 한달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간신히 9월 27일 전가진에 도달합니다. 이곳은 마두진과 함께 중국군 방어선의 핵심이었습니다. 이곳의 공략을 위해 제6사단외에 제3함대와 해군 육전대까지 투입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결국 2일뒤인 29일 함락됩니다.
무한의 관문이자 방어의 최대 요충지인 마두진과 전가진이 함락되자 무한 함락은 이제 시간문제가 됩니다.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에서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무한으로 접근해 오자 장개석은 더이상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고 10월 17일 중국 군사위원회는 무한 포기와 중경으로의 퇴각을 선언합니다. 전 전선에 걸쳐 철수명령이 떨어졌고 한구 북쪽의 평한철도 철교를 폭파시키고 양자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서주회전때와 마찬가지로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기동철수하는 전술로 일본군의 추격을 교묘하게 피하여 서쪽으로 후퇴합니다.
10월 24일 제6사단 선두부대가 한구 교외까지 진출하여 26일 한구와 무창이 완전히 점령되었고 27일에는 한양이 점령되어 무한 전역이 함락됩니다. 장개석은 10월 25일 새벽 부인 송미령과 함께 한구비행장을 탈출합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것은 주덕과 주은래였는데 그들은 일본 조계에 불을 지르고 군수공장 등 주요시설을 폭파시킨후 탈출합니다.
※ 당시 주은래와 주덕을 비롯한 공산당 대표부가 국민정부와 연안간의 연락책의 역할을 위해 한구에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제국군(권석근 저, 코람데오 출판사)"에서는 "최후까지 남아서 싸운 부대가 공산군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 "도해 일중전쟁"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당시 산서지역에 있었던 팔로군 정규사단이 이 전역에 투입되었다는 자료는 없습니다.(신4군 유격대가 양자강 중하류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한구에 직접 배치되지는 않았음) 그리고 당시 장개석과 국민정부가 병력 보존을 위해 싸우지 않고 무한을 포기할 것을 결의했다가 주은래와 주덕이 결사반대하여 "정부군이 철수한다면 공산군 단독으로라도 싸우겠다"고 주장하자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전후 사정과 무한의 중요성을 고려할때 장개석이 싸우지 않고 무한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국공간의 대립과 알력을 조장하기 위해 일본측에서 의도적으로 날조했거나 와전되었거나 아니면 공산측의 일방적인 선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구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3일 자신들의 국경일인 "명치절"행사와 함께 한구 개선 페레이드를 펼쳤고 무창에 제11군 사령부를 설치합니다. 이어서 후퇴하는 중국군을 추격하여 11월 11일 대본영이 정한 최대 진출한계선인 통성과 악주를 점령함으로서 무한 작전을 종료합니다.
무한 함락을 알리는 동경 아사히 신문 38년 10월 27일자 기사
※ 사진출처 : 도해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그러나 중국군은 일본군이 계속 추격하여 악주로부터 남서쪽 150km에 있는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까지 공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우려하였고 호남성 주석인 장치중은 장사를 일본군의 손에 내주기전에 초토화해야 한다면서 방화대를 조직해 11월 12일 장사 시가지 전체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사전에 장개석과 논의된 일인지는 지금까지도 명확하지 않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상당히 성급한 결정이 되었고 국민들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됩니다. 따라서 장개석은 직접 11월 16일 장사로 날라와야 했고 자신의 최측근이자 영향력이 막강한 장치중에게 차마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그는 대신 장사의 방위사령관인 풍제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총살시킵니다.
8월 20일부터 시작되어 11월 11일까지 약 3개월간의 한구 전역에서 쌍방의 피해에 대해 일본어 위키에는 일본군 전사자 9,500명, 부상자 26,000명에 대해 중국군은 전사자만 195,500명, 포로 11,900이라고 되어 있는데 반해, 영어 위키에는 중국군 사상자 225천명에 대해 일본군은 적어도 10만이상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무한위수사령관으로서 무한보위전을 지휘했던 진성(1897~1965). 장개석의 최측근이자 당시 중국군 최고위장성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중 하나로 중국군 고급 지휘관들을 무시했던 스틸웰도 백숭희와 진성에 대해서는 매우 높이 평가했습니다. 북벌전부터 공산당 토벌, 중일전쟁, 국공내전 등 주요전역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국공내전 말기 미국과 대립하던 장개석은 미국이 대만의 분리독립을 추진할 것을 우려하여 진성을 대만성 주석으로 임명합니다. 이후 대리총통 이종인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진성이 제2대 부총통이 됩니다. 황포군관학교 1기 졸업생이었기에 장개석을 "위원장"이라 부르지 않고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를만큼 서로 친밀한 관계였고 국방부장이었던 하응흠과는 정치적인 라이벌이기도 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물론 양쪽 모두 신뢰성은 다소 의심스러우며 일본군은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서주회전이상으로 고전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상자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았을 것입니다. 중국군 방어부대들은 거의 전멸할때까지 후퇴하지 않고 저항하였고 적극적인 전술을 구사하여 기습과 매복, 포위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위키는 일본측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판단되며 영어 위키는 다소 과장된 것같습니다.
일본군의 승리에는 전차와 항공기의 공중지원이 큰 역할을 하였으나 일본 항공대의 피해는 중국측을 능가하여 56기를 상실하고 중국은 40기를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일본 전투기들의 작전반경이 작아 엄호를 받지 못한 폭격기들에 대해 중국 공군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함으로서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한편, 일본은 한구전역과는 별도로 9월 7일 화남의 광동성 공략작전을 발동합니다. 당시 광주와 자유무역항 홍콩을 통해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소련 등지에서 대량의 군수품이 유입되고 있었고(독일은 리벤트로프 외상이 취임한후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38년 4월에는 군사고문단을 철수시켰으나 이때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자체를 차단시키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38년말까지 중국에 대한 최대원조국은 소련과 독일이었습니다.) 이는 전체 공급의 8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 대해서는 일본의 중국 봉쇄망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당시 해군은 해남도 공략을 강하게 건의했으나 해남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가까워 영, 프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으로 일단 보류됩니다.
광주는 원래 손문시절부터 국민정부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장개석은 이곳에서 시작하여 북벌을 개시하였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근대화된 곳중 하나이자 홍콩을 경유하는 해외 무역의 거점이기도 했죠.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동성이 공격받을 가능성은 예상했으나 한구전역이 끝난후에나 시작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광동성의 주력병력은 대부분 한구방면으로 전용된 상태라 제4전구 산하 13개사단 11만명정도였고 지방잡군이 대부분으로 장비와 무기, 훈련도 매우 불충분했습니다.
일본은 9월 19일 새로이 제21군을 편성하였고 제5사단, 제18사단, 제104사단, 제4항공단 등 7만명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상해, 청도, 대련 등에서 100여척의 수송선을 타고 출발하여 해군 제5전대, 제9전대와 함께 10월 12일 백야사만에 상륙합니다. 중국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광동성 주석 여한모는 장개석이 직접 결사항전할 것을 전보로 날렸음에도 모든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한편 광주의 포기를 결정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그는 장개석의 사전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장개석은 한복구를 처형할때처럼 그를 대할 수 없었던 것은 지방군벌에 불과한 한복구와는 달리 중앙군내 광동군벌의 영향력이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무단 철수를 이유로 쉽사리 처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30년대 광동군벌을 통제하려다 몇번이나 그들의 집단항명과 반란에 직면한 적이 있는 그로서는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통제력과 권위가 이전에 비해 많이 강화되었음에도 여전히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죠.
여한모(1897~1981). 최종계급은 일급상장. 광동군벌인 장발규계에 속하는 인물로 북벌전쟁당시 제11사단을 지휘했고 이종인과 장개석이 대립한 장계전쟁에서는 장개석편에서 싸웁니다. 그러나 광동군벌의 원로인 호한민 체포 사건으로 광동군벌들이 연합하여 장개석과 대립했으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내전 중지에 합의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광동성 주석 겸 제4전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일본군의 광동침입을 막지 못해 스스로 사임합니다. 그러나 장개석은 광동군벌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그를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기로 했고 40년에는 제7전구 사령관에 임명됩니다. 국공내전기간에는 해남도의 방어를 맡았으나 이미 전세가 기운 상태에서 임표가 이끄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여 대만으로 도주합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또한 장개석이 직접 관여하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싸우지만 장개석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지방군벌들은 여전히 전투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스틸웰은 장개석의 지휘방식에 대해 극도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장개석이 예하 지휘관들을 극도로 불신하고 소소한 부분까지 관여한 것도 이런 군벌들의 소극성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군벌들은 장개석이 "자신의 중앙군에 대해서는 최대한 보존하면서 자신들만 희생시킨다"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매우 일방적인 주장일뿐으로, 오히려 중앙군이 전투에서 주된 역할을 맡고 마지막까지 싸우며 많은 희생을 치룬 점에서 자신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정당화하기 위한 억지궤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내에서 "여한모가 일본에게 매수된 것이 아니냐"라고 격렬한 비난의 여론이 들끓자 여한모는 스스로 사임을 청하였고 장개석은 그를 해임한후 광동성 주석에 같은 광동군벌인 장발규를 임명합니다. 또한 제4전구 부사령관에는 설악을 임명하였죠. 10월 21일 제18사단이 광주를 점령하였고 외국선박의 출입을 금지시킵니다. 또한 제5사단과 해군육전대가 호문요새를 점령함으로서 광주주변의 외곽지역을 모두 제압함으로서 광동작전을 종결시킵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880명정도였습니다. 일본은 북쪽에서는 천진에서 남쪽으르는 마카오까지 약 2,400km의 중국 해안을 봉쇄합니다. 그러나 일본해군의 병력이 불충분하고 너무 광범위한 지역이라 완전히 차단하는데는 실패합니다.
일본군으로서는 하나의 미션을 완료한 셈이었지만 중국군의 포위섬멸에는 실패하였고 중국군은 여전히 저항능력을 가지고 더욱 깊숙한 내륙으로 후퇴하여 험준한 산악지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그러나 이미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일본군으로서는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폭격외에는 더이상 깊숙히 진격할 수가 없어 화중전선은 교착화됩니다. 물론 중국으로서도 무한과 광주의 상실은 큰 타격이었으나 장개석은 새로운 원조루트를 통해 물자를 확보하였고 지속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갑니다.
노구교 사변후 1년 반이 경과한 이래 중국의 북쪽의 동부지역의 주요도시 대부분을 점령했음에도 중일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많은 병력과 산업시설, 영토의 40%를 상실하였고 내륙지역의 생산능력은 전체의 6%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장개석은 "무한의 함락은 우리의 싸움이 방어전에서 공격으로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호언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교착상태를 이용해 사천, 귀주, 운남 등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중국 전토를 장악하고 장개석정권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기로 합니다. 첫번째는 중국의 해외원조루트를 차단하고 경제적으로 봉쇄하여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것과, 두번째는 국민정권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국민당 총재이자 No.2의 위치에 있던 왕정위의 배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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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작성시간 13.08.06 양쪽 다 대단하군요 ㄷㄷ 중일전쟁은 존재감이 작은 전쟁인 것 같은데, 실상은 태평양 전쟁 못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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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가에서 작성시간 13.08.06 일본도 중국을 잘 요리해 나갔다고 봐야하는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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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8.06 그나저나 사상자에 대해서 양측의 기록이 다른건 임진왜란때나 중일전쟁때나 다른게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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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8.07 우리는 일본에 의한 태평양 전쟁이나 독일에 의한 유럽 전쟁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반면에 중국인들은 중일 전쟁이 가슴속에 남아 있을듯.....